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을 해제하라!"
국회의사당 앞의 거센 함성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다.
화면은 온통 속보로 가득 차 있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동시에 싸늘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문득,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할아버지 이야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리산 자락, 동네 사람끼리 적이 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그 시대.
할아버지가 총성에 쓰러져간 그날 밤.
임신한 할머니가 홀로 영등포까지 도망쳐야 했던 그날들.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눈앞에서 다시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그는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국회의사당 앞 큰 도로는 어디선가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밀려드는 군중 속에 어느새 그도 파묻혔다.
난생처음 겪는, 강력하고 놀라운 기운이었다.
길이 막히고 도로는 거대한 광장이 되었다.
'군인이 시민에게 총을 쏘는 일이 또다시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로 광장은 끝없이 넓어졌다.
이들은 누구인가.
평범한 사람들로 보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명심해라. 어디를 가든, 입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그냥 조용히 살다가 가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그 조용한 목소리.
그렇지만 그의 가슴은 격하게 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당당한 모습과 목소리가 그의 몸속 깊은 곳을 깨웠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이 승리의 포효처럼 거세게 울려 퍼졌다.
군인들은 국회의사당을 빠져나와 조용히 사라져갔다.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평생을 말없이 짐을 나르던 아버지.
빌딩 청소를 하던 어머니의 락스 냄새. 사라진 전세보증금. 날아간 꿈.
입을 다물고 살라고 했다. 조용히 살다 가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할아버지가 할 수 없었던 말. 아버지가 삼켜야 했던 말. 그가 가슴에 묻어두어야 했던 말.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터져나왔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달라!"
그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돌려달라! 돌려달라!"
그는 어느 순간 울부짖고 있었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달라!"
광장은 그의 목소리를 삼키지 않았다. 수많은 함성 속에서, 그의 외침도 함께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