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군대 얘기 대신
성인 남자들 모여서 흔히 하는 얘기가 군대 얘기다. 나도 남편과 이웃들한테 숱하게 들어왔다. 여자들은? 여자들은, 아니 아이 낳아 본 엄마들은 아기 낳던 얘기 하라면 밑도 끝도 없이 다투듯 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살면서 겪는 고통이 제각각 다 다르지만 애 낳는 고통만큼 낳아본 끼리끼리 공유할 게 풍부한 게 또 있을까?
나도 아슬아슬한 순간을 거치고 드디어 큰아이를 낳게 되었다. 36에 결혼해 첫 아이를 낳게 될 다음 해 11월까지 나는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었다. 종아리에 쥐가 잘 나서 자다가 아악 소릴 지르면 남편이 깨서 문질러주며 '고양이를 한 마리 키워야겠다'며 그 와중에도 웃기는 소릴 했다. 체중도 많이 늘지 않았고 배도 많이 나오지 않아 6개월이 되었을 때도 늘 입고 다니던 낙낙한 기다란 청치마를 입고 출근했었다. 하루는 6개월 때 학교 운동장에서 다른 선생님과 오후에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교무실 유리창이 드르륵 열리며 김** 선생님이 "야, 조유상! 너 지금 제정신이야? 애 가진 산모가 뭐 하는 짓이야?" 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도처에 시어머니 샘들이 계셨다. 재밌게 치고 있는데 뭐지?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 네에에~~~" 주섬주섬 도구를 챙겨 그날로 배드민턴을 끝냈고 자전거 타기도 접었다. 이 고마운 훼방도 다 관심과 사랑이었다.
그 와중에 마이클이라는 캐나다에서 온 덩치 큰 영어 선생님은 내가 임신한 소식을 듣고는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때마다 "샘, 아이한테 안 좋아요. 샘이 아기 날 때까지 저도 커피 안 마실게요. 샘도 마시지 마요." 했다. 그것만은 양보가 안 되어서 "샘, 굿 포미, 굿 포 마이 차일드(나한테 좋으면 애기한테도 좋아요)" 하며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아니, 뭐야 내 남편도 아니면서.... 다정도 병이야. 아기 가지면서 초기엔 잠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오전은 간신히 버텨도 점심만 먹고 나면 잠에 취해 쓰러져버릴 지경이었다. 내 앞에 앉은 자칭 타칭 시어머니인 김*숙 샘은 그런 나를 배려해 "얼른 집에 가서 한숨 자고 와"하셨다. 그 덕에 나는 오 분이면 걸어가는 학교 앞 집에 걸어가 잠깐씩 낮잠을 자고 다시 학교로 가기도 했다.
아이를 낳을 때가 되어서도 샘들은 "우리 다 애들 학교에 업고 다니면서 같이 키웠어. 내가 봐줄 테니까 데리고 다니면서 그냥 다녀"하셨었다. 우리 풀무학교는 그런 학교였다. 봉급은 형편없어도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토닥이며 함께 가는 학교.
게다가 홍성에는 다행히 괜찮은 조산원 원장님이 있었다. 동료교사들이 추천해 준 곳이었다. 아기를 받는 게 때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3D업종이긴 하지만 의식 있고 친절하신 분이어서 믿음직하고 안심이 되었다. 초음파 검사도 자주 하지 않았다. 운동법과 호흡법을 가끔 가서 배우고 오긴 했다.
찬바람이 부는 가을로 들어서자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집은 춥고 엄마는 처음인지라 무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마음이 산란해졌다. 엄마가 미리 끊어서 보낸 애기 기저귀감을 잘라 감침질해 다 삶아 빨아놓고, 애기 포대기며 배냇저고리, 기저귀싸개 양말 등을 준비해 두었다. 목욕시킨 후 궁둥이 뽀송하라 발라줄 향긋한 가루분도 준비해 두었다. 낳을 때가 다가오자 미리 집 안 구석구석을 다 치워놓았다. 11월 27일 저녁부터 산통이 시작되었다. 한 번씩 밀물처럼 회오리쳐오는데 첫애는 낳기 쉽지 않다며 산통이 잦아지면 오라는 조산원 원장님 말씀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산통이 제법 잦아진다 싶어 홍성에 있는 조산원을 찾아갔더니 보시고는 아직 멀었단다. 가서 자고 낼 아침에 오란다. 이슬이 비쳐야 한다고. 이슬이 뭘까요? 자궁집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자궁 안에 있던 양수가 슬슬 빠져나오는 걸 가리켜 이슬이라고 하다니! 너무 시적인 거 아냐. 통증이 오는 사이사이에도 그런 생각이 스쳤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가끔씩 자다 깨다 진통을 겪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안팎을 다 쓸고 닦고 정리하고 빨래를 다 해두고 아침을 차려 먹었다. 다 준비해 놓고 남편과 다시 갔는데 아랫도리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이슬이 비친다는 걸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9시 너머부터 본격적인 진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형광등 불빛을 켜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자연분만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던 터라 검은 자궁집에 있던 아기가 강한 형광등에 노출되는 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자궁문이 드디어 한 1센티쯤 열렸단다. 그 문 너머로 흘러들어가 자리 잡았던 새 생명이다. 열 달 동안 고이고이 자리잡은 채 나와 한몸으로 일상과 감정을 나누다가 머잖아 사람의 꼴을 하고 문을 열고 나올 테지. 두근거리고, 설레고, 아프고를 반복했다. 원장님과 미리 연습해 두었던 호흡법을 하며 산통이 올 때마다 거친 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얼마나 아파야 애기가 나올지 모른다는 거였다. 거친 호흡에 눈앞에 별똥별이 날아다니고 원장님은 내 허리를 문지르고 남편은 내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분만대로 가지 않고 그냥 방에서 낳기로 했다.
생각보다 통증이 길어지니 원장님은 배 안에서 애기가 내 분비물을 먹을 수 있다며 분만촉진제를 놓자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그걸 놓는 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던 터라, 분만촉진제를 놓았지만 진통이 빨라지고 또 빨라졌는데도 아기는 쉽사리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어 한 번 더 촉진제를 맞았다. 그 뒤로 나는 기차화통 최고속도 빠르기로 통증이 몰아닥쳐왔다. 내 바로 윗동서인 구항 형님이 오셨다가 어느 틈에 슬그머니 나가셨다. 나중에 들었는데 거의 쉴 틈 없이 진통하는 걸 보기가 너무 딱해(형님은 7년 만에 인공수정으로 쌍둥이를 가져 제왕절개하셨던 터라) 가버리셨단다. 진통이 오면 보통은 1분을 넘지 않는다는데 나는 3,4분, 5,6분도 진통이 뻐개고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눈 앞에 별 반짝반짝한다는 게 현실이었군. 내 가쁜 호흡을 바라보며 원장님이 너무 아프면 크게 소리를 내도 괜찮다고 하셔서 한 번 소릴 질러봤는데 그게 도무지 멋적고 어색할 뿐이었다. 그냥 하던 대로 호흡을 열심히 따라 하다 어느 순간 머리통이 보인다는 소리가 들렸고 자연스레 힘이 주어질 때 같이 배에 힘을 주라고 해 몸의 리듬을 따랐다. 힘을 잔뜩 주니 얼굴로 피가 쏠리는데 얼굴에 너무 힘 주면 눈 실핏줄이 다 터진다며 호흡에 더 집중하라 하셨다. 고통의 열기를 부릅뜬 눈으로가 아니라 긴숨으로 빼내야 하는 거였다. 이론이 머릿속을 탈출하고 고통만 남는 순간이었다. 고개 빠져나오기까지가 제일 힘들었다. 그러다가 까무러치면 아기 목이 졸릴 수도 있다고 더 힘을 주라는 소릴 들으며 초인적인 힘을 내야했다. 한참 힘을 더 주고 난 뒤 무지륵히 왈칵 나오는 느낌 뒤 나머지는 후루룩이었다. 뭔가 갑자기 허룩한 느낌이 들었다. 아기였다. 피가 더러 묻어 있는 채 탯줄을 남편에게 자르라 했다. 드디어 연결된 선이 잘리고 독립된 한 생명으로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더딘 생명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풍선같이 늘어났던 배가 하루아침에 쑥 들어가진 않았다. 다만 딱딱한 느낌만 좀 없어지고 말랑한 텅빔이 있을 뿐. 태반도 함께 빠져나오고 아이를 거꾸로 안아 올리고 씻겨 포대기에 감싸여 내 배 위에 올려주셨을 때의 감격이란...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 어떤 스펙보다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내가 생명을 잉태하다니! 잉태가 상징이 아니라 바로 말캉한 현실이었다.
이건 기적이야. 얼굴은 빨갛고 머리숱이 날 닮아 많았다. 몸무게는 2.5킬로 밖에 나가지 않아서 내가 받아 안으면서 아이고, 설탕 한 봉지도 안 되네 했다. 태어나느라 용을 쓰고 몸무게가 적다 보니 꼬깃꼬깃 구겨진 듯 온몸에 주름이 많았다. 손은 꼭 쥐었어도 가진 거 한오라기 없는 그런 채로 태어나는 거구나. 그런 천둥벌거숭이 녀석이 내게로, 우리에게로 왔다. 하영이다.
조산원서 미역국밥을 몇 차례 더 먹고 다음날, 아직도 몸이 부풋한 채로 시댁으로 갔다. 처음엔 시댁의 작은 건넌방에 머물렀다. 시댁이나 우리 집이나 여닫이 홑창 문풍지 바른 문으로 되어 있으니 그다지 따뜻하진 않았다. 그 방서 이틀 후 아버님이 안방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두 분은 건넌방으로 가셨다. 아무래도 불을 때면 안방이 더 따끈했으니까.
참 지혜로우신 아버님이긴 했지만 역시 남자가 모르는 건 있었다. 내가 전에 짚으로 둥그미 짜는 걸 배우고 싶다고 한 말을 잊지 않고 계셨던가, 산후조리로 따뜻하게 있어야 할 12월 한겨울인데도 나보고 부엌으로 나오라셨다. 부엌을 입식으로 바꾸긴 했어도 바닥 난방을 거의 안 한 상태인데 거기서 자분자분히 새끼줄을 꼬아 둥그미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게 아닌가. 나는 회문을 꿰맨 곳도 채 아물지 않은 상태라 방석 위에 쪼그리고 올라앉아 네네하고 조금 배우는 체하다가 '아버님, 제가 추워서 다음에 또 배울게요' 하고는 부리나케 안방으로 피신하곤 했다. 속으로 아휴, 아버님도 어쩔 수 없이 남자네... 했다.
어머니께서 찬은 변변찮아도 미역국밥을 해 주셨다. 하루에 꾸역꾸역 4끼나 먹어대던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전화가 따르릉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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