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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 한 모금

시 한 모금

17. 나는 누구?

by 조유상


하루하루 생명줄을 엮는다


똥구멍에서 실을 자아 나는 뚝 아래로 떨어진다

다시 올라 옆으로 엉금엄금 여섯 개의 발로 기어가며

두 발로는 줄에 다른 줄을 엮고 네 발로는 버틴다

줄을 걸고 또 뚝 떨어져 세로 기둥을 세운다


그래, 나는

그대들이 인정하는

실 잣기 예술가


나에 대한 오해 하나,

가만히 버티고 앉아 놀기만 한다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매일 기다리기 위해

매일 실을 새로 잣는 걸


매일의 허기 채우려고

매일 고요히 머무는 걸


그대, 가만히 머물러 봤는가

머물고 지그시 지켜만 본 적 있는가


이리 공들여 지은 실의 함정

수시로 바람에 찢기고

새가 찢어버리고

그대들이 망가뜨려도


처음부터 아무 일 없단 듯

다시 시작한다

나에게 허무란 없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잠시 일하고

길게 머문다

그게 개미와 나의 차이


내가 낳은 실 끝

가느다란 떨림조차

나는 바로 알아차린다


누가 걸렸는지

누가 지나갔는지


내가 가만히 있어도

저 혼자 버둥대다 엉켜버리는 것들

쯧쯧, 나는 그냥 바라본다


잘난 척하던 녀석들

가는 건 한 순간이다

끈적이는 나의 줄

피해 가볼 테면 가보라지


용케 줄을 끊고

달아나는 녀석들

굳이 붙잡지 않는다

나는 기다림의 강태공


힘 좋아 걸린 채 버둥대는 녀석

허우적대며 살려달라 소리친다만

힘 빠진 너에게

재빠르게 다가가 휘리릭 휘리릭

둥글게 둥글게 말아버린다

너는 나의 한 끼려니


너의 숨이 차츰 잦아질 때까지

너의 파닥임이 가뭇해질 때쯤

천천히 다가가

우아한 식사를 하지


배고파도 결코

허겁지겁 먹지 않아


내 식사 시간은

언제 다시

돌아올 지 모를

만찬이려니


오늘도 나는

꾸준함을 무기로 실을 잣고

실 끝에 고요히 머무른다


나는 기다림의 달인

나는 조용한 수도승

나를 흉내낼 자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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