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저 그런 하루
나는? 음, 조용하고 평범하고 고요한 하루였지. 어제 책 읽다 늦게 자는 바람에 늦잠을 잤어.
느지막이 일어나 책을 보다 근력운동과 몸살림운동을 마치고 친구랑 카톡을 주고받았고 아점을 챙겨 먹었지.
밥이야 하루 한 끼 먹으니 한번 해 놓으면 한 4일쯤 가지. 적게 나누어 냉동실에 넣었다가 해동해 먹으니까 일단 꺼내놓았고, 지난주에 도서관 다녀오며 농협서 사다 놓았던 자잘한 송이버섯이며 콩나물 남은 것과 묵은 김치를 꺼냈지. 먼저 묵은 김치 썰어 둔 거에 멸치가루 조금, 참기름 한 수저 넣고 달달 볶다가 물 붓고 콩나물과 버섯 씻어 둔 걸 마저 넣고 반 모 남았던 두부도 썰어 넣고 바글바글 끓였어. 소금간 해서 맞춘 뒤 반 대접 덜고 작은 용기에 담긴 밥을 레인지에 잠시 돌렸지. 집에서 보내준 쌈채가 상하기 직전이라 씻어 성한 것만 샐러드를 하고.
김치콩나물국을 끓이면서 잔멸치 볶음도 집에서 만들어 뒀던 조청 넣고 후다닥 만들었고. 아는 친구가 순창 집에서 따온 단감 몇 알을 줘서 그거 두 조각에 다른 동생이 사준 사과 1/4쪽도 준비해 접시에 담고 파김치와 무솎음 김치 조금씩 담고 멸치볶음이랑 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니까 벌써 오전 11시가 다 되었네. 동네 친구가 전화를 해서 또 잠시 딸과 불편했던 마음을 들었지. 불편한 마음이 밑에 깔려 있는데도 우린 이야기하다 한바탕 웃기도 했으니 다행이야. 친구가 조금은 가벼워졌기를. 조만간 딸과 맺힌 마음 풀리라 믿어. 오래 쌓아두면 숙변처럼 굳는다는 거 알 테니까.
글을 쓰다 함께 근처 오름을 걸을까 하고 다시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날이 우중충하고 추우니 나가기 싫은 모양이야. 그래, 집에서 쉬라 하고는 혼자 늘 걷는 오름 둘레길을 두 바퀴 돌았어. 천천히 걸으며 요 며칠 읽고 있는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와 연결된 숲의 모습을 처음인 양 둘러보기도 했지. 숲은 양파 같아. 늘 까도 까도 매운 양파, 걸어도 걸어도 매력적인 모습이 매일 보이니 놀라워. 사랑할 때의 느낌이랄까? 사람처럼 싫증이 나지도 않고 화가 나는 일도 없어. 지루하지도 않고 역겨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고요하게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고스란히 받아줄 뿐인데, 그 침묵하고 있는 공간 안에 나는 헤엄치듯 자유로워. 고마운 숲 속에서 가끔 나뭇결을 쓰다듬고 어루만지지. 고마워, 고마워하며 다정히 인사하면 아무 말 없지만 지그시 마주보며 웃고 있음을 바람결에 느껴.
오늘은 유독 나무들의 서로 다른 결을 만났지. 어떤 건 매끈하면서 푸른 얼룩곰팡이가 핀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떤 나무는 일정하게 골지고 입체감 있게 긁어 내린 모양도 보았어. 어떤 건 길쭉길쭉하게 들썩이는 외피가 죽죽 아래로 갈라져 있고 또 아래부터 마치 멍게처럼 올톡볼톡 튀어나온 가시도 아닌 것이 조개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기도 하더라. 얼금얼금하게 빗금가 있는 나무도 있고, 같은 나무도 똑같은 게 하나 없어. 나무들의 지문을 보는 거 같았어. 숲은 온통 새로워. 새롭게 그대로 있는 듯 변하고 있어. 내가 매일 같지만 달라지는 것을 나무들도 눈치챘을까? 우린 서로 지극히 간섭하지 않고 적당히 함께 해. 그 적당한 거리에 늘 감사하지.
집에 돌아오니 5시 반이 훌쩍 넘었네. 오전에 끓인 국 조금, 집에서 보내줘서 만들어 두었던 약간 맛이 갈락 말락 한 쑥떡을 몇 개 굽고 견과류를 반 줌 꺼내 저녁으로 먹었어. 너무 충분한 하루였어. 내일 독서모임에 읽고가야 할 책은 반 밖에 못 읽고 갈 테지만 아무렇지 않게 평화로워.
나의 하루 마감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문득 큰아들이 흐느끼며 전화를 했어.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자기네가 입양한 커다란 검정개 '엄지' 산책 겸 우리 집에 쌀을 가지러 갔었다네. 큰아들은 날 닮아 공감이 절실히 필요한 녀석인데 아빠한테 충분한 공감을 받지 못해 화가 많이 났더라구. 엄마인 나한테 아빠 하소연을 늘어놓았지. 그래, 속상할 땐 소리치고 울고 떠들어야 풀리지, 암만. 엄마는 잠자코 기꺼이 굴이 되어 너의 하소연을 끌어안을 수밖에. 며느리가 우울증이라 제가 직장일 하랴 집에 와서 집도 치우고 반찬도 하고 살림하랴 얼마나 힘들겠어. 며느리도 운동하고 살아내려 애쓰고 있지만 일상을 살아낸다는 게, 매 순간 힘든 거 뻔히 잘 알고 있지. 힘들 때마다 힘들다 내색하기도 어렵고 만만한 부모한테나 쏟아내는 거 알아. 한바탕 쏟아내고 났는지 전화기 너머로 울음 끝이 보이네. 마침 쌀을 가지러 갔다가 다투고 와서 동생이 쌀을 들고 걸어왔는가 보다. 나하고 통화하다 '잠깐만' 하고 끊고 나서 얼마 후, 키도 저보다 더 크고 덩치도 더 좋은 든든한 동생한테 안아달라 해서 안겨 잠시 위안을 받았는 모양이야. 다행이다.
식구의 우울증은 곁에 있는 옆지기에게 제일 심하게 전염이 되잖아. 그걸 받아내느라 온몸으로 용을 쓰는 아들이 애처롭고 기특하고 놀라워. 가끔은 엄마 아빠인 우리도 버겁긴 해. 다 들어주고 나니 아들 가슴에 구름 걷히듯 개여가는 게 느껴졌지. 아빠에게 버럭질 한 거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드는 걸 보니 안심이 되네. 동생한테 자기 미안한 마음을 아빠한테 전해달라고 했단다. 나는 살포시 웃으며 그래... 사랑하지만 가끔 우리는 서로 표현하는 게 다를 뿐이야.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지? 맺은 사람이 풀어야지. 나중에라도 네가 직접 말하는 게 좋아. 얼른 들어가서 밥 해 먹어.
다정한 말로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만, 마음은 끊지 못하고 연결되어 나도 모르게 그 부자 사이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있구나.
하루가 무거웠든 가벼웠든 가기는 간다. 서로 다른 결을 가진 나무들이 어우러져 살듯 다른 결을 가진 우리 역시, 다 이해 못 해도, 속속들이 알지 못해도 함께 살아가는구나. 오늘도 애쓴 하루, 자신을 토닥이자.
#싸이 기댈곳 노래
https://youtube.com/watch?v=xMZMwFUscDc&si=yJJfF40OKfPsx5C3
#그저 그런 하루 #기댈 곳이 필요해 #공감 #공감이 최고 #공감이 명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