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누군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려 자신을 잡아당기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의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편안한 표정으로 그를 달래듯 인파 속에서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그를 건져 올리려는 듯 따뜻하고 단호했다.
여자를 따라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인파의 함성이 희미해지는 골목길에 접어들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전세 사기당하셨어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울먹이는 숨소리를 억누르려 애썼다. 그제야 자신의 모습이 엉망인 것을 깨닫고는 소매로 얼굴을 잽싸게 훔쳤다. 그렇다고 벌건 낯빛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아까 정말 민망하면서도 가슴이 아팠어요. 여기서 전세 보증금 돌려달라고 외치다니."
그는 훌쩍이다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민망함에 입술이 떨려왔다.
"그, 그게…" 그는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아니죠. 사실, 저도 전세 사기를 당했었거든요. 세상에 나 혼자 버림받은 바보 된 기분, 제가 잘 알죠.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도 했었어요."
"그랬군요. 혹시, 돈은 돌려받았나요?"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전세 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나오기는 했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았어요."
"그런 법도 있습니까?"
"법꾸라지라는 말, 들어봤어요?"
"법, 법꾸라지요?" 그는 되물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미꾸라지처럼 법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거죠. 나같이 멍청한 사람 등쳐먹는 건 일도 아니더라고요."
"너무 억울합니다." 그는 다시 울컥했다.
"법꾸라지는 양심이란 장기가 없어요. 이젠 의심부터 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믿을 사람이 있나요? 대통령도 멀쩡한 나라에 비상계엄을 하는데."
비슷한 아픔을 가진 상대방의 목소리가 그를 위로하듯 감싸 안았다. 뜻밖에도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혼자 끙끙 앓던 고통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묘한 위로가 밀려왔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 안 고파요? 저... 제가 전세 사기 당했을 때, 누군가 밥 한 끼 사줬거든요. 그때 그게 정말 큰 위로였어요."
하루 종일 굶은 그의 눈빛을 안다는 듯, 그녀는 머뭇거리는 그를 데리고 곧장 다음 블록으로 갔다.
환하게 켜진 콩나물 해장국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이 근처에 살아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세 보증금 다 날리고 친구 오피스텔에 얹혀사는 신세가 됐죠. 안 그래도 마음이 뒤숭숭한데 뉴스 속보를 보고 열받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요. 친구는 이불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길래 혼자 나온 거예요."
따뜻한 국물에 그의 몸과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길을 되짚었다.
폐업, 전세 사기, 교통사고. 해고.
서강대교 위에서 어머니의 문자를 보고 오열한 그 순간이 또렷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살아있었다.
식당을 나와서 여전히 말 한마디 없던 그에게 여자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내세요. 그냥 죽으란 법은 없잖아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냥 죽으란 법은 없잖아요."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얼어붙었던 무언가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듯했다.
삶에 대한 절망 대신,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희미한 불씨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