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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기쁨 Jan 09. 2023

어쩌다 백일장 반 대표

아무거나 함부로 베끼면 안 되는 이유



중학교 2학년 때였나 보다.

그날은 오후 HR시간에 교내 백일장이 있었다.


요즘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교내 백일장, 사생대회 같은 행사들이 참 많았다. 모든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제출하면 그중에서 우수작품을 선정하고, 우수상을 받은 친구들에게는 시 대회, 그리고 도 대회까지 나가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사생대회는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림만 그리면 최소한 장려상은 받으니 사생대회가 열리면 그날은 꼭 나를 위한 날인 듯 의욕을 불태우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 날은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거기에 비해, 글을 쓰는 데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소질도 없는 것 같고 쓸만한 소재도 없고, 그림을 그릴 때의 그 집중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그저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지루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날 백일장에서 주어진 미션은 산문이 아닌 운문, 즉 ‘시’를 쓰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많은 글의

장르 중 가장 쓰기 어려워하는 것이 시인데… 생각도 하기 전에 머리가 아파왔다. 백일장을 하는 그날 HR시간 40분이 통째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나는 그날 시를 쓰기가 너무너무 싫었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 사람이 하나씩은 반드시 써서 제출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뭐든 어떻게든 일단 써서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시상을 떠 올리려고 교실 천장도 올려다 보고, 글을 쓰는 친구들도 바라보고, 창문 밖으로 평소에 잘 쳐다보지도 않던 구름도 올려다 보고..


뭘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 소용이 없는 그때, 갑자기 그날 등교 길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받은 책갈피가 생각났다. 작은 종이 조각에 괜찮은 시 한 구절을 적고 비닐로 코팅을 해서 문제집을 사면 가운데 끼워주던 그 책갈피… 거기에는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꽤 괜찮은 시가 적혀 있었는데, 그것이 떠오르는 순간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즉시로 단 한 조각의 거리낌도 없이 책갈피에 있던 시를 내 종이에 옮겨 적었다. 베낀 거다.


시를 적는데 5분도 안 걸렸다. 드디어 해방이다. 나는 그러고 남은 시간을 시를 적느라 분주한 아이들 사이를 이리저리 다니면서 깔깔거리고 수다를 떨면서 즐겁게 마무리했다.






그런데 큰 일은 다음 날부터였다.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5교시를 준비하면서 한참을 떠들고 있던 점심시간에, 교내 문예창작반 선생님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리고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셨다.


‘아, 선생님이 아셨구나.. 내가 남의 시를 베낀 것을.. ‘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이제 곧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선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잔뜩 긴장하고 섰다.

하늘이 노랬다.


그런데 아니, 웬걸… 선생님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호의적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고 말씀하셨다.

“어제 백일장에서 네가 쓴 시가 너무 좋더라. 소질 있어. 그래서 너를 학급 대표로 뽑았거든.

뽑힌 학생들은 내일 학성공원에서 울산시 대회를 여는 데 나가게 됐어. 좋지? 내일 오전 수업만

하고 점심 먹자마자 교무실 앞으로 와라. 모여서 같이 출발할 거니까.”


좋을 리가… 노랗던 하늘이 흙빛이 되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이 나가시고, 내가 책갈피의 시를 베껴 적었던 것을 알던 내 친구들은 배꼽을 잡고 웃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친구들이 그렇게 막 넘어갈 정도로 참 우스운 일인데, 당연히 나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시험을 쳐도 그날까지 남의 시험지 한번 훔쳐본 적이 없는 내가 단 한번, 겨우 한번, 지루한 백일장 시간을 모면해 보고자 그닥 유명하지도 않은 어떤 사람의 시를 베낀 건데.. 그 죄에 대한 형벌이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미리 시의 주제를 안다면 내일이 오기 전에 이왕 이렇게 된 것 한번 더 타인의 재능에 의지해보려 할 수 있을 텐데.. 시의 주제는 현장 발표란다. 그날 밤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내 성격상 미루어 보건대, 아마 한숨 못 자고 지나갔을 것 같다.


다음날, 나를 안쓰러움 반, 재밌어 죽겠다는 것 반 쳐다보는 친구들과 모래를 씹는지 밥을 씹는지 모를 도시락을 먹어치우고는 책가방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무실로 향했다. 어디를 끌려가는 것도 아닌데.. 어찌 되었거나 나는 반의 대표인데.. 교무실 앞에 집결한 자랑스러움이 얼굴에 가득한 다른 반 대표 친구들을 보니 더욱 기가 죽는 것 같았다.



어떻게 대회장까지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그날 시를 써서 제출하라고 준 빳빳하고 새하얀 종이에 내가 뭘 썼는지 그것도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것은 시인처럼 멋진 포즈로 시상을 떠올리던 아이들 틈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나, 마감 시간까지, 전에 백일장 때처럼 뭐가 나올 것도 없는 애꿎은 하늘만 바라보다 마치기 직전에 휘리릭 휘갈긴 종이장을 선생님께 냅다 안겨드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공원의 계단을 뛰어 내려오던 나의 모습이다. 정말 당황스러운 날이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스스로 치를 떨면서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제 이것으로 다 끝이다, 어쨌거나 나는 벗어났다 생각했기에 홀가분했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이 끝이 난 줄 알았는데.. 아이고…


다음 날 다시 교실을 방문하신 선생님은 이번 교내 대표로 시 대회에 출전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방과 후 문예반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하신다. 대표로 출전한 학생들은 필수 참여, 그 외의 희망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신나고 즐거운 방과 후 문예반’을 하시기로 하셨다고..

아직도 희미하게 기억나는 너무 해맑아서 야속했던 선생님의 표정에 가슴이 턱 막혔다.



그 이후 얼마 동안이나 코 낀 망아지처럼 수업이 끝난 후 문예반으로 직행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도대체 니가 왜 거기서…”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를 못 하고 문예반 수업이 끝나기까지 어거지로 나를 기다려주던

우영이, 수현이, 윤주 나의 절친들 앞에서 죄인이 된 기분도 힘들었고,

그냥 뭐든 써야 하니까 시인지 뭔지 나도 모를 것을 써서 제출하면,


“이야~ 이 표현 너무 멋지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하얀 얼굴을 살포시 수그리고’(이것은 정확하게 기억나는 내 시의 한 부분이다. 아카시아를 주제로 쓴…)… 니 시 진짜 좋다~”를 연발하시던 더 이해하기 힘들었던 선생님도 내 힘듦을 가중시키시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어쩌다 반대표 시인이 되어 의문의 문예반 멤버로 내 인생에 혼란의 역사를 남겼다.


이제는 돌아보면 헛웃음이 나는, 일련의 어처구니없는 이 사건을 겪은 뒤 나는 다시는 글을 쓸 일도 없겠지만, 쓴다 하더라도 절대로 남의 것을 베껴 쓰지는 않으리라 굳게 다짐을 했다.

다시는 이런 크나큰 대가를 지불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참, 그러던 내가… 요즘 이렇게 글이란 것을 쓰고 있다니..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시 문예반 선생님이 내 시를 참 좋아하시고, 나를 참 이뻐라 하셨는데..

혹시 나에게 나도 모르던 숨은 글쓰기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이제와 글을 쓴다는 것이 그냥 우연은 아닐지도 몰라하는..

이런 엉뚱한 의심이 든다.


어찌 되었거나 나는 50이 다 넘은 나이에 그 부끄럽던 글쓰기를 시작했고

잘 쓰든 못 쓰든 글쓰기의 즐거움과 풍성함을 누려가고 있다.

앞으로도 아마 나는 계속 글을 써 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절대로 남의 글을 베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하하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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