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진실의 무게
밤새도록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출근을 포기한 김 반장은 아내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빗물이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식탁 위는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과 국을 마주하며 숟가락을 드는 순간, TV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노란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하수관 역류로 인한 대규모 침수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 차량만 550여 대에 이르며, 피해 규모는 수십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김 반장의 손에서 숟가락이 허망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단순한 뉴스 속보를 넘어,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고발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내가 "여보, 왜 그래?"라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백동수에게 "꽉 막혔다"라고 보고했던 그 하수관의 모습이 마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감독에게 보고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무심하게 말했던 백동수의 입술이, 그리고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미약한 존재감이 한데 뒤섞여 그를 목 조르는 듯했다.
김 반장은 아내의 만류에도 집을 나섰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노란 아파트 단지 근처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거대한 양수기들이 뿜어내는 흙탕물 소리가 굉음처럼 들려왔다. 지하 주차장 입구는 노란 차단선으로 막혀 있었고, 119 구조대와 취재진으로 아파트는 어수선했다.
누군가 김 반장을 아는 척하며 다가왔다. 김창식 씨였다. 그는 빗물에 흠뻑 젖은 운동복 차림이었다. 옷에는 흙탕물이 군데군데 튀어 얼룩져 있었다.
"어, 반장님 아니세요? 구청에서 나오셨던?"
김 반장은 범인이 사건 현장에 들렀다가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멈칫했다.
“아... 예... 걱정이 돼서요.”
“우리 집 차도 지하주차장에 있어요. 마음이 뒤숭숭해서 출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기 보세요. 다시 돌아온 구멍은 아예 날아가 버렸고, 저 속에서 나온 하수가 우리 아파트를 덮쳤어요. 아니겠죠? 설마 제가 버린 담배꽁초가 하수관을 막은 것은.”
김창식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허탈함과 함께, 잃어버린 일상에 대한 묘한 상실감이 묻어 있었다. 김 반장은 그저 굳게 다문 입술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김창식이 습관처럼 담배에 불을 붙이자 주변의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며 걸음을 옮겼다.
“이놈의 담배를 끊든지 해야지, 마누라 잔소리도 그렇고 사람들의 시선도 무슨 미개인 보듯이 한다니까요? 반장님은 담배 안 피웁니까?”
김 반장은 대답 대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자신의 죄책감을 한껏 머금은 듯했다. 김창식은 그런 김 반장의 눈치를 살피며 쥐고 있는 담배꽁초를 들고 아파트 상가 쪽으로 걸어갔다.
같은 시각, 빨간구청 회의실.
백동수는 침수 피해 관련 긴급 대응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구청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 사태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언론에서는 우리 구청의 관리 소홀을 지적하고 있어요."
백동수는 맞은편에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벌건을 분노와 절망이 섞인 눈으로 노려봤다.
‘당신이 구청 준설팀에 협조만 구했어도,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그 말은 결국 자신의 귀에도 닿지 못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 갇혔다.
회의가 끝난 후, 복도에서 이벌건과 마주쳤다. 순간 복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백 과장, 이번 일 참 안 됐어. 그게 말이야, 준설팀이 워낙 바빠서 말이야."
이벌건은 평소처럼 능글맞게 말했지만, 무심코 혀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그는 백동수의 눈치를 살피며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이런 일이 생겨서 유감이지만, 난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안 됐죠. 감독님. 안 됐습니다. 모든 게요."
백동수는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이를 악물고 분노를 삭였다. 이 상황을 침묵하고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백동수는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분노와 비참함에 휩싸인 채, 무작정 구청을 빠져나갔다.
그날 오후, 침수된 지하 주차장에서 물이 완전히 빠진 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전해졌다.
"긴급 속보입니다. 노란 아파트 침수 피해 현장에서 이른 새벽 출근길에 나선 주민 두 명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소방당국은 지하 주차장 진입로에서 시신 두 구를 수습했으며, 정확한 신원 파악에 들어갔습니다."
노란 아파트를 배경으로 뉴스 속보가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를 타고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단순한 재산 피해라고 생각했던 사건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인명 피해의 비극으로 변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