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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23. 그럴 수 있을까?

by 조유상

언젠가 내가 아버님께 일본으로 징용 끌려가셨던 이야기를 여쭤 본 적이 있었다. 징용 가셔서 힘들진 않으셨는지,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일본인들에 대한 미움은 없으신지...? 아버님은 끌려가서 일은 했지만 미움 그런 건 없다고 하셨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부당함에 대해 예민하게 날 서 있던 나로서는 불의에 울근불근하는데, 아버님에게는 아예 그런 센서가 없으신 걸까? 아님 세월에 미움이나 증오조차 마모되어 모래알처럼 흩어진 걸까? 돌아가신 지금도 시아버님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다.

내겐 아버님 사진이 딱 한 장 남아 있다. 시댁인 개월 집 허름한 대문간 의자에 앉아계신 모습. 흡사 아프리카 어느 먼지 날리는 집 안 같다. 마늘을 꿰달아 놨으니 6월 하순이나 7월 여름날이겠다. 낡아빠진 의자 위에 허름한 여름옷을 입고 앉으신 그분은 말라서 가늘고 긴 몸매에 눈매와 콧날이 예리해 보였다. 콧날 끝이 둥글고 순하게 보이는 내 남편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다.

친시어머니(살아생전에 동네 사람들이 살갑게 드나들었다는 걸로 봐서 어머니 품이 너른 분이었나 보다.)

어머니 닮은 꼴의 아들, 내 남편(아, 풋풋하다)


놀라운 건 자식들마다 증언하길, 아버지한테 야단맞은 기억이 없다는 것. 유일하게 남편이 야단맞은 기억이라고는 딱 한 번이었단다. 중학교 땐데 자기가 바둑에 흠뻑 빠져 있을 때였다고. 아버지가 감기약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약을 사가지고 바로 가지 않고, 중간에 동네 형네 들려 바둑을 두다 저녁 늦게 들어와 아버지께 감기약을 드렸단다. 그때 방 안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약봉투를 보시더니 암말도 않고 바로 돌아 누우시더라고. 자기는 그게 젤 크게 혼난 기억이란다. 내가 아버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 같으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막내 도련님도 그런 말을 했었다. 자기가 숱하게 잘못을 저지르고 성질부리고 했어도 아버지가 단 한 번도 야단을 치신 적이 없었다, 자신은 아버지가 또 그럴 거냐 좀 야단도 치고 하시길 바랐었는데... 하며. 아버님은 그런 분이셨다. 나는 대문간에 다리를 꼬고 앉으신 깡마른 아버님 사진을 볼 때마다 간디를 연상하곤 했다. 그런 아버님도 물론 예외는 있었단다. 남편 큰누님의 기억이다. 지금 시어머님 젊으셨을 때에 의처증이 약간 있었는가 보다. 몇 번 어머님이 그런 걸로 트집을 잡아 아버님께 뭐라 뭐라 하셨는데 시어머니랑 몇 살 차이 없던 큰 형님이 보기에도 얼토당토않은 시비였는가 보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큰소리를 치고 손지검을 하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님이 성인 반열에 들긴 글렀지만, 그 작은 흠이 있어 더 인간적이고 나에게 아버님은 이미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결혼하고 우리 동서들 (큰 동서는 언제나 열외)은 명절 때 나까지 셋이서 모여 아버님 앞에서 자기 신랑들 흉도 보고 까불기도 했는데 아버님은 단 한 마디 야단치거나 가르치는 법이 없으셨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듣고 계실 뿐. 살아보니 그 나이만큼 산다고 다 그런 삶을 사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던 분이셨는데, 제발 말씀 좀 하고 사시지... 가슴속에 꽁꽁 묻어두셨던 이야기들은 얼마나 많았을꼬. 내 남편과 그의 첫째, 둘째 누님, 그리고 막내 아가씨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많이 닮아 전체적으로 둥글고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님을 더 많이 닮았다. 아버님은 첫 아내와 그리 다정히 지내셨다는데 그런 아내가 막내 아가씨를 낳고 돌아가시고 나니 얼마나 황망했을까. 아이들은 일곱이나 되는데 살림할 아내는 없으니 주위에서 사람을 소개했을 테지. 그렇게 잠시 들어왔던 여인 둘은 아이는 많고 가난한 집에 살러 들어왔다 제풀에 지쳐 금세 다 나가 버렸던 모양이다. 결국 지금 어머니만 남으신 거였다. 내가 결혼해 시댁에서 형님들을 만나면 둘째 형님은 '우리 어머님이 사회성이 없으시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었다. 누굴 배려하고 챙기고 챙김 받고 관계 맺는 게 사회성이라면, 어머니는 그런 걸 배울 만한 환경은 아니었던 거 같다.


도련님이 군대에서 돌아와 차츰 예전의 밝은 모습을 찾아갈 즈음 아버님은 덜컥 간암이었다. 무심히 길을 걷다 돌부리에 차인 듯 그렇게. 아버님, 속이 깊다고 하나, 그런 분을? 너무 깊은 속은 자기 안에 담겨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의 아우성에 병을 키우는 거 아닐까? 남에게 적당히 하고 살아야 할 말 총량을 내놓지 못한 게 당신 살에 박혀 결국 썩히고야 말았나 싶지만, 그게 성격인 걸 어쩌랴. 내가 몸조리하며 시댁에 있을 때, 도련님 군대에서 전화가 온 이후로 가뜩이나 적은 아버님 말수가 더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도련님이 돌아오던 겨울 방학 끄트머리였다. 나더러 학교에 다시 출근하라시던 선생님들께 도저히 집안 사정 때문에 안 되겠다 말씀드리고 나서, 봄부터는 아예 시댁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출근하는 주중이면 매일 아침마다 그가 나와 아이를 시댁에 데려다 놓으면 차가 없던 나는 중간에 나올 수도 없으니 그냥 꼼짝없이 시댁에 있을 수밖에. 아이의 재롱을 좀 보면 잠시라도 웃지 않으시려나 어설픈 희망을 안고 그냥 곁에 있곤 했다. 백일도 안 된 아이를 안아보시려냐고 여쭤보면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그 정도로 삶의 의욕과 힘도 빠져 달아나 버린 거였다. 가면 잠시 아버님 어머님 곁에 있다가 아이를 업거나 내려놓고 점심을 준비했다. 잘 드시지 못하니 바로 위 형님이랑 궁리해 발아현미도 만들어 죽을 쒀드리기도 하고 뭐든 조금이라도 드시게 하고 싶었지만 아주 조금씩 밖엔 드시질 못했다. 겨우 연명하는 정도였다.


어느 날, 예전에 아버님이 앞동산에 심어놓으셨다는 장뇌삼을 캐오라 하셔서 도련님이 그걸 캐왔고 그걸 드시면서 식사량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중간에 복수가 차기 시작하면 거의 보름간격으로 가서 복수를 빼고 오기도 했다. 아버님 배가 남산만 해지면 나는 아버님의 빵빵한 배를 만지며 아버님, 언제 막둥이 낳으실 거예요? 하고 농담하면 아버님이 빙그레 웃으며 그러게~ 하셨다. 그런 아버님 손톱발톱 깎아드리는 시간은 그분의 고요를 조용히 맛볼 수 있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른 몸속에 간직한 따뜻한 마음이 몸으로, 온도로, 살로 내 손에 만져졌었다.


도련님도 아버님도 도통 살얼음판이었지만 아이는 그 와중에도 고실고실 커나가고 있었다. 정신줄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도 저기도 돌볼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줄 알고 살았다.


아버님 간암에 좋다고 둘째 아주버님이 어찌어찌 독일서 수입한 겨우살이풀 주사액을 구해왔다. 아버님께 주사를 놓아드렸는데, 그건 막내도련님 몫이었다. 혈관에 놓는 게 아니고 근육주사였는가 보다. 그 덕에 아버님은 병원에서 나오셔서 4년을 더 사셨다. 백일도 안 된 갓난쟁이도 못 안으시던 아버님이 제법 목직해진 다섯 살짜리를 가끔은 안고 업기도 하셨으니까.


매일이었나 며칠에 한 번이었나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그렇게 정기적으로 맞혀드리던 주사를 놓친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아버님이 감기 들어 병원에 가시게 된 이후로였다. 급속도로 면역력이 약해진 아버님은 채 스무날이 못 되어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아버님은 살아계신 보살이자 예수였고 간디였다. 그 깊은 눈 속에 담긴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기대지 않아 투명한 영혼이었다. 한 역사가 가고 우리 안에 그분 삶은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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