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개요
처음에 베른하르트는 나에게 딱히 기대를 주는 작가가 아니었다. 어렴풋이 베른하르트의 스타일을 찾아봤을 때에는 의식의 흐름이나 무서사에 가까운 줄거리 등으로 소개받아서 독일 문학답게 의식의 구현이나 예술에 대한 철학을 드러내는 작가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몰락하는 자>를 시작으로 베른하르트의 소설에 입문하자, 의식의 흐름을 통해 실패자의 나약함을 고발하며 그 원인과 행태를 분석하는 예리한 스타일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베른하르트의 무시무시한 비판 의식과 타협을 용서치 않는 성격에 흥미를 느껴, 나는 베른하르트의 소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몰락하는 자>에 이어서, 대학생 시절에 <소멸>을 꺼내 읽었다. 이번 소설은 무서사와 비판라는 베른하르트의 특징이 한층 더 강해지고, 조국 오스트리아를 향한 본격적인 야유라는 주제 의식이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사실, <소멸>은 소설보다는 비판적인 보고서에 가까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서사 하나 없는 이야기에 큰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 나로써는 완독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읽다보니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고, 그 이유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향한 작가의 애증이 드러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국 오스트리아를 향한 베른하르트의 독설과 절망
우리가 흔히 오스트리아를 떠올릴 때, 보통은 고풍스런 수도 빈과 고상한 음악가들의 고장을 떠올리곤 한다. 이것이 중부 유럽 내에서 오스트리아가 여행지로 독일보다도 유명한 까닭이고, 오스트리아 정부 또한 이러한 문화적 유산을 자국의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만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경우, 오스트리아의 전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결혼 정책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고려해본다면, 히틀러의 고향이자 세계대전마다 주축국에 기여한 오스트리아의 어두운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오점은 현대 오스트리아 정부의 주도 하에 '클래식의 나라'로 탈바꿈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씻겨나간지 오래였다.
하지만, 모든 작가들이 이러한 세태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결벽증에 가까운 비판과 조롱으로 오스트리아의 결점과 음험함, 협잡꾼 기질을 폭로하고 조소해왔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작가로, 유언으로 자신의 저작물이 오스트리아에서 발간되지 않기를 요구할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비겁함을 혐오하는 작가이다.
반골 기질이 다분한 작가인 베른하르트는 누구보다 파괴적인 글쓰기를 이어가던 작가라고도 볼 수 있다. 서사보다는 의식에 집중하는 스타일도 그간의 글쓰기 방식과는 거리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소설 속 가장 큰 테마가 시대와 개인을 향한 비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른하르트는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의 타협 정신과 예술가, 사회인들의 졸렬함과 기괴함을 끝없이 지탄했다.
베른하르트의 독설은 단순한 혐오와 염세주의에서 비롯된 비난과는 다른 구석이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가장 맹렬한 비웃음을 사는 성격은 역시 타협과 나약함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베른하르트는 오롯이 비판하기 위해 비판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를 향해 스스로 올바른 비전을 제시하지도, 무언가 건설적인 결과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그가 이단아인 까닭이기도 하다.
대신, 베른하르트는 시종일관 그간 문학의 건설적인 성격과 가치 창출을 거부하며 조롱과 증오만으로 자신만의 문학적 세계를 구축했다. 어찌 보면, 베른하르트는 서사와 주제 의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반(反)문학의 개척자인 셈이다.
한편, <몰락하는 자>와 이번에 읽은 <옛 거장들>을 읽으면서, 예술에 한해서 베른하르트는 완벽을 향한 절망을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든 예술가의 목적인 미의 완전한 표현을 두고, 베른하르트는 미의 달성을 위한 초인적인 의지의 필요성과 인간의 나약함과 필수적인 타협이 낳는 실패를 그려왔다.
절대적인 미의 추구와 인간적 한계 사이의 괴리가 자아내는 절망, 좌절, 열등감 또한 베른하르트의 또 다른 테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절망은, 음악가들의 경쟁심과 열등감을 그린 소설인 <몰락하는 자>에서도 나타나지만, 이번에 읽은 소설인 <옛 거장들>에서 작가의 조금 더 깊은 성찰을 통해 소설의 전면에 드러난다.
줄거리
소설의 줄거리 자체는 간결하다. 34년이라는 세월동안 매일같이 틴토레토의 작품인 <하얀 수염의 남자>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타임지의 비평가 '레거'와 젊은 예술가 '아츠바허'의 만남과 면담을 그린 작품이다.
아내를 잃고 홀로 지내는 노인이자 예술 평론가인 레거는 아츠바허와의 만남에서 자신이 30년이란 세월동안 계속 미술사 박물관을 들르는 까닭을 밝히는 대신 거장들의 작품 속 오류를 발견하는데 집중한다.
레거는 모든 예술을 완벽을 달성하기 위한 실패의 역사이며, 모든 작품 속에는 오류가 존재하며, 실패를 발견하면 절망을 발견할 뿐이라고 아츠하버에게 첨언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너무 열심히 분석하고 탐구하지 말 것을 조언한다.
감상문
<몰락하는 자>의 근간을 이루는 '완벽한 미를 그리기 위한 예술가의 시도와 절망'이라는 메세지는 <옛 거장들>에서 본격적인 화두에 오른다.
비판적인 예술가 레거가 미의 추구를 극한까지 몰아붙인 결과, 어떤 거장의 작품도 미를 현현하는 대신 현실적인 한계에 타협했음을 드러낸다. 때문에, 레거는 완벽을 추구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진정한 완벽이란 변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문학이라면 문맥 속 단어 하나, 음악이라면 멜로디 속 음 하나, 그림이라면 붓터치 하나조차 실수 없는 상황이 베른하르트가 말하는 완벽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거장도 그 경지에 도달하는 대신, 현실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기로 타협하는 것으로 작품을 완성해왔다고 레거는 주장한다.
작품 안에서 꾸준히 이야기하듯이,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은 근본적으로 실패 내지는 가장 성공적인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 그 가치가 전무하다는 것이 레거의 주장이었다.
누구도 완벽을 성취할 수 있다면, 예술가와 예술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대체 예술은 왜 존재해야 하며, 예술가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곤란한 맹점을 제대로 찌른 레거의 질문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완벽을 추구해야하는 예술의 근본적인 약점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정말 예술가에게 허락되는 것은 절망뿐이었을까? 비판 의식의 끝에서 베른하르트와 그의 분신 레거는 아주 의아한 말을 내놓는데, 그것은 '결점으로 인한 좌절은 인간성을 나타낸다'라는 주제의식이다.
철저히 수학적인 계산과 기계적인 기교가 낳는 완벽한 미는 곧 완전한 절망을 의미했다. 만일 그런 걸작이 존재한다면, 레거는 인생의 고난을 피해 도망쳐온 예술 속에서도 완전한 절망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 위대한 거장과 기술자들도 완전한 미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기 때문에 레거는 계속 살아갈 희망을 얻었다. 동업자들의 실패와 타협 덕분에, 완전한 미를 재현할 수 없는 현실 덕분에 그는 계속해서 냉소하면서 예술을 추구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비판의 소설가인 베른하르트 치고는 상당히 긍정적인 메세지이지만,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속 '유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완전함을 향한 집착이 예술가와 실패를 낳기 때문에, 웃어넘기는 방법이 필요했다는 점이 살짝 비슷했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최후반부에서 레거는 최악의 실패를 맛보며 비웃기 위해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예술인 오페라의 티켓을 건네면서 아츠하버에게 같이 오페라를 보러 갈 것을 강권한다. 이러한 비판의 극에 달한 태도가 절망을 이겨내는 조소의 유머를 암시하는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결말부에 끔찍한 오페라를 관람하면서 작품을 지배하는 지나친 긴장감과 도취, 자의식 과잉을 보면서 혐오와 비웃음을 키우는데, 오히려 이러한 비웃음은 아직 세상에 완벽함에 당도하지 않았고, 살아있을 여지가 존재하며, 실패가 용인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어느 시도도 철저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무가치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실패가 인간을 만드는 요소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혐오를 인생의 원동력인 비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레거는 실패의 역사인 예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문화예술의 유산들을 앞세워 유식을 뽐내려는 박물관 사람들과 개개인의 성공을 자신들의 자부심으로 악용하려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통해 작가는 조국의 문화정책을 비판했다.
감상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는 점을 명시한 베른하르트는 획일화된 감상문을 암기할 것을 강요하는 '고풍스런 문화의 나라' 오스트리아 교육부를 향한 거침 없는 비방을 이어나갔다.
오히려 베른하르트는 감상은 자유로운 것이며, 감상을 강제하는 교육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평가한다. 감상에는 무엇보다 여지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작가의 논지였다. 이 점은 감상법의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설명하듯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바보처럼 감탄할 뿐, 이해하고 존경할 수가 없다는 논조는 오늘날 정보의 과잉에 반비례한 문화 지체에 시달리는 현대에 가장 필요한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작품의 절반 정도는 단순히 예술과 절망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 오스트리아의 파렴치함을 지적하는데 할애했다. 상술했듯이 오스트리아의 귀족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베른하르트는 예술이 왜 위대한지는 이해하려고 들지 않으면서 편하게 오만을 떨고 싶을 뿐인 속물스러운 현대 오스트리아를 지적한다.
또한, 유럽의 정신과 문화를 향한 탐구 의식의 절멸,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변방으로 전락한 레거의 낡아버린 집 오스트리아, 과잉이 가장 기본이 되는 무식한 현대를 향한 조소, 박물관 경비 이르지글러로 대표되는 겸손과 정직함의 멸종, 비열함이 판치는 현실을 향한 증오까지 베른하르트 다운 주제가 총집합돼 있다.
한편으로는 레거 또한 자국의 문화유산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는 비겁한 오스트리아 정부처럼, 작품을 전적으로 자기 이득을 위해 해석함으로써 구원받았다. 이 점은 베른하르트가 자신의 분신마저 비판하는 조금 특이한 장면이었는데, 타협하고 적응하는 생물인 인간의 성격을 그리는 또 다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무능과 나약함이 만드는 절망을 다루는 작품으로써는 상당히 성공적인 작품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 <옛 거장들>의 사소한 문제는 주제 의식을 벗어난 자국 비판과 작가 비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작중에서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한 하이데거나 슈티프터,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팬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상술한 작가들이 문화 지체라는 현상의 예시를 지명하는 예시로 동원됐다고는 하지만, 모든 원인들을 설명해버리면 작품의 주제인 완전한 미를 추구하는 절망으로부터 너무 멀어지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원인들을 확실하게 지탄하느라 살짝 작품의 주제 의식과 멀어졌다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요컨대, 모든 것을 설명해버리느라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에서 너무 멀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고향 오스트리아의 정취를 향한 애정과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나약함을 향한 증오, 절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안도와 희망에 대한 상념은 꽤나 신선한 성찰이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재미삼아 나만의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줄거리 : 2.0 / 5.0 - 사실상 논외. 베른하르트의 소설은 줄거리 때문에 읽는 소설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메세지 : 4.2 / 5.0 - 비판 의식의 끝에서 절망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낸 거장의 집요함이 놀라웠다. 절망으로 가득 찬 예술사와 인간성의 발견으로 승화되는 주제 의식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스타일 : 3.0 / 5.0 - 무서사와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술 방식은 세련되고 적절했다.
취향반영점수 총점 - 3.4 - 베른하르트 소설의 성격을 한 곳에 응축시킨 듯한 작품.
베른하르트는 어느 책을 펼쳐도 비슷한 비판 일색이라는 점에서 살짝 아쉬운 구석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읽었고, 누군가는 써야만하는 작품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다음에 또 다시 베른하르트의 작품을 읽는다면, 대표작인 <혼란>을 읽어보고 싶지만 절판된 관계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