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이 세상의 모든 소음을 내리누르는 아침, 여느 때처럼 영어수업은 문을 열었다. 다들 옷깃을 여미면서 추위를 털어내고 들어오는 모습에 이런 궂은 날씨에도 늘 참석해 주시는 회원분들을 보면 훈훈해진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긴 외투자락과 캐시미어 머플러를 두르고 중절모를 쓰신 신사분이 우아하게 걸어 들어오셨다.
"청강 들어오셨나요?"
"네."
필요한 부분을 copy 해서 드리며 간단히 영어수업 방식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다.
"저희는 영어회화라 주로 말하기 위주로 수업이 이루어질 거예요. 듣기만 하는 수업이 아니고 회원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셔야 해요. 일단 오늘 한번 들어보시고 레벨이 맞는지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이렇게 이어진 B님과의 인연은 삼 년 정도 이어졌다. 그동안 암 수술도 받으시고 X대학에서 논문도 하나 쓰셨다. 황송하게도 그 귀한 논문을 받아버렸다. 극구 사양했는데도 앞 속지에 친필로 긴 글을 쓰시고 싸인까지 해서 주셨다. 진한 감색 하드커버에는 논문주제가 금빛으로 자랑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실버색의 머리카락과 금박의 글씨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엔 돈 많은 사업가가 공부에 한이 맺혀서 논문까지 쓰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B님은 은퇴한 문예창작과 교수님이셨다.
난 한참 동안 B님에게 애인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항상 '내 여자친구'가 라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여자친구'는 와이프를 지칭한 것이었다. 하! 낭만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커피를 마시자고 하셨다. 무슨 좋은 소식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무슨 좋은 소식 있으신가 봐요."
"아, 제가 이제 호주로 들어가는 데 이번에 가면 한국에 다시 나오기는 쉽지 않을 거 같아서요. 작별인사 드리려고요."
"네? 갑자기 호주엘 가신다고요?"
아이고! 알고 보니 B님은 호주시민이었다. 그동안 호주시민이면서 영어를 못하기에 창피해서 굳이 말씀 안 하셨다고 한다. 이제는 영어를 꽤 잘할 줄 알게 되어서 호주에 가서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고맙다고 하신다. 전혀 예상도 못했는데... 그것도 여태 모르고 있었나 하는 생각과 말씀 안 하시고 잘도 참으셨단 생각에 너털웃음이 절로 났다.
골드코스트에 수영장 딸린 집이 있으시다고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하시면서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시집을 선물하셨다. 책장에 꽂아놓은 짙은 파란색의 아름다운 책을 볼 때마다 B님 추억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제 유창하신 영어로 이웃들과 사귀어 같이 민남도 가지시고 여자친구인 와이프와 골드 코스트 해안가도 여유롭게 거니실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입이 노란 스마일 스티커같이 된다.
아무래도 S 문화센터 회원분들과 현지 영어실습하러 호주로 가야겠다. 공부 핑계 삼아 B님 집으로 마구 쳐들어가고 싶다. 놀람과 반가움으로 활짝 웃으며 맞아주실 우리의 멋진 신사 B님~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