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22. 돌이켜 보니 나도

by 조유상

도련님을 제대시키고 이복시동생들과 남편이 집에 들어섰다.

밝은 햇살을 등지고 들어서는 그들은 어두웠다. 핑 눈물이 도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이 저리 변할 수가. 막내도련님은 몸과 표정이 굳어 있었다.


마음이 병들면 몸이 먼저 굳는 걸 그 순간 알게 되었다.

군복을 입고 부엌에 들어서면서 앉지도 웃지도 않았다.

네, 네, 아닙니다. 네, 괜찮습니다. 그런 단답형의 말 외에 사제 언어란 없었다.


나는 도련님에게 '앉아요', '여긴 집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구요' 하며 그 세계와는 다른 언어를 쓰며 점심을 같이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도련님에게 혹시 약 먹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주머니에서 한 움큼 약을 꺼내 놓았다. 군에서 받아온 우울증 약이었는가 보다. 도련님 이 약을 먹으면 어때요? 물으니 그냥 잠이 온단다. 도련님, 우리, 이 약 버립시다. 이제 집에 왔으니 어려워도 몸을 움직이면서 지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때요? 그러고 약은 그 자리에서 버리기로 했다.


우린 주말마다 차로 5분 거리 시댁엘 갔다. 가서 그저 밥 한 끼 준비해 같이 먹고 오는 거였지만,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으니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함께 따랐다. 가서 밥을 다 준비해 놓고 도련님을 부르고 방마다 찾아보면 아버님이 그러셨듯 똑같이 몸을 콩벌레처럼 동그랗게 말고 어둔 방안에 혼자 앉아 있곤 했다. 시부모님께 여쭤보면 자주 그런다고 했다. 멀쩡하다가도, 어느 때는 밥을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곤 했다. 가슴은 그럴 때마다 철렁 내려앉곤 했다. 차라리 멀리 살기라도 하면 못 본 척할 수도 있으련만... 나에게 그런 면죄부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몸조리하며 시댁에 있을 때 도련님 군대에서 전화가 온 이후로 아버님에겐 덜컥 병이 생겨 버렸다. 도통 밖으로 말씀을, 특히나 나쁜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속병이 안 나면 이상한 거였다.


그해 겨울 방학 내내 주말이면 시댁을 가곤 했는데, 풀무학교에선 개학을 앞두고 나에게 다시 근무하라 했지만 나는 아픈 시아버님과 도련님을 두고 출근할 순 없었다. 내 대신 남편이 잘 아는 동생 *규 씨를 서울서 불러 내렸다. *규 씨 역시 사연이 많은 친구였다. 대학 1학년 때 연애하다 결혼하게 되었는데 아내가 *규 씨 할머니를 죽였다. 그가 없을 때였는데 할머니가 아이를 야단친다고 그랬던가 하면서... 너무 어린 나이였나 보다. 배 안에 둘째를 가진 그의 아내가 감옥에 간 뒤 그는 영등포 같은 교회를 다니던 내 남편(당시는 총각시절)과 함께 살고 있었나 보다. 공부를 그만두려던 걸 남편이 학비를 내주어 끝까지 마치게는 했단다. 공부하랴 알바하랴, 매주 자기 아내 면회 다니며 그는 철부지 첫사랑 뒤치다꺼릴 하며 살았다. 자기 아내를 석방시켜 달라고 탄원서를 수없이 낸 끝에 아내가 교도소에서 나왔는데 아내는 이 친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가차 없이 헤어지자 말했고 둘째를 데리고 떠나버렸단다.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그는 몸이 재고 바지런했다. 내 남편은 결혼 조건(!)으로 그 동생이랑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었기에 나는 언뜻 그를 떠올려 풀무학교에 취직시켜 주게 되었다. 우리가 결혼한 이듬해, 그는 1998년 봄부터 이듬해 일 년 동안 풀무학교에서 일하며 우리 집 근처에 살며 수시로 식구처럼 오갔다.


이 친구가 어느 날 이기지도 못할 만큼 술을 잔뜩 마시고는 마루 끝에 앉아 횡설수설하며 "나는 형수님이 좋아, 난 형수님이 진짜 좋아..." 하다가 툇돌에 다 토하기도 했다. 남편은 술주정이란 일절 없는 사람이고 기분 좋을 정도로 마시고 절대 도가 지나치는 법이 없는 사람인지라 '난 저런 꼴 못 본다'며 내게 조용히 말하고 문밖으로 나가는 통에 내가 다 치우고 그를 재워야 했다. 외로운 사람, 부모가 있다 한들 자기도 할머니 손에 컸는데 자기 하나뿐인 아들도 자기 부모,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키우게 된 대물림이라니. 외로운 사람을 내몰지 못하는 나는 그가 홍동에 잘 적응해 살기를 바랐다.


도련님이 어느 정도 집에서 회복해 가는 과정을 보고 나서 아버님은 병이 들고 나도 모르게 산후우울증에 걸렸었나 보다. 이상하게 그가 출근하는 뒷모습만 봐도 꼴 보기 싫고 짜증이 나는 거였다. '내 마음 나도 모른다, 내 마음 걷잡을 수 없다'가 그때 심정이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이상하게 뭔가 꼬투리를 잡아 그의 미운 구석을 찾아내는 거였다. 그때 나는 그게 산후우울증이란 걸 전혀 몰랐었다. 해야 할 의무만 잔뜩 있고 무게가 감당하기 버거웠나 보다. 아이를 키우면서 바람 쐬러 혼자 다닐 수가 있었나, 오로지 집, 시댁, 다시 집, 돌아서면 밥, 빨래 살림, 병간호... 시댁 식구들에게 표시를 못하고 집에 와서 오로지 남편에게만 쏟아낸 셈이다.


하루는 아침에 밥상을 다 차려놓고 출근하기 전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는가, 그가 갑자기 밥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바로 출근하러 밖으로 나가는 거였다. 나는 깜짝 놀라 뛰어나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내가 짜증을 내더라도 당신은 짜증을 내면 안 되지, 그게 당신과 내가 다른 점인데...'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가며 그를 데리고 들어와 밥을 먹이고 출근시켰지만 그렇게 보내고 난 하루종일이 좋을 리 있었겠는가. 보대끼고 자책하고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그러다 그를 막상 보면 또 울화가 치밀고... 그건 병이었다.


나도 하소연할 데 없으니 그렇게 머릿속에, 가슴속에 분화구가 생겨 시도 때도 없이 활화산으로 터져 올랐다. 엄청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당시 새벽마다 단전호흡하러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하면서 간신히 진정이 되어 갔다. 나 자신의 신체적 변화를 의식하고 있었고 내 체력은 지쳐 있었다.


한 사람의 깊은 질병은 연쇄적으로 가족을 도미노처럼 무너지게 만들었고 거기서 헤어 나오기 힘들 때마다 *규 씨에게 하소연하기도 했었다. 그 단 한 사람이라도 들어주었기에 살 수 있었나 보다.


아마 그 덕이었을까? 나는 며느리의 우울증 증세가 심각해도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라도 곁에서 들어준다면, 그가 살기만 한다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우리에게는 언제 어떻게 시한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태지만 언제든 터질 일은 터지게 마련이고 어쩔 수 없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만 치유될 수 있는 건 '들어주는 귀와 자연뿐이다'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힘은 자연에서 오고, 나는 누군가 힘든 이를 만나면 누군가 내게 그러했듯이, 가만히 곁에 있는 몫을 택할 뿐이다.


































keyword
월, 금 연재
이전 21화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