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생명의 땅에 서서
둘째를 임신해 낳았을 때는 2002년 월드컵으로 세상이 뜨거운 해였다.
아들은 5월 16일 생, 그해 4월 중순경부터 작은오빠가 우리 집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미 자살시도를 하셨던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던 터였다. (가족사, 기억 더듬기 참조. https://brunch.co.kr/@8232c2af4f01400/125)
풍비박산된 집안 내력으로 치면 또 파란만장 미시즈 조라고나 할까. 작은오빠는 큰오빠와 하던 사업을 IMF때 부도난 뒤 큰동서 남영신 씨가 하는 순우리말 사전작업을 도우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일하면서 오후만 되면 허리 아래로 힘이 좍 풀리면서 꼼짝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단다. 그러다가 우연히 광화문에서 김철 선생을 만나면서 그분한테 몸살림운동 1기 회원이 되어 나중에 몸살림운동 이사장이 되기도 했었다. 오빠를 살린 운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아낌없이 도와주고 살려나가기도 했고 지금도 자기 사업과 별개로 여전히 애쓰고 있다.
당시 몸이 조금 회복된 작은오빠는 삶에 너무나 회의적이 되었고 자신을 회복시키고자 했는가, 다 내려놓고 농사를 짓고 싶어 했다. 오빠는 우리에게 눈을 돌렸고 우리 두 사람은 누구를 마다하는 사람이 못 되어 결국 우리 집에 주중에 와 있게 되었다. 작은올케는 초등학교 교사여서 언니가 생계를 유지해 온 기간이 제법 길다. 봄부터 있어야 농사를 배울 수 있으니까 볍씨 소독과 파종부터 같이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둘째 아이를 낳기 전날, 산기를 느껴 조산원을 갈 때는 큰아이도 데리고 갔었지만 막상 낳는 날은 데리고 갈 수가 없어 작은오빠가 큰아이를 집에 달래 데리고 있어 주었다. 엉엉 울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던 큰아이를 떼놓으려 할 때 나와 껌딱지 큰아들의 불안은 오빠 덕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조산원에서 둘째를 낳았을 때 역시 조산원 원장님께 부탁해 형광등 불을 밝히지 않았고 큰아이처럼 방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당시 뮤지컬 배우 최정원의 수중분만을 보고 집에서 따라 하려던 나는 작은올케의 거센 반발-아가씨 나이도 많고 하니 안전하게 낳았으면 좋겠다고- 덕에 다시 조산원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큰아이와 달리 둘째는 노랗게 태지를 온몸에 휘감고 태어났고 탯줄을 자르지 말고 바로 낳자마자 아이를 내 배 위에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태중에 있던 가장 익숙하고 안전하던 심박수를 몸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분만 후 으앙 한 마디 지른 아이가 봉긋한 내 배 위에 올려놓으니 바로 쌔근쌔근 숨을 골랐다. 그렇게 한 2,3분쯤 뒤 탯줄을 자르고 씻기지 않은 채 무명천 놓인 바닥에 발가벗겨 두었더니 천천히 태지를 온전히 흡수하는 게 아닌가. 놀라웠다. 보송보송해진 뒤 아이를 씻겨 눕혀놓고 새삼 새로운 생명을 바라보는 뜨거움이 차 올랐다.
첫아이와는 또 다르게 반복된 유산 끝에 어렵게 얻은 아이라 그런지 자다가 젖을 먹일 때는 물론, 수시로 물똥을 싸도 하나도 밉거나 귀찮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유명한 백말띠 해.
아이를 낳아 조리할 때 2002년 5월 말부터 시작된 한 달간의 올림픽 경기에서 우리는 히딩크 감독 하에 축구사상 초유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붉은 악마 응원부대가 만들어내는 붉은 열기는 데일 듯 뜨거웠고 우리 시골 동네도 마찬가지였다. 동네에 있는 홍성여성농업인센터 TV앞에 모인 붉은 농부팀은 소리소리 질러가며 응원해 댔고 목쉰 것쯤 다들 아무렇지도 않을 때였다. 아무나 끌어안고 환호할 정도로 대동단결한 목소리에 아마 대한민국 하늘천정이 들썩들썩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갓난쟁이가 있던 나는 집에서 볼 수밖에. 아이를 재워놓고 때론 남편과 때론 그가 붉은 농부팀으로 합류해 나가면 혼자 축구를 보며 울고 웃었다.
그런 뜨거움 속에 작은오빠가 우리 집 식구가 되어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내 남편이 하던 논에는 가보지 않으시더니 오빠가 와 농사를 지으니 그 논에는 추수 때까지 직접 가서 돌아보시고 훈수도 하고 끌탕도 하시는 거였다. 아버지 팔은 딸자식(아니 사위)한테 한테 굽지 않았고, 당신 아들에게로 굽는 거였다. 팔은 같은 팔인데 가려서 굽는 걸 그때 알았다.
나는 유산 뒤에 몸이 심하게 나빠져 큰애 때는 감기 한 번 앓지 않던 몸이 둘째 가졌을 전후로는 보름에 한 번꼴로 감기였다. 말이 그렇지 우리 갓난쟁이와 6살 배기 큰애, 친정아버지에 작은오빠까지 함께 밥을 해 대야 하니 몸조리가 제대로 될 리 만무였다. 찬물을 대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시댁에서도 친정 식구들과도 지금 생각해 보니 뒤처리 담당인가 싶게 그 와중에 밥을 차려야만 했다. 살림을 모르는 남편과 오빠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처음 한 20여 일간은 그래도 남편이 아이 기저귀빨래는 다 해주었다. 거기다 애한테고 나한테도 천 생리대를 쓰지 않던 터라, 아이를 낳으며 출혈이 있어 내 피 묻은 천기저귀까지 빨아주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하는 내게, '줘, 피나 똥이나...' 그러면서 싫은 내색 한 번 없었다. 고마운 사람...
나도 마찬가지지만 민간요법에 관심 있던 작은오빠는 우리밀과 콩가루를 반죽해 링뜸을 9개 만들어 부황 뜨는 법을 알려주었다. 배꼽 위 중완(中脘)과 배꼽 중앙, 불두덩 근처에 하나로 시작해 링을 세 개씩 올리면서 뜨는 거였다. 처음 한 번 한 뒤론 아이가 잠들 때 작은 방에서 낮에 내가 혼자 뜸을 뜨곤 했다. 방안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뜸 냄새로 진동했고 환기를 시켜도 오래 남았다. 파리가 좋아하는 향기인지 방충망 바깥은 파리들이 대기조로 줄 서 다닥다닥 기다리며 붙어 있었다.
둘 다 58년 개띠인 오빠나 남편도 무관심했을 살림이 어디 빨래만 있던가. 어둑하고 힘든 시기였다. 삼식이가 다섯이나 딸린 애 엄마. 뜸을 떠주는 것으로는 내 몸이 부쩍부쩍 좋아지기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역시 뜸은 효과가 좋았다. 그렇게 작은오빠가 서울로 돌아가 다시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까지 약 육 개월 여를 추수할 때까지 그리 살았다, 아니 살아냈다.
남편은 수더분하고 한결같을 뿐 아니라 친정식구들한테 눈치 한 번 주지 않았다. 오빠는 천천히 회복해 갔고 작은오빠의 몸에도 다시 생명이 돌아왔다. 42살 나이에 늦둥이를 가진 나에게 '아가씨, 주책이다' 했던 작은 올케는 그 이듬해 44에 셋째 딸아이를 낳게 되었으나 나는 같은 말을 언니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언니, 축하해요!' 했을 뿐. 그 역시 기적의 생명 아닌가.
흙에서 농사를 지으며 몸이 살아나고 생명이 다시 생명으로 이어진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해 늦가을, 볏짚을 묶으러 내가 논에 내려서자 저 멀리서 남편이 외쳤다. '와, 우리 각시가 왔네. 다시는 농사 같이 못 지을 줄 알았는데...' 고맙다는 소리였나, 기쁘다는 말이었나. 그 두 가지를 버무린 말이었으려나?
그렇게 나는 다시 몸을 추슬러 흙에 몸 붙여 사는 사람이 되었다, 생명의 땅에 우뚝 서서.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본다. '생명의 땅에 우뚝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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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돌보기가 우선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