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밤새 걱정하셨을 부모님 생각이 났다. 많이 늦었다.
집으로 다가갈수록 마음은 무거웠지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 주변을 맴돌았다. 가로등 아래 색 바랜 시멘트 벽에 붙은 구인광고가 보였다. 영등포 역 근처 빌딩 구내식당에서 조리사를 구하고 있었다. 그는 홀린 듯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집에 가자. 그냥 죽으란 법은 없다고 했잖아."
집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일을 나갔고, 낡은 작업복의 아버지는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방금 대통령이 계엄 해제했다. 어서 자라."
아버지는 아들이 들어온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전세 사기를 당한 후,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오의 햇살이 창문을 넘어올 때 눈이 떠졌다. 몸은 무거웠지만 아주 작은 안도감이 마음 한구석에 내려앉았다.
오전 일을 마치고 집에 온 어머니가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잠든 아들을 깨우지 않았다. 된장찌개 냄새에 그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상 위에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밥과 맛깔스러운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어젯밤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한 그에게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아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고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이는 밥상을 차릴 뿐이었다.
밥알 하나하나, 국물 한 숟가락마다 스며든 어머니의 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저장해둔 구내식당에 전화했다. 인사 담당자는 이력서 가지고 찾아오라고 했다.
그는 말끔히 씻고 면도를 했다. 어색하지만 정장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구내식당 담당자는 그의 이력서를 꼼꼼히 살폈다.
"조리고등학교에 홍대에서 10년... 자기 가게도 운영하셨네요?"
"네. 2년 했습니다."
"왜 그만두셨어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말했다.
"경기가 안 좋아서... 폐업했습니다."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듯.
"경력을 인정해서 시급을 더 드리겠습니다. 준비할 서류가 많은 것 아시죠. 서류 준비되는 대로 출근하시는 걸로 하죠.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시급제로 우선 시작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담당자는 필요한 서류를 알려주며 찾아와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구내식당 일은 예전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일하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매일 아침 들어오는 식자재를 손질하고, 점심 메뉴를 조리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주방 청소를 하고 제시간에 퇴근했다.
몸은 고되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손에 잡히는 일이 주는 안정감은 그에게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구내식당 벽에 걸린 커다란 TV에서는 하루 종일 뉴스가 흘러나왔다. 비상계엄을 둘러싼 국회의사당 주변 화면을 볼 때마다, 자신의 팔을 잡아당겼던 그녀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밥을 사준 그녀의 위로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생하게 곁에 머물렀다.
어느 날,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법꾸라지.
그녀가 말했던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꾸라지처럼 법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하지만 며칠 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는 긴급 뉴스가 터져 나왔다. 구내식당 손님들도 뉴스를 보며 안도했지만, 한편으로는 또다시 혼란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