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기쁨 Mar 01. 2023

나니아연대기 복수혈전

나의 깜찍한 복수




나는 4남매의 막내다.

큰오빠, 언니, 작은 오빠, 나…

아들, 딸, 아들, 딸 순서 대로라 엄마의 친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아이들을 질서 정연하게 잘 낳았냐 신기해하면 엄마는 “그걸 마음대로 못하냐?” 의기양양 농담을 하시고는 했다.

우리 4남매는 순서나 캐릭터가 나니아 연대기의 4남매와 거의 비슷해서, 우리 4남매가 묶여있는 단톡방의 이름도 ‘나니아연대기’이다. 결국 나는 ‘루시’ 캐릭터 담당이다.





‘피터’ 담당 큰 오빠는 영화 속 피터와 같이 우리 4남매의 든든한 리더였고, 막내 동생인 나를 무척 이뻐해 주었다. 큰 오빠는 사실 나의 첫사랑이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구성상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하신 것처럼, 큰오빠와 언니가 결혼을 하고 나와 작은 오빠가 결혼을 하는 줄 알았다. 나는 큰 오빠를 좋아하는데 얄궂은 운명은 나의 사랑을 응원해주지 않았고, 이 사실은 나에게 인생 최초, 최고의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때가 대략 다섯 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느 날 이 절망을 안고 다락에서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게 울다가 엄마에게 발견이 되었다. 어린것이 왜 이러고 있나 놀란 엄마에게 “언니는 좋겠다. 큰오빠랑 결혼하고~ 나는 큰오빠랑 결혼하고 싶은데~~!”했다가 온 집안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나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수잔 '담당 언니는 영화의 수잔 그대로이다. 책을 좋아하고 가족들에게는 상냥하고 특히 막내인 나에게는 엄마와 같이 따뜻한 언니였다. 밤에 잠을 자다가 화장실 가기가 무서워 언니를 깨우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비몽사몽 정신을 못 차리는 중에도 한 번도 짜증 내지 않고 내가 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려 준 착한 언니였다. 그래서 내 첫사랑 큰 오빠랑 결혼할 사이(?)지만 언니를 질투하거나 미워한 적은 없다. 언니는 매일 나의 생존과 직결된 존재였으니까..(거의 매일 밤 나는 화장실을 가야 했기 때문에...)





그러나 문제는 나의 운명의 결혼 상대, '에드워드'담당의 작은 오빠였다.

작은 오빠는 영화의 초반에 사사건건 형과 부딪히며 사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에드워드와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다. 작은 오빠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울리긴 했지만, 조금 장난이 심할 뿐 결코 사악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무지하게 나를 귀찮게 한다는 것이다. 나름 동생이 좋아서 그런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럼 큰 오빠처럼 다정다감하게 대할 것이지 꼭 나의 약점을 건드려서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집요하게 놀리는 거다. 주로 말꼬리를 잡고 따라 하거나 내가 하는 말에 반대로 말하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수법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큰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발끈하니 더 재미가 있어서 나를 그렇게 놀려댄 것 같다. 허구한 날 이러고 사는 작은 오빠와 결혼이라니... 어린 마음에 앞날을 생각하면 꽤나 심란했음에 틀림이 없다.






매일 놀리고 울리고...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어느 날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었나 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으리라 복수를 결심한 날이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경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어느 명절날 온 가족이 남자팀, 여자팀으로 나눠서 윷놀이를 했고, 결과적으로 우리 여자팀이 이겼는데, 무슨 게임을 하든 절대로 지고는 못 사는 작은 오빠가 유일하게 화풀이할 수 있는 상대,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일이 발단이 되었을 것이다. 우승상금으로 받은 천 원짜리 한 장을 가로채서 숨기고 심술을 부리는 작은 오빠가 얼마나 얄미운지 나도 발악을 하면서 울었던 것 같다. 결국은 언제나 막내 편인 큰 오빠가 작은 오빠를 응징하고 내 돈을 찾아 주었지만 그런다고 상할 대로 상한 내 마음이 쉽게 풀어질 사태는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복수는 작은 오빠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었다. 누가 보든지 아, 이 집 작은 아들이 참 나쁜 아이구나 알도록, 그래서 나의 억울함을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기 위해 나는 지난 명절에 찍은 가족사진을 찾았다. 그리고 사진 속에서 맨 가운데 앉아 웃고 있는 모양이 더 얄밉고 짜증 나는 작은 오빠의 가슴팍에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유성펜으로 시원하게 "못됫음"이라고 썼다!



못됫음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복수,

반질반질한 사진에 '못됫음'이라고 쓸 때 얼마나 짜릿했을까. 지금 봐도 막 신난다.

그렇지만 나의 발칙한 복수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사진을 보면서 정작 가족들은 작은 오빠의 악행보다 막내의 깜찍함에만 주목하는 것 같았고 우리 가족의 유일한 가족사진에 오점을 남긴 일임에도 허허허 웃으시며 아버지가 이 사진을 가족 앨범에 고이 간직하신 것을 볼 때, 비록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으나 몇십 년이 지나도 온 가족의 웃음과 함께 회자되는 추억거리 하나는 확실히 챙긴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몇 주 전, 엄마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우리 4남매 가족들이 모두 경주로 여행을 떠났다. 오랜만에 만나면 옛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어린 나의 '결혼 딜레마 스토리'와 '못됫음 스토리'가 등장했고 나는 다시 그 옛날 어린 막내로 돌아가 원 없이 하소연하고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서울 출장 때문에 남편이 경주에서 막바로 서울로 가야 하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방향이 같은 작은 오빠의 차를 얻어 타고 와야 했다. 나와 그리고 함께 갔던 우리 큰 딸을 흔쾌히 태워준다는 작은 오빠에게


"오빠, 이제 앞에다가 '안'자 붙여줄게요, '안 못됫음'으로.."

40년 만의 사면인가..


"그래, 나 원래 안 못됐다!"


맞다. 사실 작은 오빠는 원래 나에게 '안 못된 사람'이다. 오빠가 그렇게 나를 놀려대도 나는 오빠가 나를 정말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 챙겨준 것도 많다. 대학진학으로 집을 떠난 뒤에는 부모님 곁에 혼자 남은 나에게 꼬박꼬박 편지 보내주고, 용돈도 주고, 방학이라 집에 오는 날엔 밤새워 이야기도 나눠주고, 좋은 책을 고르고 읽는 법도 가르쳐 준 참 다정하고 재미있는 오빠였다. 사실은 나도 오빠가 참 좋았다.


나니아 연대기의 에드워드도 성장을 위한 진통을 통과하면서 결국은 누구보다도 루시를 믿어주고 든든하게 조력해 주는 오빠가 되었다. 지금 작은 오빠가 나에게 가장 그런 사람이다.

항상 말없이 나를 지지해 주는 '안 못된' 우리 오빠,

이제는 나이도 먹고, 사는 것이 때때로 버거워 보이기도 하는 우리 오빠...

필요하다면 한번씩 예전처럼 나에게 심통을 좀 부려도 좋으니 나는 작은 오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오빠 #복수 #나니아연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