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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 한 모금

시 한 모금

18. 그냥 걸었어

by 조유상


꾸밀 필요 없어

숲이 그런 걸


덮을 필요 없어

숲도 그런 걸


벌거벗을 때 되면 스스로 잎을 떨구고

차오를 때 되면 저절로 잎을 내밀어


곁의 나무 다가와 기대어 올 때

마다 않고 살을 부비지

나더라도 어느새

한 몸 이루고야 말아


흙은 끊임없이 생명을 틔워내고

바위조차 이끼에게 몸을 내어주는 숲


이끼가 속살대며 바위를 덮어주고

바위는 이끼에 슬며시 머리 기대는 곳


왕성한 고사리 손을 펼치면

초록 부채 활짝 펼쳐 숲을 부친다


뭐든 답을 알고 있는 만능해결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답이 없는 숲 속

고요히 걷다 보면

자연히 떠오르는

침묵의 소리 하나 반짝인다

그냥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돼


한 친구 앞서 걷고

조용히 뒤따르면

앞 친구 따각따각

뒤의 나 뚜벅뚜벅

발소리 위안삼아

다른 말 필요 없어


숲을 지나가는 시간

나를 통과하는 숲


숲 그늘에 들어서면

나는 시원한 숲그늘 담은 사람이 되고

숲 햇살을 마주하면

나는 반짝이는 햇살 한 줌이 되네


그늘 없는 이 없고

햇살 없는 이 없어


그늘 필요할 때 그늘 조각 잘라 주고

햇살 필요하면 햇살 한 움큼 선물하지


숲을 담은 나

숲을 닮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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