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부터 각종 의자 오븐 테이블에 에어컨과 티브이까지 좌우지간 별의별 품목이 다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자리가 모자랐는지 길가까지 그 집 물건들이 점령했다며
"저건 아니지~~."
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강아지와 산책을 나간다고 자리를 뜨는 친정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수현은
'우리 매장 집기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들었다.
"요즘 경기가 영 안 좋으니 중고매장만 노 났다."
며 안타까움을 표하는 아버지의 말에
"그러게요 큰일이에요."
하면서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양 유체이탈 화법으로 대꾸를하던 수현은 마치 애를 잃어버린 엄마 마냥 마음이 아팠고,하나하나 제 손으로 고르고 배치했던 매장의 집기들이 전부 생각나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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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한 지 일 년도 안되어 폐업한 그녀 매장의 집기들은 유독 신경 써 관리했던 탓에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중고업자들 앞에서필요 이상으로 위축되어 보였던 그들은,중죄라도 지은 고아들 모양 거칠게 취급되더니, 제멋대로 가격이 메겨져서는 세차 한지 줄잡아 백 년은 된 것 같은 중고업자의 트럭에 아무렇게나 실려 매장을 떠났다.
수현은 인테리어 잡지를 뜯어서 들고 다니며 그 집기 하나하나 들을 신이 나서 사러 다니던 때를 떠올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었는데, 마치 애를 기를 능력이 없어서 입양 보내는 미혼모 마냥 수현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고 집기가 다 사라진 매장 바닥에 앉아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뒤에 0을 하나씩 빼는 것 같던 중고업자의 셈법은 수현을 기함하게 했었는데, 수현은 처음에 그 사람이 농담하는 건 줄 알고 덩달아 농을 던졌다.
이윽고 상황을 파악한 '폐업 신생아' 수현은 이내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는데,
'이 집 말고도 와 달라는 곳이 수십 군데야 ,
팔 거면 빨리 넘기고 아니면 난 간다.'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수현보다도 어려 보이는 중고가구매매업자는 몸에 딱 붙는 셔츠 너머 자리 잡고 있을, 조금은 과하게 만든 가슴 근육을 한층 더 돋보이게 내밀며,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로 수현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내가 이 아이들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또 어떤 돈으로 사 왔는 줄 알아?'
수현은 눈에서 레이저를 쏘면서 단백질 파우더 냄새가 진동할 것 같은 중고물품매매업자에게 거칠게 집기들을 넘겨주었다.
그 언젠가 손님 앞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선물 포장을 하던 날모냥, 집기를 넘겨주던 그녀의 두 손은 널뛰듯 떨렸는데, 수현의 두 눈은 이미 용량초과로 닭똥 같은 눈물을 대리석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면서 수현의 마지막 모냥을 무척이나 빠지게 했다.
일본 패션회사 베이 크루즈ベイクルーズ의 여성 패션 브랜드 '아파르트몬(L'Appartement)'이 운영하는 도쿄 아오야마Aoyama 편집 매장, 캐주얼 시크한 아이템으로 유명
쳐다만 봐도 행복해 마지않던 옷들이었다.
평생 배를 골아도 예쁜 옷들만 있으면 그녀는 배가 부르고 행복할 것 같았고 실제로 삼십 년이 다되도록 수현은 그렇게 살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폐업 전날 그녀 매장에 잔뜩 걸려있던 아름다운 옷들은 그녀를 전혀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다음날 팔려 나갈 매장 집기 정리에 정신없던 그녀는 저녁시간이 되자 msg덩어리라고 생전 쳐다보지도 않던 짜장면을 곱빼기로 시켜서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는데, 갑자기 섭취한 조미료 폭탄에 얼굴이 퉁퉁 부은 수현은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야 본인이 옷만으로 배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푸대접을 받은 것은 비단 집기들 뿐만이 아니었다.
주인의 배도 불리지 못했던 옷들은 중고명품업체 사장님한테도 좋은 대접을 못 받았는데, 사 올 땐 국내에 극소량만 들여왔다며 웃돈을 주고 가져온 아가들도중고명품업자는 가지고 온 가방과 행거에모조리 대충대충 싣기 시작했고,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수현은 이내 평정심을 찾은 건지 아예 놓아버린 건지, 마치 전쟁통에 애 잃어버린 미친 여자 마냥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물품들을 다 실은 업체사장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 번 씨익 웃고는 매장을 떠났는데 마치
"너한테나 소중한 아가들이지 우리에겐 그저 매장에 걸린 수많은 옷들 중 하나일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그녀는 답했다.
"맞아 그냥 옷들일 뿐이고 천 쪼가리들일 뿐이야."
일본 패션회사 베이 크루즈ベイクルーズ의 여성 패션 브랜드 '아파르트몬(L'Appartement)'이 운영하는 도쿄 아오야마Aoyama 편집 매장, 캐주얼 시크로 유명
게딱지만 한 줄 알았더니 옷들이 빠졌더니 매장이 꽤 넓었다.
빈행거들만 죽 서있는 매장엔 하루종일 부른 탓에 이젠 지쳤을 법한 쳇베이커 Chet Baker의 My funny Valentine과 희미하게 풍기는 아스띠에 드빌라트 Astier de Villatte의 아오야마 Aoyama 향만 가득했는데 밝은 색 릭오웬스Rick Owens 배기바지를 입은 수현은 오늘만큼은 밝은바지에게 바닥에 앉는 것을 허락했다.
바지에 허락된 바닥은 비싼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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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동 유명 타일 업체에 외국잡지를몇 번이고 들고 가 수번을 고민하며 주문했고 또 수일을 기다려 받았으며 최고급 대리석이라 시공업자도 최고급을 써야 제대로 할 수 있다며 매지까지 좌우지간 여간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시공된 것이 아닌 이태리산 대리석 바닥은 이제 곧 뜯겨서 버려질 운명이었는데, 새로 들어올 업체 젊은 사장이
" 대리석은 좀 고루하지 않냐?"
며 웃었고, 자기는"시크한 우레탄 바닥을 선호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이제 곧 뜯겨나갈 너무도 멀쩡하기 그지없는 대리석 바닥을 보며 '백일천하'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역사물이나 정치 뉴스에서나 듣던 단어인데 수현의 인생에도 이런 단어가 걸맞은 상황이 오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일 년이 좀 안되게 매장을 운영했었으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삼백 일 천하' 정도 될 것 같은데, 그동안 특히 바닥이 너무 고급스러워 매장 분위기를 살린다며 칭찬도 많이 받았던 대리석들도 '삼백 일 천하'가 끝남과 동시에 뜯겨 사라질 운명을 앞두고 있었고, 수현 역시 자신의 그간 견고해 마지않던 삶도 곧 뜯겨 사라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사장 모냥 하얗기 그지없던 대리석은 다시 봐도 아까웠다.
수현은 앞으로 너무도 험난 할 대리석과 자신의 앞날에 건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길 건너 편의점에 가서 생전 안 먹던 소주 한 병과 종이컵 두 개 그리고 새우깡 하나를 사 왔는데 어디선가 이런 날엔 이런 조합이 제격이라는 말을 들은 터였다.
눈치가 빤한 편의점 알바 총각은 평소와 달리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고 말없이 조용히 계산만 해주었다.
ENA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새하얀 도화지 같은 대리석 바닥 위에 소주 한 병과 종이컵 두 개 그리고 새우깡 하나를 얌전하게 놓은 수현은 순간 마치 무슨 제사라도 드리는 것처럼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절대 쓰면 안 되는 돈으로 야심 차게 시작해 꼭 크게 불려보리라 다짐했던 그녀가 이제 보기 좋게 싹 말아먹고는 가게를 빼주는 전날밤,그녀의 아가들이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헐값에 팔려가 가슴이 다 찢어져 버린 지금, 유독 공들여 깔았던새하얀 대리석 위에 소주와 새우깡을 얌전하게 내려놓은 수현은 그 앞에 털썩 앉았고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또 두 눈엔 눈물이 금세 차올랐던 것이다.
두 개의 종이컵에 소주를 반씩 따른 수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두 개를 서로 부딪히며 외쳤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험난 할 앞날을 위해 건배!"
수현은 급 은수가 생각났으나 깜짝 놀라 지웠고 평소 달달한 술을 좋아하던 그녀에게 오늘도 여전히 소주는 쓰기만 했는데,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소주보다 곱절은 더 썼고 그녀는, 지금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