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새벽 3시 반을 가리키며 미리 잔뜩 들이킨 커피의 효력도 그 수명을 다할 무렵, 실로 기함할 만한 어느 건설현장의 근무여건 내용은 수현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는데 이 기가 막힌 내용을 버젓이 써 인터넷에 올려놓은 구인글에 수현은 급공포가 밀려오기까지 했다.
'내가 지금 맞게 가고 있는 것일까?'
수현은 금쪽같은 외아들 국제학교 학비를 모조리 자신의 편집샵 운영에 쏟아부었고 그 돈은 반년도 안되어 두배로 신나게 불어났다가 일 년이 채 못되던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가 바지사장 은수에게 매장을 일임하며 잠깐씩만 들렀던 덕에 가족들은 아무도 그녀가 매장을 운영하는 것을 알 수 없었는데, 그녀 역시 아무도 모르게 사업을 진행하길 원했으며그녀의 이런 남다른 행보에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대 갈 놈은 지리산 밑에살다 시험 봐도 가고 또 못 갈 놈은 8 학군 학원에24시간 뼈를 묻어도 못 간다."
평생을 8 학군에서 갖은 과외에 치어 살면서 결국 공부 달란트는 하늘이 주시는 것임을 몸소 체험하고 그 동네를 떠나 온 그녀의 남편은 국제학교니 뭐니 유난 떠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The École Maternelle Pajol, in Paris>2022년 프랑스 건축 에이전시 Palatre & Leclére에 의해 재탄생한 1940년 지어진 파리 유치원
"유치원은 네 소원대로 분당에서 제일 비싼 영어 유치원에 보내줬으니 초등학교는 그냥 제발 유난 떨지말고 집 앞에 공립학교 보내."
라고 수현에게명령 아닌 명령을 했고, 수현도 크게 반대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의견만 따르기엔 그녀는 또 나름대로 그럴 수 없는 이유가있었다.
아들 정민이 영어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를 갈무렵, 수현 가족은 시부모님과 함께 분당의 한복판 공기가 그다지 좋지못한 곳을 떠나 수지의 어느 산 밑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갔는데, 해외 유명 건축가가 단지를 디자인했다고 알려진 그곳은 예뻤고 첫눈에 수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조경을 비롯해 이국적인 단지 모습은 '수지'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의 인지도와 존재감 그리고 각종 인프라의 단점을 커버하기에 충분했는데, 밤새 기침을 달고 살던 아들 역시이사 와서는 밤새 편안히 자곤 했고,시아버지도 얼굴이 부쩍 좋아지시는 등 이래저래 수현 가족은 새로운 보금자리에 정을 더 쉽게 붙일 수 있었다.
제주 더럭 초등학교 image by 트립닷컴
게다가 단지 안에 자리 잡은 작고 아담한 초등학교는 그녀 맘에 쏙 들었었는데, 학교 가기 전날까지 한글을 못 뗀 아들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긴 했지만,직구를 비롯 갖은 루트를 통해 아름답고 실용적이기 그지없는 입학 준비물 들을 잔뜩 구비해 놓은 수현은 본인이 입학하는 듯 사뭇 흥분한 상태였고,덩달아 신난 아들은 팬티만 입은 채로 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들고는새실내화를신고온집안을 저녁 내내 돌아다녔다.
"정민 어머님께서 반대표하시죠."
담임 선생님은 첫날, 다짜고짜 수현에게 반대표 어머니 직을 맡으라고 권했다.
일 학년이라 반장이 없는 건가... 뭐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무튼 순간 부담스러운 마음에 수현은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했고 다음번엔 좀 뒤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한 마음에 대신 시간 내내 그 누구보다도 담임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들어 드렸다.
담임 선생님 복이 많았던지 아들은 저학년 내내 좋은 선생님은 만났었는데, 양쪽 집안에 아이라곤 정민이 혼자여서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던 아들은 사랑이 많았고,받은 만큼 애정표현에 후했고,학교친구들은이를 어색해했다.
김호석(1957~) '독무대' - 한국을 대표하는 수묵화가로 전통 회화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변용을 통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고히 구축,
영어유치원 친구들과 뭔가 다른 분위기에 정민은 힘들어했고 수현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는데, 말랑말랑한 외모가 평생 불편했던 수현의 남편은 더 말랑거리는 아들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견뎌야 한다고 했고 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들의 휴대폰과 신발주머니 그리고 몇몇 학용품들은 언젠가부터 종종없어지고, 찾아오고, 또 새로 사기를 반복했다.
찻길 한복판에서 실내화 주머니를 찾아오기도 한 아들은 처음엔수현에게 일일이 말하곤 했으나 언젠가부터 말하지 않았었고, 집에 와선자주 욱하곤했다.
점심시간에 학교 전화로 전활한 정민은 거칠기로 유명한 아이가 괴롭힌다고 호소했고,수현은 전활 끊고 울었다.
괴롭힌다는 아이 태훈의 엄마는 좋은 사람이었다.
수현이 볼 일 있을 때면 정민을 데려가 밥도 해먹이고 놀리다가 집에 보내주기도 하던 착한 언니였다.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1867-1945)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Woman with Dead >1903- 독일을 대표하는 판화,조각가로 비극적사회주의 테마 그림
게다가 태훈의 형이 정민이반의 또 다른 엄청 성격 좋은 엄마 큰 아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며 울먹이던 모습이 선한 그녀였다.
'그녀는 본인의 또 다른 아들이 또 다른 아이들을 신나게 괴롭히고 다니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그 엄마는 키가 컸다.
아들도 엄말 닮아 키가 컸다. 큰 키로 아이들을 괴롭히고 다니는 걸로 유명하던 그 아이는 마치 자기 형이 당한 것을 되갚아주기라도 하듯 아이들을 맹렬히 괴롭혔고 선생님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세상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좋은 엄만 거는 좋은 엄만 거고 아들의 비행은 아들의 비행이었기에, 수현은 썩 내키진 않았지만 맘을 굳세게 먹고 태훈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고 전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찾다가 눈에 들어온 이름
"창민맘"
알렉스 카츠Alex Katz<Laura 1>, 2017 - 1927년 뉴욕 출생 미국의 화가로 팝아트 운동의 선구자, 가족과 친구들을 주제로 광고나 영화식의 시각적 기법 차용
정민 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쌓이던 아이 엄마였다.
사업을 한다는 그녀는 "전업주부들은 자기를 절대 따라갈 수 없다."라고 항상 큰 목소리로 새로 산 신상을 자랑하며 자신의 소비력을 과시하곤 했는데 엄마의 그 기에 아들도 눌린 건지 소시지만 좋아한다는 퉁퉁한아들은 언제나 조용하고 기가 죽어 있었다.
그러나 정민에게만은 유독 호의를 보이던 창민은 지속적으로 전활하곤 했는데 정민은 계속 외면하는 듯했다.
수현은 언젠가 연거푸 울리는 창민의 전화를 외면하는 정민을 혼냈었는데 정민은
"엄마 그럼 내가 유치하고 재미도 없는데 엄마랑 친한 엄마 아들이면 다 놀아줘야 해? 라며
반박했고 수현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간 아직 분유 냄새가 가시지 않은 정민에게 차가웠던 누군가도 혹 저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창민의 전화 통화내역을 보고 심히 속상했을 창민맘을 생각하니 수현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장 베로Jean Béraud (1849–1935) <The Drinkers>,1908 - 파리의 생활과 파리 사회의 밤문화를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한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화가
그 잘난 여자가, 받지 않는 친구에게 수십 통씩 전활 하는 아들을 혼낼 수도, 또 안 받는 애한테 쫓아갈 수도 없어 혼자 부엌에 앉아 그날 산 멋들어진 신상을 입고는 깡소주를 연거푸 들이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현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창민맘도 정민일 참았을 테니 나도 참자.'
아들 둘이 하나는 괴롭힘을 당해서 속 터지고, 하나는 괴롭히고 다녀서 속 터지고... 이미 그 속이 속이 아닐 태훈맘을,또 그런 형 때문에 이미 가슴이 분노로 가득 찾을 태훈을 수현은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민은 학원 가는 시간을 줄였는데, 그 시간에 유경험자인 아빠랑 '괴롭히는 친구에게 대처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수련해 보기로 했고수현은 괴롭히는 친구 역할을 맡았다.
위에 민준 (Yue Minjun岳敏君)<Untitled> - 1962년 헤이룽장성 다칭 출신, 과장된 제스처와 색상으로 주변인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함냉소적 사실주의로 분류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