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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ne ryu Nov 22. 2022

행복의 관점에서 본 독일 문학

코찔찔이 독문학도 시절 서평들을 올려봐요. 대단한 통찰력은 없고 순수함은 있어요.


  모든 문제는 그 끝에서 결국 ‘인간은 왜 사는 가’라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한 평생을 살아간다. 누가 인생을 살아가라고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닐뿐더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의지로 삶을 멈출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각자가 저마다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 이유들은 모두 우리의 행복과 관련 있다. 크게 보면 결국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명확한 실체가 없고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각자가 어떻게 정의 내리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담는 것을 본질로 하는 문학 작품 속에서 인생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이 어떻게 그려지고 작품 속 인물들이 정의 내리고 추구하는 행복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현자 나탄 

  나탄은 현명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어떠한 어리석은 편견이나 아집에 사로잡혀있지 않고 올바른 사리분별을 할 줄 알며 타인에게 관대한 인물이다. 불행한 사람의 특징은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인종과 종교의 차이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나탄은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자식들을 잃었는데도 넓은 마음으로 기독교인을 이해한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당한 것이 있으면 나쁜 마음을 갖기 마련인데 나탄은 그 나쁜 마음까지 초월하였다. 반지비유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민족과 종교에는 어떠한 우월성이 없으며 모두가 동등하다고 바라본다. 나탄의 행복의 기준은 조화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그것에 행복의 가치를 둠으로 인해서 갈등을 풀어낸다. 

 

이피게니에 

  모든 사람은 갈등을 겪으면 괴로워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갈등의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갈등을 어찌하지 못하고 불행 속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피게니에처럼 현명하게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친동생이 잡혀서 위험에 처한 곤란한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해결책을 제시하여 행복을 찾게 된다. 

그녀는 자기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행복을 주었다. 오레스트와 필라데스는 목숨을 구했고 토아스 왕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행복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기적인 사람일 경우 자신의 목숨 부지에만 신경 썼을 테지만 자신의 행복 범주 안에 다른 이의 행복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에 동생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라고 여겼다. 즉, 이피게니에는 이타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꾀가 아닌 정직함을 무기로 토아스 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결국 토아스 왕의 행복한 작별인사까지 받으며 무사히 타우리스를 떠날 수 있게 된다. 

  현대인들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자기 한 몸 건사하기 바쁘며 곳곳에서 갈등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세우려 애쓰는 이 시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하며 자신의 행복의 잣대를 ‘나’라는 좁은 범위에 한정시키지 않고 타인의 행복까지 진정으로 생각하는 이타적인 모습이 지금 우리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행복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미햐엘 콜하스 

  미햐엘 콜하스는 선량하고 정직할 뿐 아니라 정의로운 사나이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의 기준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강조되듯 정의의 실천이다. 반대로 말하면 정의가 붕괴되면 그의 행복도 동시에 훼손된다. 그가 전쟁까지 선포하며 요구했던 것은 돈이나 명예, 영웅심이 아니라 오직 정의 실현이었다. 그는 우리가 다룬 작품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행복 추구를 하는 사람이다. 가만히 앉아서 말로만 정의 실현을 외치다가 세상은 불공평하다며 불행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하여 자신의 행복을 이끌어낸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전 재산까지 처분해가며 정의를 복구하려는 것이 융통성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그에게 있어 정의, 더 나아가 행복이 중요했고 그에겐 그것을 이끌어 낼 실천력이 있었던 것이다. 수동적으로 누가 행복을 떠먹여주기를 바라며 사는 게 불행하다고 푸념하는 이들에게 직접 행복을 일구어내는 그의 모습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또한 행복한가 그렇지 못한가는 결국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떠올리게 해준다. 게다가 그의 행복 추구 역시 이피게니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까지 바라보는 이타성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눈여겨볼 점이다.


에피브리스트 


  작품 에피브리스트에서는 에피브리스트와 인슈테텐가 추구하는 행복을 각각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에피는 천진함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그녀는 인슈테텐에 비해서 사회가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행복을 찾는다. 물론 그녀도 인슈테텐의 높은 지위 때문에 결혼을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허영심과 과시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의 요구보다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 원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고 그에 기반한 행복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람파스와의 외도도 다른 사람들에겐 고통을 주지만 그녀의 행복 세계 안에서는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귀족 부인들과의 모임과 같이 형식적인 것에선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사회의 시선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였다는 점에 좀 더 주체적인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인슈테텐은 사회의 규율을 중시하고 매사에 칼날 같은 성격이다. 그는 얼마나 행복한가의 기준을 사회에서 얼마나 명망이 높으며 존경을 받는가에 둔다. 행복을 사회 속에서 자신의 높은 지위와 평판에서 찾는 것이다.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가치에는 소홀하게 되는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에피의 외도를 뒤늦게 알고 불타는 복수심이 아니라 사회의 시선과 규율을 때문에 크람파스를 처단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면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의 행복은 자신이 아닌 사회 속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응징을 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슈테텐의 행복은 에피의 행복에 비해 수동적이며 타인을 자신보다 중요시 할 위험이 있다. 

둘 중 누구의 행복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둘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한 에피는 외도라는 이기적인 행동을 했고 사회의 요구에 충실한 인슈테텐은 에피를 외도로 내몰았고 내치기까지 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는 행복의 기준을 자신과 사회의 요구 모두에 균형 있게 두어야 함을 선사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행복에 대한 정의가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셴바흐는 본래 규율과 관습을 중시하는 근면하고 도덕적인 작가다. 성격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는 절제 속에 자신을 가두며 이성적인 생활 속에서 그러한 주도면밀한 특징을 담은 작품들을 쓰는 것을 이상적인 행복으로 생각했고 세상으로부터 명성을 얻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산책 중 우연히 만난 이국적인 남자를 계기로 그의 행복 세계는 흔들리게 되었다.

 자신의 행복 세계에 권태를 느끼고 결국 베니스로의 요양 겸 여행에서 만난 소년 ‘타치우’로 인해 그가 추구하는 행복은 전복된다. 타치우의 자연적인 생명력과 완벽한 아름다움은 그를 디오니소스적 행복세계로 이끌었다. 오랜 절제로 해소되지 않은 충동성은 누적되어 결국 베니스라는 이국적이고 비일상적인 곳에서 터지게 된다. 그는 그 소년에게 사랑 혹은 동경에 빠지게 된다. 타치우의 절대적 미는 그의 작품의 영감이 되는 뮤즈가 되며 그의 작품 관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 정형화된 것에서 벗어나서 디오니소스적인 퇴폐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충동에 휩싸인 것 속에서 행복을 찾는 변화가 일어난다. 

베니스에 전염병이 도는데도 불구하고 타치우에게 매료되어 미를 찬미하는데 몰두하며 감정적인 충동에 충실하여 베니스에서 떠나지 않는다.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셴바흐의 경우에는 행복하기 위해서 죽는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생활과 작품을 통해 행복을 얻던 그는 충동과 퇴폐, 도취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고 결국엔 그 행복의 추구의 결말은 죽음이 된다. 그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절대미의 위대함을 깨달은 예술가로서 바라본다면 그의 죽음은 결코 비극적이지도 헛되지도 않다. 오히려 타치우를 떠나 무의미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 이상의 행복을 얻었으니 말이다. 아셴바흐의 행복 추구 모습은 행복은 삶과 죽음의 영역을 초월하여 죽음까지도 아우른다는 것을 보여주어 행복의 범위는 매우 광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나’는 동물인지 사람인지 명확히 드러나있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외부로부터 단절된 채 본인의의지로 굴 속에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 

  나의 굴의 멋진 점은 뭐니뭐니 해도 그 정적이다. (중략) 거기서 나는 평화의 단잠을, 채워진 욕구의 그리고 자기 집을 소유한다는 도달된 목표의 단잠을 잔다. 

  이 부분에서 ‘나’가 자신만의 공간인 굴을 건축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굴 속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평화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자신이 일구어낸 것에 뿌듯해하기 위해 굴을 만든 뒤 그 속에 칩거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나’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은 정신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행복 모두를 포함한다. 정적 속에서 고요한 평화를 즐기면서 마음의 안정을 갖는 것은 정신적인 만족을 찾는다. 동시에 자신의 이마로 땅을 다져가면서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낸, 외부의 위험에서부터 자신을 어느 정도 보호해줄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은 물질적 행복의 추구다. ‘나’는 계속해서 자신이 굴의 주인임을 명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장품에 생계용 양식 이상의 의미를 두고 쌓아놓아 그것에서 또한 소유의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또 특이한 점은 정신적 행복이 물질적 행복 추구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나의 굴이 없다면 ‘나’가 정신적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정적 또한 갖지 못하기 때문에 외면적 행복과 내면적 행복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행복 추구는 불완전하다. 언젠가부터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의해서 생겨나는 불안감과 자꾸 눈에 보이는 굴의 허점들에 그의 행복은 크게 흔들리고 오히려 불행의 길로 가게 된다. ‘나’는 과도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세상에 완벽하고 영구적으로 안정적인 것은 없음에도 ‘나’는 그러한 불가능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완벽에 다다르지 못하는 자신의 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심적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행복의 기준을 과도히 높은 곳에 둔다면 결국 그것은 자신을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Sonett 68 –플라텐 

  이 소네트는 위에서 다룬 작품들과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행복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코 행복은 오지 않는것
  우리가 소망하여 모험할 뿐."

행복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든 관계없이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바라보고 있다. 이는 근거 없는 회의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번민과 고민 속에 인생을 겪을 만큼 겪은 인생의 늘그막에 서있는 이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에게 행복이 결코 오지 않는 다는 것은 이 보고서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제외시킬까 고민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시각도 배제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다루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에 행복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으니 너희는 그렇게 불행하게 평생 살아라.’가 아니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행복을 너무 기대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집착하는 마음을 비우고 초연한 태도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브레히트

  이 시에서는 화자가 행복으로 느끼는 것과 불행으로 느끼는 것이 분명히 대비되고 있다. 

해협의 녹색 보트들과 유쾌한 돛, 아가씨들의 따뜻한 가슴, 꽃이 피어내고 있는 사과나무 이러한 것들은 행복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과 함께하는 인생에서 우리는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할 때 이런 아름답고 희망차고 밝은 대상을 노래하는 서정시를 쓸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행복을 노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망, 허리가 구부정한 소작농의 처, 기형으로 자란 나무, 독재자의 연설과 같은 것들만 눈에 보이는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행복은 찾을 수 없다. 일상 속의 긍정적인 대상들을 노래하는 것을 행복으로 삼고 있지만 그 행복은 현실에 의해서 가로막혀 있기에 불행만이 남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상징하는 시어들이 쓰였지만 진정으로 행복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라 대비해서 참담한 현실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가 남겨주는 것이 불행에 그치는 것인가 하면 그것은 시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 시를 쓰는 행위 자체로 그러한 현실을 규탄하면서 일종의 행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행복은 우리 내면 안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와 환경에 의해서 행복이 박탈당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Die Soneete an Orpheus  Zweiter Teil – 릴케

  이 소네트 속에서 우리는 행복뿐 아니라 긍정적인 시어 조차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소네트는 겨울, 작별, 죽음 등의 시어로 일관되어 있음에도 이 시에서 우리는 행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인생에선 행복만 있을 수 없다. 회자정리,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다는 것이 인생의 순리다. 그러한 이별을 피할 수 없으니 수용하는데 있어서 관조적이고 초월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의 불행의 정도는 줄어들 것이다. 불행과 행복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행복이 늘면 불행이 줄고, 불행이 늘면 행복이 준다. 불행한 사건 자체를 바꿀 수 없다면 그 사건이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또한 개인에 집착하지 않고 넓게 보아 우리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그제서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혹은 시 속에서 화자가 무엇을 행복이라고 바라보는가에 대해서와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행복은 행복이라는 한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광대하고 막연하며 개인적 성향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에 행복의 정의는 하늘의 별만큼 많게 정의될 수 있다. 이를 통해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 행복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심지어 그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에 대해서까지 생각할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행복한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문학 작품 읽기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현자나탄 - 레싱

이피게니에 - 볼프강 괴테

미햐엘 콜하스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에피브리스트 - 테오도르 폰타네

베니스에서의 죽음 - 토마스 만 

굴 - 프란츠 카프카 

Sonnet 8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브레히트

Die Sonette an Orpheus Zweiter Teil - 릴케



2022년 덧붙이는 말:

  학교 가는 길에 문득 '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살지!' 라는 깨달음에 썼던 6쪽짜리 레포트. 당시엔 여러 문학작품을 꿰뚫는 진리를 찾은 듯했는데, 결국엔 행복은 있기도 없기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정답은 없다는 얘기를 길게 풀어냈을 뿐.
   나에게 행복은 '새로운 경험'이었다면 독일 다년차 생활을 하며 '소소함'과 '안정감'으로 바뀌었다. 나의 안정적인 루틴 속에 찾는 작은 행복들. 그치만 이 행복의 정의는 이리저리 바뀔 것을 이미 안다. 

  보고 있는 드라마 주인공에 따라서도 바뀐다. 작품을 볼 때 작중인물의 감정선과 가치관에에 공감을 쉽게 한다. 최근 김남주 주연의 '미스티'와 유미의 세포들2를 연달아 봤다. 미스티를 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거머쥐며 행복해하는 '혜란'이 멋있어 보였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러다 뒤이어 '유미의 세포들' 속 소소함 속에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닮은 유미를 보며 같이 행복을 느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공감하며 너무 재밌게 봤는데, 선영이는 속으로 뭔 생각을 저리 많이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소름돋게도 유미는 독문과 전공에 32살로 성격도 나와 비슷하다. 운명의 데스티니.)
  이상 이렇게 혜란과 유미를 동시에 꿈꾸는, 32살에도 자아형성 중인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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