나쁜 소녀의 짓궂음 독후감상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장편소설

by 신현호

서문

201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필자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드물게 아직까지 생존(?)하시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작가이다.


나는 현역병 시절에 요사의 장편소설 <염소의 축제>로 그의 작품 세계에 입문했다. 그 당시 노골적이고 폭발적인 요사의 소설을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는지, 이어서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를 읽었고, 역시 이 페루 작가는 거물이고, 앞으로도 자주 읽어야겠다 싶어서 꾸준히 요사의 소설을 읽어왔다. 이어서 전역하고 나선 <새엄마 찬양>, <세상종말전쟁>, <도시와 개들>까지, 작가 요사는 독서 활동이 지루해질때마다 나의 독서 생할의 도파민이 되어주었다.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특징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숭고하고 비장한 투쟁사를 그리는 진중한 면이다. 이렇게 투쟁사를 그리는 그의 이야기는 정의의 실현을 위한 영웅적인 투쟁과 참혹한 패망을 주제 삼아 잔인한 시대를 작품으로 엮어왔다. 이러한 스타일에 해당하는 작품은 대표작 <염소의 축제>, <세상종말전쟁>, <도시와 개들>으로, 사회를 향해 투쟁적인 면모를 지닌 소설들이다.


하지만 요사의 또 다른 면은 이와 별개로 대단히 코믹하고, 재치있으며, 엉큼하기까지 하다. 이 점 또한 매우 특징적인데, 본인은 약 9년간 독서 생활을 이어오면서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를 읽고 이렇게까지 순전히 웃겨서 낄낄대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처음 접해보았다.

국가의 명령으로 병사들을 위무하기 위한 매음굴을 운영한다는 심각한 이야기를 재기발랄하게 서술한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새엄마와 아들의 근친상간을 그린 3류 관능소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코믹하고도 충격적이게 그려내는 <새엄마 찬양>이 요사의 코믹한 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작가 요사의 이러한 스타일은 후기 작품으로 나아갈 수록 어느 한 스타일로만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두 스타일이 혼용되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때로는 충격적일 정도로 진지해지고, 진중한 이야기가 어처구니 없이 우스워지는 상황을 그리며 작품의 수준을 높여왔다. 이러한 성격이 두드러지는 작품이 바로 요사의 역작 <염소의 축제> 라고도 할 수 있겠다.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요사의 이러한 스타일의 혼용은 강해져서 가장 일반적인 연애소설을 지향하는 <나쁜 소녀의 짓궂음>마저 처절하고 영웅적인 실패와 코미디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충격적인 감동을 주고 있었다.


줄거리와 소설의 특징

<나쁜 소녀의 짓궂음>은 '선진국 페루 출신'을 자처하는 여자애 '나쁜 소녀'에게 반한 '착한 소년' 리카르도는 놓친 줄로만 알았던 첫사랑을 운명처럼 세계 각지에서 마주치고, 평생에 걸쳐 그녀와의 사랑이 끊어질 듯 하면서도 점점 커져간다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줄거리는 영웅이 대의를 위해 안락한 생활과 가정을 버리고 대의에 투신한다는 이야기가 흔하다. 하지만 이런 영웅의 일대기를 읽는 독자들은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영웅이 두고 떠난 선량한 부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들은 영웅이 떠난 빈 자리를 그리지 않는다.


소설 <나쁜 소녀의 짓궂음>은 이러한 서사를 비틀어 거대한 야심의 소유자 나쁜 소녀를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평생을 나쁜 소녀만 쫓으며 살아가는 정실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순애보 리카르도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여러모로 이야기는 남녀의 전형적인 구도가 역전된 독특하고 세련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나쁜 소녀의 짓궂음>은 50년대부터 80년대 말미까지의 격동하는 세계사를 배경으로, 착한 소년과 나쁜 소녀의 고향 페루의 흥망성쇠, 60년대의 쿠바 혁명에 경도된 유럽 사회, 프랑스의 68혁명, 미국의 베트남전과 히피들의 반전 운동, 70년대에 떠오르는 일본의 경제 성장, 소련의 개혁이라는 역동적인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라고 보기는 살짝 어려운 구석이 있다.


주인공 리카르도의 꿈이 선진국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민이라는 주제 또한 나름대로 세심하게 묘사된 점도 특징이었다. 성실한 리카르도는 프랑스에서 일평생을 살아가는데도 자신이 언제나 마음까지 프랑스인이 되지는 못하고 여전히 남미 출신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씁쓸해하는 장면들도 그렇고, 여러모로 이민자의 삶과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주제 또한 부족하지 않게 묘사했다.


콜롬비아의 문학가인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처럼 일생에 걸친 사랑이 주제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겪는 노화의 부산물들 또한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좌절감, 생활고, 사랑을 행할 원기를 잃어가는 대신 현명해지는 모습, 사랑 속에서 죽기를 갈망하는 모습 등등이 노화의 묘사의 예시이다.


보통 시간과 사건의 흐름이 뒤섞이는 복잡한 구조를 취하는 요사의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다르게, 이 소설은 대단히 정석적이게도 시간의 흐름이 순리대로 진행된다. 요사의 소설 중에서 이런 소설들이 많지는 않은데, 역시 보편적인 로맨스를 추구하는 이야기답다고 할 수 있겠다.


독후감상문 (스포일러 있음!)

나쁜 소녀는 리카르도를 온전한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출세를 위한 디딤돌 정도로만 이용했다. 나쁜 소녀의 무기는 관능미와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영원한 포로인 착한 소년 리카르도는 언제나 대항하지 못하고 그녀의 가학적인 사랑에 호응하고 만다. 사랑 때문에 착한 소년은 돈, 명예, 우정을 모두 포기하면서 파멸해간다.


그렇다면 정말 리카르도는 이야기 내내 고생만 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리카르도의 인생이 나쁜 소녀와의 사랑을 제외하면 무척이나 지루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대체할 수 없는 사랑에 조종당해 왔던 것이다.

나쁜 소녀에게 이용 당하는 리카르도를 보면서 '사랑으로 파멸한 남자' 라고 표현하는것은 엄연히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나쁜 소녀를 제외하면 누구의 사랑에도 호응할 여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따분하고 절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나쁜 소녀와의 사랑이 없는 그는 마땅한 이유도 없이 이미 파멸한 남자인 셈이다. 게다가 그의 사랑은 아무런 효용이 없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랑은 점점 나이를 먹고 두 사람이 서로의 유일한 '페루 스타일의 친구'가 될 수록 나쁜 소녀를 얽매어, 그를 언제나 정복하는 나쁜 소녀를 역으로 정복하고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이러한 성격을 따져볼 때, <나쁜 소녀의 짓궂음>이 단순히 절망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야기 속에서 착한 소년의 사랑 고백을 유치하고 고리타분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던 나쁜 소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의 사랑에 점차 감화되어 번역가 리카르도의 문학적인 표현들을 재미있어 하거나, 남편들 사이에서도 착한 소년을 구태여 만나서 밀애를 나누거나 연락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본인은 이러한 점에서 불륜과 배신, 노골적이고 엽기적인 성애로 점철된 이 이야기가 본질적으로는 순수한 사랑을 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착하기만한 리카르도의 무엇이 나쁜 소녀를 감화시킬 수 있었을까 하면, 그건 역시 이 이야기의 핵심 소재인 '사랑' 이라고 할 수 있다.

착한 소년의 사랑은 분명 그녀의 외견과 매력에 유혹당한, 대단히 육체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착한 소년의 실패한 구애는 질투, 좌절, 폭력, 심지어는 자살 시도로까지 변질되는데, 이러한 상황을 통해 사랑이라는 요소가 상황에 따라 왜곡되는 변화무쌍한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사랑은 단순히 파괴적인 요소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 때 박애와 구원과 같은 아름답고 숭고한 요소로까지 승화되는데, 계통상 성욕의 일부에 불과한 사랑이 작용하는 범위가 얼마나 광대한지 알 수 있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나쁜 소녀 또한 평생의 은인이자 기사도의 표본인 착한 소년을 바라보면서 우정과 사랑을 쌓아가고, 결코 자신은 리카르도처럼 정직할 수 없다는 거리감에 절망적인 존경심마저 품는다.

하지만 나쁜 소녀는 태생적으로 거대한 야망에 휘둘리는 영웅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또, 대등하고 충실한 사랑을 나누기엔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사악하기 때문에, 가까이 둔 모든 인물을 파멸시키기 때문에 그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착한 소년과 거리를 둔 채 맴돈다.

이 점이 대단히 안타깝기도 한 장면이었던 것이, 사랑이 변화시키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많은 것을 변화시켰지만 리카르도의 인생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나쁜 소녀에 걸맞는 위대하고 부유하며, 탐욕스러운 파렴치한이 되는 대신 소소한 번역가로 남았다. 이 점에서 <나쁜 소녀의 짓궂음>의 로맨스가 비극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인물들의 살아가는 방식과 커져버린 사랑이 충돌하는 묘사들이 애틋하고도 아련하다. 이야기의 결말까지 읽고 나면, 이 이야기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이야기의 마지막, 나쁜 소녀의 최후의 가면마저 발가벗겨진 마지막 장면에서, 독자들은 나쁜 소녀의 사랑이 길러낸 어울리지 않는 세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이야기를 감동적이고 충격적이게 마무리 지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바꾸진 못했지만, 정말 많은 것들, 본성마저도 어느 정도 변화할 수 있도록 용인한 것이다.

끝까지 읽고 나면 착한 소년이 정말 배신 당했는지, 평생의 사랑을 쟁취했는지 오묘해지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요사의 다른 소설들과 다르게, 충격적인 전개를 이어가지 않고 오히려 작가의 획일화 되어가는 메세지에서 벗어나보려는 시도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때문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의 파격적인 충격에 지친 독자들에게 한 번쯤 권유해보고 싶은 소설이다.


여러모로 독창적이고, 과감하며, 사랑의 추악한 정욕과 숭고한 박애가 공존하는 상황을 정확히 잘 그려낸 뛰어난 소설이었다. 역시 거장은 거장이다. 요사의 소설을 읽을수록 요사는 아이러니한 요소의 공존을 테마로 삼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삼아 나만의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줄거리 : 3.2 / 5.0 - 20세기의 역사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갔다.

스타일 : 2.5/ 5.0 - 요사의 소설 치고는 스타일 자체는 평이했다.

심리묘사 : 3.5 / 5.0 - 사랑이 미치는 영향을 적절히 묘사했으나, 리카르도의 번민은 적당히 끊은 느낌이다.

취향 점수 반영 총점 - 3.5 - 요사 소설 답게 충격적이고 자신만의 틀을 깨려는 거장다운 용감한 작품.


25년 첫 소설 치고는 시작이 좋다. 좋게좋게 시작했으니, 올해도 많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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