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생명이 머무는 자리, 아니 불모지
큰 아이가 두 돌이 채 못되던 여름, 전국에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정농회(正農會) 연수를 갔었다. 해마다 여름과 겨울, 농한기에 모여 공부도 하고 만남을 통해 끈끈한 유대를 갖곤 해왔다. 1976년 생겨난 모임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유기농이란 말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할 때였다. 일본에는 애농회(愛農會)가 있다. 그 애농회에 다녀온 농민이 우리나라에도 화학비료와 농약으로부터 땅을 살리고 더 이상 수탈하는 방식이 아니라, 땅이 자연회복력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고자 모여 만든 게 바로 정농회다. 정농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자연환경을 살리고 생태계의 질서를 보전하는 생명농업을 지향한다. 이들이 전국에 흩어져 열심히 농사를 짓다가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모이듯 농한기에 모이는 가족 같은 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처럼 아기를 데리고 오는 가족도 있어, 0대부터 7,80대까지에 걸친 대가족 모임이다 보니 친밀도가 굉장했었다.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끼리 정겨울 수밖에. 나에게는 사람이 보고 싶고 그리워서 가는 모임이기도 했다.
초창기 회원으로는 지금은 제주에 터전을 잡은 오재길 선생, 목소리와 신앙이 우렁우렁한 김준혁 선생, 대구에서 포도농사를 하신 김성순 선생, 오영환 선생 등이 있다. 지금은 사람이 많이 줄고 젊은이들이 빠져나가 아쉽긴 하다.
정농회에서 비롯된 유기농이 운동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옛일이 되고 말았다. 한살림운동과 생명운동에 앞장섰던 장일순 선생 같은 분들 역시 같은 노선의 사회운동가였고 그분의 노고와 열정은 대단했었다.
예전에 유기농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생협에서 생겨날 때 돈벌이가 되는 것 때문에 선택적으로 유기농으로 전환한 이들도 많았지만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본다. 사상에 몸과 마음 다 바쳐 따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만 따를 수도 있으니까. 사실, 정신을 따라 사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길이다. 의식이 깨어 있으려 애쓸수록 지역 사람들에게서 멀어질 각오도 필요했던 까닭이다. 뭘 굳이 저렇게까지 힘들게 하느냐며 손가락질받기 일쑤였다. 마치 비건들이 적당히 고기도 좀 먹고 하지 뭘 저리 까다롭게 구느냐는 식의 눈길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내 식구에게는 농약과 화학비료 안 친 걸 먹이려고 하면서 파는 것은 때깔 좋고 크기 좋아야 팔리기 때문에, 흔히 상품성이 있는 농산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던 걸 안 한다는 건 마음을 새로 먹지 않으면 안 되고, 거스르는 일이어서 고단하다. 단단하게 정신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쓰고 벌레를 죽이고픈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가 훨씬 더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의지의 한국인일런지도 모른다. 아니,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해서 우리 스스로가 편안해지기 위해 유기농을 실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뭔가를 대단히 각성된 상태로 의식화되어 할 수도 있지만, 자기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하는 게 더 길고 오래가지 않을까? 의식화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각지고 다지고 자기를 자꾸 눌러 어느 틀에 담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본능에 거스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몸에 체화되어 나와 분리될 수 없어질 때가 되려면, 어쩜 의식화의 단계를 거쳐야 할 런지도 모르겠다.
유연한 몸을 만들기 위해 늘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며 연습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여간 우리는 그런 상태를 위해 참 많은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기울여 왔다. 그랬는데, 그렇게 잘해왔다 생각했는데, 첫 아이가 아마도 18,9개월 되었을 쯤이었나 보다. 나는 36에 결혼해 첫아이를 37에 건강하게 자연분만으로 출산했던 탄탄했던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몸이 망가지는 건 순식간인가 보다. 첫아이를 낳고 시아버님과 막내 도련님이 아픈 걸 내내 뒷바라지해 가며 몸이 소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참석한 정농회, 그해 정농회 여름연수는 해남 땅끝마을 어느 초등학교에서 하게 되었다.
남편은 그때만 해도 직장을 다닐 때였으니 함께 갈 수 없었다. 나는 막 둘째를 임신해 한 달 반 남짓 되었을 땐데 동네 친구 하나가 자꾸 같이 가자고 조르는 거였다. 나는 몇 번 거절했지만 집요했다. 언니 안 가면 자기도 안 가겠다고 하도 조르는 통에 남편과 상의했는데 안 같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나도 같은 생각이어서 내가 지금 임신 초기임을, 또 큰아이가 어려서 힘들어 안 가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큰애를 봐주겠다며 굳이 또 가자고... 그 친구 집요함에 져서 같이 가게 되었다.
지금은 해남 땅끝마을까지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려 있어 집에서 3시간 반이면 닿는 거리지만 당시로선 대여섯 시간 족히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 길을 대형버스를 타고 큰아이를 달래고 어르며 가는 건 역시 무리였다. 저녁에 도착해 바로 숙소에서 잤으면 달라졌으려나? 그날 밤 우리는 나이 편차는 있지만 한 무리 뜻 맞는 청년들과 함께 거기서 또 진도에 계신 장금실 김종북 선생님 댁을 향했다. 왕복 2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을 또 다녀왔다. 김종북 선생은 풀무에서 교사로 재직한 적도 있고 아내인 장금실 선생은 냉장고 세탁기도 없이 불 때서 밥을 해 드시고 여전히 불기운에 새까맣고 반질해진 찬장을 쓰고 계신, 다시 볼 수 없는 실천적인 삶을 사시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의 소박하지만 고집스러운 삶 이야기는 젊고 의욕과 배움에 불타는 내게 다시없는 모범이 되는 삶이었다. 달빛이 비치면 달빛 아래서 밭일을 하기도 하고 별을 보며 땅을 지키는 이야기는 밤을 지새워도 좋을 아름다운 꿈같은 삶이었다.
먼 길 아이와 피로하고 힘들었지만 그 이야기를 홀려 듣다가 밤 이슥해서야 연수가 있는 초등학교 숙소로 돌아왔다. 방학이라 아이들은 나오지 않고 있어 학교는 조용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아랫도리에서 뭔가 흐르는 느낌이 이상했다. 함께 갔던 내 싱글 친구에게 큰 아이를 맡기고 화장실로 급히 가보았더니, 피였다. 엉? 웬 피? 순간 심장이 함께 덜커덩 떨어졌다. 임시조치로 휴지를 받치고 나왔지만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당시엔 휴대폰도 없고 다른 어른들한테 스스럼없이 말할 만큼 낯이 두껍지도 못하던 나는 그 친구한테만 말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이박 삼일을 지내기가 길었다. 짬짬이 큰아이 천기저귀를 빨아 널기도 했다. 내 아이를 봐주겠다던 친구는 목소리가 엄청 컸고 직선적이었다. 이층 교실에서 강의도 잘 못 듣고 큰아이를 재우려고 누워 다독거리고 있노라면 자기 아이한테 큰소리로 야단쳐가며 소릴 지르는 거였다. 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좀 조용히 해줄래?’ 하고 부탁했지만 별 소용없었다. 이박삼 일 후 집으로 오자마자 남편한테 말하고 산부인과엘 가 봤더니 유산이었다. 조금씩 흐르던 피는 죽은 생명의 흔적이었다. 그 길로 죽은 생명을 긁어내는 수술을 하고 돌아와 쓰러졌다. 억울하고 아리고 아팠다. 원망하는 마음이 목구멍을 넘어서 내 머리 언저리 위에 돌고 또 돌았다. 마지막 선택은 나였으니 벙어리 냉가슴 앓기였다. 나중에 내 이야기를 들은 그 친구는 자기가 그렇게 집요하게 가자고 했던 거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저 자기가 아는 한의원을 소개해 주었을 뿐. 눈물 비바람 속에 살았다. 작은올케 언니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가 조리해 줄 테니까 오라고 했다. 남편이 경기도 고양시까지 데려다주고 가서 한 일주일 동안 언니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조리를 하고 돌아왔다.
내려온 다음 날이었다.
남편은 대천에 사시는 자기 큰 형님이 집을 지으시는데 도와주러 가야겠다는 거였다. 마침 그의 휴가였다. 나더러 같이 가자는데, 난 너무 지쳐 힘드니까 당신이 하영이만 데리고 다녀오라고 했건만 굳이 같이 가고 싶다고 하니 마지못해 따라갔다. 유산하고 왔다는 얘기를 할 수가 있나, 그냥 큰아이 봐주며 짬짬이 시멘트벽돌을 양손에 들고 위층으로 나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몸조리하고 누워 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벽돌 나르는 일을 몸 사리지 않고 하던 나. 다녀온 다음 날 나는 몸이 너무 무겁고 아프고 가라앉았다. 다음날도 또 가자는 그의 말에 나는 너무 힘들어서 안 되겠다고 도리질했으나 자꾸 같이 가자는 거였다. 그냥 가서 옆에만 앉아만 있으라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그렇게 노는 게 되냐구요... 하지만 하도 조르니 할 수 없이 또 따라갔다. 이날은 너무 힘이 들어 전날 반도 못 따라가게 거드는 체만 하다 왔는데, 다음날 휴가 마지막 날이라며 남편이 이번엔 바닷가를 놀러 가자고 했다. 그날은 때려죽여도 갈 기운이 없어서 난 도저히 못 갈 거 같으니까 큰아이를 데리고 당신만 다녀오라 했더니 우리 근처에 살던 *규 씨를 불러 함께 다녀왔다.
그날 밤부터 나는 무너져 내렸고 해소 기침을 시작했다. 그런 기침은 난생처음이었다. 자다가 캘럭캘럭 기침이 나오면 몸이 저절로 벌떡벌떡 일어나졌다. 기침을 할 때마다 온몸이 오그라들었고 내장이 차례로 줄줄이 목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기침 가래가 한 달 반 이상 지속되었다. 먼저 나를 정농회에 가자고 조르던 친구가 알려준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어와 먹었다. 그때부터 내 몸 안에는 해소 기침 앙금이 저장되었나 보다. 가끔 감기에 걸려 기침이 걸려 나오면 어김없이 그때의 통증이 되살아나 가슴 뻐개고 나타나곤 했다. 특히 코로나 때 심각하게 그랬다.
그렇게 약을 먹고 얼추 진정이 되었지만 그 뒤로 두 번이나 자연유산을 겪게 되었다. 직관이 발달한 나는 아이를 가질 때마다 선명한 꿈을 꾸었고, 마지막 아이 때는 성모님이 꿈에 나타나 마니피캇이라는 성모님의 노래를 불러주는 똑같은 꿈을 삼 일째 꾸고 난 다음이었다. 이 아이는 꼭 붙어 있겠구나, 하며 안심했지만 역시나 유산이었다. 그때는 홍동에서 두 번째 집으로 이사 온 이후였고 나는 절망했다. 두 달간은 매일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줄줄 물이 새는 고장 난 수도꼭지였다. 생명이 더 이상 깃들일 수 없는 불모지 땅이 되어버렸구나. 나는 잡을 지푸라기 하나 없었고 마음 붙일 데 없이 허전했다. 텅 비어버린 자궁집만큼이나 나는 비어져 버렸다. 우리는 -남편도 나도- 유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이를 낳은 것만큼 조리를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거였다.
큰아이의 외로움도 크게 보였다. 마침 초등학교 앞에 이사 간 때였는데 막 5살이 된 큰아이는 아침마다 학교 앞에 세발자전거에 앉아 등교하는 형, 누나들을 바라보며 “엄마, 나는 형아 없어 은지, 동생 없어 은지(은지는 그때 후렴처럼 붙이던 말)”라는 말을 반복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또 눈물이 미어져 나와 아이 등 뒤에서 눈가를 훔치곤 했다. 동생을 사 오라고도 했다. 막내였던 나도 엄마에게 동생 만들어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런 예사로운 말이 하나도 예사롭지 않았고 생채기가 줄줄 났다.
유기적인 삶, 순환되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순환되지 않고 생명을 품을 수 없는 불모의 몸이 되자 나는 흙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다. 생명과는 거리가 멀고도 먼 땅. 몸과 땅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건만.
#생명이 깃드는 몸 #생명이 깃드는 땅 #몸과 땅은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