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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기쁨 Mar 25. 2023

아버지의 나를 위한 하루

말썽장이들을 혼쭐내시는 아버지의 방법


초등학교, 그때 말로는 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나는 올려 묶어도 끄트머리가 엉덩이까지 치렁거릴 정도로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엄마가 빗으로 빗겨 눈꼬리가 치켜 올라갈 정도로 단단히 올려 묶은 다음,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세 갈래로 나누어 총총 땋아주셨다. 그리고 고무줄로 묶은 위아래 두 군데 마디에 유행하던 동그란 방울 머리 장식으로 마무리해 주시면 등교 준비가 끝이 났다. 학교 가는 동안 내 걸음걸이를 따라 뒤통수에서 달랑거리는 땋은 머리의 경쾌한 춤사위는 나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우리 엄마가 아침마다 정성스레 빗겨주시는 내 머리..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게 만드는 야무지게 땋은 머리인데...

불행하게도 내 땋은 머리는 우리 반에서 제일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들에게 그만 표적이 되고 말았다.


우리 반에서 제일 짓궂은 두 남자아이는 바로 내 뒤에 앉았다. 매주마다 분단을 바꿔도 이 아이들은 그대로 수평 이동을 하는 관계로 내 뒷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 골탕 먹일 거리를 찾아 무료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나 하는 것에만 관심 있는 녀석들에게 바로 코 앞에 앉은 나의 긴 머리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만 보이면 내 머리를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거다. 내가 화를 내고 울어도, 내 짝지였던 반장이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간혹 선생님께 들켜서 혼쭐이 나도 그때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아이들이 무지하게 악하다거나 나쁜 아이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좀 장난이 심하고 한 시도 장난을 안 치면 안 되는 그런 아이들이었을 뿐이지만, 머리를 잡아당길 때의 그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혹스러웠고, 언제 기습적으로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뒤통수에 온통 정신이 집중된 채 학교 생활을 하기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학교 생활을 더 이상 참기 어려워진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 앞에서 내 뒤에 앉은 두 녀석들 때문에 학교에 가기가 싫다며 심하게 울며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반응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잠잠히 들으시던 우리 아버지... 단 한 번도 누구 앞에서도 흥분하시는 일이 없으신 점잖으신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불 같이 역정을 내셨다.


"내 이 녀석들, 가만 놔두나 봐라. 내일 아버지가 학교에 가서 혼쭐을 내줄게.!"


처음 보는 아버지의 격분한 모습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정말 우리 아버지가 맞는지.. 어린 나의 눈에도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고 놀랍기만 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아버지를 바라보는 동안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어지러이 뒹굴거렸다.


‘우와~ 내일 아버지가 학교에 오신다고? 일이 너무 커지는거 아니야?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하는 생각과

‘설마... 저러다 마시겠지, 그냥 하시는 소리지 우리 아버지가...?’ 하는 또 다른 생각까지..


결국, 나의 두 번째 예상대로 다음 날, 아버지는 학교 근처에도 나타나지 않으셨고, 나는 그날도 여지없이 녀석들에게 머리채 공격을 당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흥분은 하셨지만 끝내 불발탄처럼 피식 사라진 아버지의 호언장담을 약간 원망하면서…





그날 저녁, 학교에는 오시지 않았던 아버지가 웬 꾸러미 하나를 들고 퇴근을 하셨다.

그 속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핫템, 샤프펜슬이 여섯 자루가 들어있었다.

당시는 샤프펜슬이 귀할 때였는데, 특별히 몸체가 아주 얇고 짧은 모양의 샤프펜슬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우리 4남매를 불러서 하나씩 나누어 주셨고, 갑작스러운 선물에 우리 남매들은 , 모두 날아갈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우리 4남매가 다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도 두 자루가 남았다. 저건 누구 거지? 궁금했지만 그건 누구 거예요 하고 아버지께 여쭤봤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등교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그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작은 선물 상자 두 개와 편지 한 장을 건네셨다.


"이거 너 괴롭히는 그 녀석들에게 줘라."


보아하니 어제의 그 샤프펜슬인 것 같았다. 오호라~ 그 남은 두 개가 이 녀석들 거였구나.

그런데 아버지는 딸을 괴롭히는 그 '고약한‘ 아이들에게 왜 이렇게나 귀한 선물을 주시는 거지?

그리고 편지는 또 뭐람? 무슨 말을 쓰신 걸까...

도저히 내 눈으로 확인을 하지 않고는 녀석들에게 그냥 줄 수가 없었다.

학교로 가는 길에 아버지의 편지를 꺼내 읽어 보았다.

일일이 자세한 내용은 기억할 수 없으나 아직도 마음에 남은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너희들이 우리 딸의 좋은 친구라고 들었다. 우리 딸에게 잘해줘서 참 고맙구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정말로 남자다운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남자는 자기보다 약한 여자(그때가 70년대였음을 이해하고 읽어 주길..)들을 괴롭히지 않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란다. 지금처럼 우리 딸과 좋은 친구로 지내면 아저씨가 다음 크리스마스 때에도 멋진 선물을 보내주마."


녀석들이 나에게 좋은 친구라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만, 나는 그냥 아버지의 편지와 방법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어제 잠잠하셨던 우리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의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학교에 가는 길에 친구들에게도 편지를 보여주고, 학교에 도착해서는 그냥 녀석들에게 줘버리기엔 아까운 마음에 선생님께도 보여드렸다.

편지를 보신 선생님께서  "아버지가 참 좋으시구나, 이 편지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줘도 될까?"라고 하시기에 나도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선생님께 편지와 선물을 드렸다.


수업이 시작되고 교탁 앞에 서신 선생님은 반 아이들이 다 듣는 데서 아버지의 편지를 꺼내 읽어 주셨다.

편지를 읽는 동안 모든 사정을 다 아는 아이들은 "에~ 아닌데~"하면서 웃음바다가 되고

두 녀석은 머리가 땅바닥을 뚫고 들어갈 지경이 되도록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안해 했다. 알고 보면 녀석들도 순진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편지를 다 읽으신 선생님은 두 아이에게 하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선물 증정식을 거행하시면서 좋은 친구가 되라고 두 아이를 격려해 주셨다.


그날 하루 종일 녀석들은 이제 내 머리를 잡아당기기는커녕,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숙이면서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간혹 뒷자리에서 샤프펜슬을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그럼에도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안심이 되면서 처음으로  뒤통수 걱정 없는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대 성공이다. 이제 나에게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는 희열에 들떴지만...

우리 아버지의 작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약간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는데,

다음날부터 두 녀석이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고 나의 보디가드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얘네 아버지가 우리한테 잘 부탁한다고 했단 말이야. 우리 보고 보호해 주라고 하셨잖아~"


아이고야... 혹 떼려 다 혹을 붙인 꼴이 되고야 말았다.

녀석들은 내 옆에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가드를 쳤고, 하교시간에 나와 늘 같이 가던 친구들 마저 얼씬도 못하게 하고선 내 바로 옆에서 밀착경호를 한답시고 책가방을 들어주겠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을 지켜주겠다 하는 바람에 나와 친구들은 집에 갈 때마다 녀석들을 따돌리려고 줄행랑을 쳐야만 했다.

어떻게 그렇게 일일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우리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열심을 내는지... 아마도 크리스마스 때 더 좋은 선물을 주신다는 말에 흥분한 것  같긴 하지만, 나에겐 종목이 바뀌었을 뿐 녀석들로 인한 학교 생활의 고단함은 가실 줄을 모르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 덕분에 나에게 뜻하지 않은 사설 보디가드(?)도 생기고.. 그런대로 즐거운 3학년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간혹, 내가 실망한 그날...

어떻게 막내딸을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셨을 아버지의 하루를 그려 볼 때가 있다.

내 아이를 도와줘야 마땅하지만, 남의 집 아이들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서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심 끝에 문방구를 들러 샤프펜슬을 구입하시고, 사무실로 돌아오셔서 만년필을 꾹꾹 눌러가며 제발 이 편지가 녀석들의 마음을 바꿔놓길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셨을 아버지의 그 하루 말이다.


나의 눈물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시고, 나를 위해 수고를 마다치 않으시고 기꺼이 보내신 우리 아버지의 그 하루, 나를 위한 우리 아버지의 하루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날의 아버지는 나에게는 정말 든든한 아버지이셨고,
무지막지한 장난꾸러기들에게는 진지한 어른이셨다.



초등1학년 어린 나와 출근하시는 아버지... 그날 아버지가 내 손에 쥐어주신 건 무엇이었을까?



#아버지 #어른 #샤프펜슬 #땋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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