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숨죽인 시간
따르릉...
춥고 어둑한 시간 속을 뚫고 울린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낯선 목소리가 얼마 전 입대한 도련님 상관이라며 자신을 알렸다.
얼떨떨한 내게, 관계를 물었다.
도련님이 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냐는 질문 앞에 나는 막막했다.
"모르겠는데요... 저는 들은 적이 없어서... 아마 아닐 텐데요."
혹시 누구 부모님을 바꿔달라기에 건넌방에 계시던 아버님을 불렀다.
아버님은 수화기를 듣고 거의 단답형으로만 답하셨다. 낮은 음성이었고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가 남긴 전화번호를 받아 적어놨고,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막내 동생이 어려서부터 몸이 워낙 약해서 풀무학교 갈 때도 데려다주곤 했단다. 초등학교 때도 그랬는 모양이다. 우울증 증세는 없었다고 했다. 없었는지 세밀하게 관찰하지 못했거나 아예 우울증이라는 말 자체를 모를 수도 있었다. 30년 전 시골이었으니. 남편은 바로 그 주말에 동생이 있는 군대에 면회를 다녀왔다.
군 입대 전, 머리를 빡빡 민 도련님을 보며 속으로 은근 걱정이 되었었다. 부모님 대신 우리 둘이 그를 태우고 훈련소 연병장에 가는 길, 나는 만삭이었다. 나중에 내 아들 보낼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그땐 왜 그리 하염없이 나오던지... 두고 돌아서는 길이 먹먹했다. 저 어려 보이고 마른 체구가 잘 버텨낼까 하며 도련님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는 심정이었다.
남편이 시동생을 보고 온 날, 그는 자는 아기를 옆에 눕혀놓고 결혼하고 두 번째로 눈물을 흘렸다. 처음 흘린 눈물은 막냇동생이 결혼 선물로 사준 작은 도자기 신발 안에 접어 끼워 넣어준 편지를 읽으면서였다. 결혼하고 그가 눈물 흘린 걸 본 건 지금까지 30년 사는 동안 그 딱 두 번, 모두 막냇동생 일로였다. 나를 위해 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면회를 다녀온 그가 어찌나 흐느껴 우는지, 우리는 바스락 소리도 다 들릴 건넌방 부모님이 깰까 봐 둘이 부둥켜안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에서 숨죽여 같이 울었다. 그가 가 보니 동생이 하염없이 공허한 눈동자를 한 채, 다나까 형식의 단답형으로만 말하며 굳어 있었단다. 마치 닭병 걸린 거 같았다고.
며칠 뒤 다시 걸려온 군대에서 상급자나 군 관계 무슨 연줄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없다(있어도 없다는 사람)'고 대답했다. 그는 9형제 아니던가. 당시 서울에 2명, 대천과 인근에 나머지가 살고 있었는데 형제들한테 모두 전화를 걸어 자주 찾아보기를 권하는 거였다. 자신은 거의 매주 다녀오곤 했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이 자주 찾아가 봐야 한다며.
사실, 막내와 그 위 형, 그렇게 둘이는 현재 어머니의 소생이니 배 다른 형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식구들이 이 두 도련님을 눈빛이나 행동으로 이복동생이라 소홀히 취급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더 애틋함이 남달랐다고나 할까. 가진 거 없어도 따뜻함 부자들이었다.
기가 약한 도련님은 집에서 누가 큰소리치며 대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말 그대로 상명 하복해야 하는 군 시스템에서 완전히 기가 눌려 버린 듯했다. 무얼 외워서 발표해야 하는 순간에도 기가 약하다 보니 얼어버려 알던 것도 떠듬거렸고, 자기 소속 부대원들과 함께 단체기합을 받게 되니 더욱 자책하게 되어 어벙해질 수밖에 없었나 보다. 나중에 행동 자체가 멈춰버린 거였다. 결국 병동에 격리.
군에서 전화 온 다음날부터 집안은 더 고요하고 적막해 갔다. 아버님이 어디 계신가... 하고 옆방 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면 불 꺼진 방에 아버님은 마른 몸을 동그랗게 말고 피카소가 펜화로 그린 벌거벗은 할머니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그늘지고 미동 없는 그 모습은 내 숨을 멎게 하곤 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웃음을 피했다. 새끼를 낳은 기쁨이 잦아들었다. 문득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깜짝 놀라게 되고 잔뜩 먹구름 낀 집안에 있는 것만으로 하루가 멀고 길었다.
몸조리를 하는 게 아니라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을 수밖에 없던 날들. 아이를 낳은 집안에서 볼 수 있는 화창함이 된서리 맞은 꼴이었다.
워낙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는 조카들에게 고모나 이모가 아니라, 그냥 친구 같은 존재였었다. 그런 나였기에 내 아이한테 너무 집착하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지금은 '집착하면 좀 어때, 자연스러운 건데' 싶건만, 이현주 목사가 쓴 장자이야기 소책자를 읽으면서, 정작 내 몸을 빌어 난 나의 분신이기도 한 아이에겐 달랐다. 은연중 거리를 두며 잠시 내게 맡겨진 존재라고 자꾸 각인시키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세상에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그렇게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빨고 국밥을 먹으면서도 살금살금,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마침 15대 대통령(김대중 대통령이 됨)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선거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에서(나중에 우리 집 앞이 되고 만)하게 되었는데, 그걸 빌미로 3*7일이 채 못된 12월 18일, 몸조리 20일 만에 우리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 신혼집으로 돌아간 그날, 나는 집안일을 하는 내내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어! 하고 깜짝 놀랐다. 내가 왜 하루 종일 콧노래를??? 하아, 긴 숨을 내쉬며 알아버렸다. 그 이십 일이 나에게 십 년보다 더 깜깜하고 억눌린 시간이었구나. 몸조리가 아니라 몸 졸임이었다.
드디어 아이가 제대로 보였고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두어 달 후, 이십인지 삼십만 원인지를 내고 도련님을 의병제대(依病除隊)시켜 데려오게 되었다.
그것도 돈과 연줄이 필수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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