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땅이라는 인연
*아쉽게도 저의 제주 일 년 살이가 끝나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에구에구...
제주에서 지내는 앞으로 한 달여는 연재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마구 놀아 제칠 예정이라서요^^.
큰아이가 다섯 살 나던 해에 드디어 땅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땅'이라는 말은 내게 무언가를 비로소 맘 놓고 심을 수 있는 터였다. 그곳은 홍동초등학교가 있는 정문 코 앞이자 창정이라는 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텃밭을 노래하던 나인지라 드디어 집 주변에 농사지을 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달떠 있었다. 남편이 다니던 신협 직원 하나가 자기네 동네 땅이 나왔다고 소개한 거였다. 시골집이나 땅은 추수가 거의 끝날 즈음해서 거래가 된다. 일 년 농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이기에 그렇다. 지금이야 농지은행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고, 부동산과 부동산앱도 여럿 있으며, 농사짓기에 너무 노쇠해진 어르신들이 토지 이양신청한 걸 하고 청년들이라면 우선적으로 받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인 찬스였다. 그 친구 아버지의 오랜 지기가 우리 집주인이셨다. 전라도가 고향인 쥔 부부는 서울 관악구, 서울대 근처에서 몇십 년간 학생들에게 하숙을 치며 밥을 해 주셨고 그즈음엔 일을 차츰 접어가는 중이었다. 머잖아 시골서 정착할 요량으로 사두신 땅이었다. '알뜰살뜰', '억척스레', 이런 부사를 마구 붙여도 모자랄 만큼 일상 애써 사신 분들이었다. 생활력 굳게 벌어 모으셨지만 야박함 없이 사람한테 참 따뜻하고 인자하신 분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다정하시다.
학교 코앞이라 예전에 차가 없던 시절, 학교 선생님들은 이 집 문간방과 아래채 세 칸에서 자취를 했단다. 면장집으로 불리던 집이다. 생각해 보니 내 친할아버지도 면장이셨었는데 여기 학교 앞도 전 면장집이라... 뭔가 인연이 묘하게 닿았나 보다. 게다가 이 집을 사신 쥔 아저씨 내외의 손녀딸 이름이 우리 큰아들과 똑같은 정하영인 데다 나이만 한 살 차이 날 뿐 생일도 같잖은가. 이 무슨 깜찍한 필연 같은 우연? 사람의 첫인상에 속기도 하지만, 우리 두 가족은 서로 인연을 맺은 첫인상을 25년이 흐른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어오고 있다. 사람에게 싫증 내지 않는 서로의 덕분이었을까? 존중하는 마음에서였으려나?
당시 그분들은 만년에 지내실 땅을 사놓고도 당장 내려올 형편이 못 되었다. 누군가에게 그 땅을 빌려주려던 차였는데, 우리가 운 좋게 그 누군가가 되었던 셈이다.
집터 포함해 1,400평이나 되는 땅, 남의 땅이어도 사는 사람이 우선이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문전옥답이라 하지 않던가. 농사짓는데 한 발이라도 가까울수록 작물이 자라는 걸 수시로 볼 수 있는 황금조건 아니겠는가. 쥔 내외는 통으로 그냥 빌려주시겠다는데 그건 부담스럽고도 영 미안한 노릇이었다. 최소비용이라도 내겠다 하여 연 60만 원(월 5만 원 꼴)으로 거기에 몸 붙여 살게 되었다. 2000년 밀레니엄을 두 달 남짓 앞둔 때였다.
이사 들어가기 전, 두근두근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그 집 왼편에 터줏대감처럼 서있던, 두 아름이 넘게 우람한 은행나무였다. 마침 11월, 가을이라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고 은행알은 왜 그리 탐스럽게 굵은지... 집터를 꾹 눌러주고 집을 집답게 만들어주던 그 은행나무를 오가며 쓸어안으며 드디어 홍동이 제2의 고향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빨간 페인트가 함부로 벗겨진 쇠 대문은 삭아 있고 빗장은 늘 걸려 있어 안타까웠다. 안이 궁금했던 나는 문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거의 매일 가서 한 번씩 들여다봤지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궁금하고 또 궁금한 나는 마음 같아서는 담이라도 넘어가 들어가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국 쥔과 계약을 하고 나서 집안에 들어섰다. 가슴은 콩닥거렸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빨려 들어간 토끼굴로 들어가듯 설렘으로 가득했다.
벽돌집이라 춥긴 했다. 화장실도 현관 밖에 있었고. 하지만 내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열악한 시골집에서도 이미 살아 보지 않았던가. 전 면장님은 연로하셔 돌아가셨고, 면장 어머니인지 아내였던 안노인분은 몸이 안 좋으셨다고 들었다. 이사 간 집안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할머니가 간신히 아픈 다릴 끌고 얼마 전까지 문방구를 하고 계셨다는데 쥐새끼들 운동장 같은 느낌? 부엌과 안방을 통해 문방구로 향하는 길목만 빤하고 나머지는 새까맣던 길이며 부엌 싱크대는 문짝이 제대로 맞는 게 거의 없는 데다 꼬질꼬질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40대 초반, 한창때였으니 집안 더러운 건 치우면 되지 싶어 아무렇지도 않았다.
살기로 작정하고 보니 거실이 너무 어두웠다. 천정도 벽체도 마루도 7,80년대에 유행했던 거무튀튀한 나무로 된 터라 우선 도배를 새로 했다. 물론 이번에는 신혼 첫 집 기억이 있어 겁이 나 사람을 불러 대신했다. 걸레를 얼마나 빨고 또 빨아 청소를 했던가. 허리 빠지게 치우고 나니 안방이 왜 그리 넓어 보이던지. 자그맣던 시골쥐가 서울쥐 집으로 이사 온 꼴이었다. 머리가 천장에 닿던 예전 집이 아주 귀여운 자궁집 같은 분위기였다면, 새로 이사 갈 집은 천정도 높고 거실도 널찍해 당시 우리에겐 춤을 춰도 좋을 대궐이었다. 노란 장판이 있던 안방에서 아이와 주르륵 미끄럼도 타고 놀았다.
이사는 신협 동료직원들이 도와주어 1톤 트럭으로 서너 번 어설프게 올려 싣고 날랐는데, 짐을 나르며 깜짝 놀랐다. 들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끄집어 내니 살림이 왜 이리 많아졌는지. 싱글로 홍성 풀무학교에 살러 내려올 때 고속버스에서 내린 나에겐 등에 맨 배낭과 달랑 이불 하나뿐이었는데... 그걸 떠올리면 어느새 눈사람 굴리듯 불어버린 짐, 게다가 아이까지 생겼으니. 짐은 살수록, 눌러앉을수록 느는 마술을 부리는 걸까? 지금은? 말해 뭐 해. 히유, 감히 이사 갈 엄두도 못 낼 정도가 되어 버렸는걸. 외피만 엄청 뻥튀기로 부풀린 달팽이집 꼴이 되었다. 달팽이는 제집을 등에 지고나 다니지, 우리는 이고 지고도 결코 다닐 수 없으리만치 농사짐까지 늘어버렸다. 물론 난 마음만 먹으면 뱀 허물 벗듯 스르륵 버리고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편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 편이 된 땅은 새로운 삶으로 가는 길을 터주었고, 우린 비로소 농부로 환승하게 되었다. 남편이 7년간 다니던 신협 직장을 그만두고 농사지은 지 3,4년 만에 그 땅은 우리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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