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친구와의 일로 울거나 속상해하지 않았으며 적당히 관조적인 자세로 상황정리를 하곤 했는데, 또 하나 달라진 부분은 마치 노병이 전쟁터를 회상하듯 과거 아팠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드라이하게 끄집어내곤 했고 이를 듣는 수현은 매번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혼자 독학으로 코딩을 마스터해 프로그래밍을 하는등 관심 있는 분야를 손수 찾아 성장해 가고 있던 정민은,특히 친구들의 폭이 점차 넓어졌고, 성적이고 나발이고 이는 수현 가족 모두에게 가장 고무적인 일이었다.
엄마가 직장에서 늦게 오는 탓에 수현의 집을 비롯 여러 집을심지어 동생까지 데리고 저녁밥까지 얻어먹으며 엄마가 올때까지 전전하는데 엄마는 전화한 통 없는 애가 있는가 하면대학생 누나랑 사귀고 있다며 연애썰을 풀어준다는 친구까지... 정말 다양한 친구들을 집에 데려왔고
평소
"마약 하는 애만 빼고 친구는 다양할수록 그릇이 커진다."
는 지론을 갖고 있던 수현은 매번 정성을 다해 음식과 장소를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5학년 반엔 친한 친구가 없다고 해서 이상하다 싶었던 차에 담임 선생님의 전화는 급 수현의 맘을 불편하게 하기 시작했는데. 아침에 옷을 입힐 때마다선생님이 주문한 데로 '평범하게, 평범하게"'를 되뇌며 착장을 억지로 맞춰주던 수현은 아침마다 예쁘게 입혀서 넘치는 만족감에 뽀뽀를 백만 번 해 등교 시키던 기쁨이 사라졌고 다소. 우울해졌다.
그 이후로도 정민은 가끔 지각을 했지만 담임 선생님의 전화는 없었고 트레이닝복 등을 사 와서는 선생님이 주문한 데로좌우지간 무지 편하고 평범하게 입혀 보내길 몇 달, 수현도정민도 이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정민 어머니시죠?"
"저 정민 담임인데요."
"어머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계셨죠?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세요."
앉아 있던 수현은 급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상대에게 본인의 말이 잘 들리도록 수화기 밑을 반대편 손으로 단단히 가리고는 마치 상대방이 눈앞에라도 있는 듯 연신 허리를 굽신 거리며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이어갔다.
아이를 맡긴 입장은 언제나 그런데, 일단 맡긴 이후에는 '맡아준 자'가 '갑'이 되고 '맡긴 자'는 '을'이 될 수밖에없으며맡겨진자'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는 리더와 팔로워의 나이차이가 많을수록 '맡아준 자'의 대우에 따라 '맡겨진자'의계급이결정된다.
정민은 공개적으로 꾸중을 듣는 경우가 많다고 했고 그럴 때마다 수현은몇번을 찾아가고 싶었다.
여태 선생님들과 상담할 때마다 한 번도 "'순둥순둥해서 치이면 치였지사고 치는 아이는 결코 아니"'라며 칭찬만 주구장창 듣던 정민인데 대체 무슨 일일까'
그러나 그일이있기얼마전친한 엄마에게서,
"담임의 반복적인 '공개적 망신주기'로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 찾아갔으나, 잘못해서 혼낸 거지 다른 뜻은 없었으니 흥분말라며자기만 이상한 사람 되었고 결국 전학을 결정했다."
는 얘기를 들은 탓에 수현은 섣불리 찾아가기도 망설여지던중이었다.
"어머니 오늘 정민이혼자 앉아 있었던 것 아시죠?"
"현장 학습에서 정민이 혼자 앉아 밥을 먹더라."며 담임선생님이 통화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불쑥 사진을 보내왔다.
혼자만 고고하게 앉아있는 아들은 집에서완 다르게 온몸에서 어른스러움에 비장함마저 뿜어내는 듯했다.
수현은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담임은 계속 드라이한 목소리로 사건을 설명하는 수사관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밥 먹는데 혼자 앉아서 먹던데 어머님 알고 계셨나요?"
수현은 목이 메어서 답을 못하고 눈물과 콧물이 섞인 커다란덩어리를 목으로 꿀꺽 삼키고 겨우 답했다.
".. 아니오..."
그간 상상만 했고 미루어 짐작만 했었는데 막상 혼자 앉아 심지어 비장한 모습으로 꼿꼿하게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정민의사진을 받아 보니 수현은 억장이 무너지고 살을 에이는 듯했다.
둘 사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과 다툼이 있었나요?"
수현이 먼저 입을 뗐고 담임 선생님은 특별히 그런 일은 없었는데 정민이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했다.
"4학년 때 친구들이랑은 잘 노는데.. 특별히 싸운 일도 없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수현은 정말 이해가 안 되고 궁금해서 물었고, 또 한편으론담임 선생님이 정민일 위해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제안하는 해결책 비슷한 것을, 그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나 씩씩한격려의 말을 듣고 싶었다.
어차피 뾰족한 수 절대 안 되고 따라서 큰 도움 안 되겠지만그저작은 위로라도받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의 발로였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서, 어머니께서 정민에게 직접 물어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녀는 수현의 질문에 역시 드라이한목소리로 두리뭉실한 답을 하며 대충 전활 끊었고 수현은 전화가 끊긴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평소 차갑던 그녀가 이번만이라도 좀 공감하고 같이 안타까워하는시늉이라도 해줬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수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팩스처럼사진을 보내왔으며 타자기처럼 사건 경위를 설명한 뒤 용무가 끝난 ARS통화처럼 통화는 마무리되었고 뒤처리는 어차피 고객님건이니 상담원이 아닌 고객님의 몫이었다.
한참을 서있던 수현은 한마디를 뱉었다.
"아,... 이제 더 이상 못해먹겠다."
수현은 평소 말했었다.
"학교는 공부 배우러도 가지만 더중요한 건 사회생활을 배우러 가는 거."라고
그리고 또,
'다른 공부는 학교 아니어도 학원 가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있지만 학교 내에서의 사회생활은 학교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여기서 배운 사회생활이 이후 모든 사회생활의 근간이 되는 거."라고
사실, 수현이 살아보니 그랬다.
공부야 아무 데서나 배울 수 있지만사회생활은 그 구성원이되어 부딪히며 체득하기 전엔 마치 '키스를 글로 배운 것'처럼 수십 년을 공부했데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번 정민의 눈물바람에도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아이를 어르고 달래 학교에 보내고 또 보내곤 하며 5년을 버텼는데 이제 아이들과 교류하는 법을 좀 익히고 잘 활용해 가고있어좀 안심이 되어가는 찰나에 정민 담임 선생님의 전화는수현의 뒤통수에 누군가 죽으라고 씨게 짱돌을 던진 기분이었고 수현의 인내심은 거기서 멈췄다.
"그만하자."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만하라."라고 "이제 되었다."라고 온 세상이 수현에게 말하는 듯했다. 절이 싫으면 그저 중이 떠나면 되는 거였다.
직장에서 나도 늦게 오는 엄마였으면. 그리고 나도 평소 애를누군가 돌봐줘도 감사 전화 정도는 서로 스킵하는 쿨한 성향의 엄마였으면 섭섭함 1도 없이 전혀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다른 아이들처럼 편한 평상복을 입혀 학교에 보냈었다면 담임 선생님에게 그런 소릴 들을 일도 없었을 것이며. 담임 선생님 성격상 딴에는 엄청 신경 써준 거였고, 이곳에선유사건에 대해 줄곧 그런 방식으로 대처해 왔고 민원 역시 전무했는데 서로의 온도가 달라 수현에겐 그녀가 무지 차가운사람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외식메뉴로 고기나 회를정할 때 그 어떤 것을 정해도 이상할 것이 없고, 문과나 이과 어느 과를 선택한데도 전혀 한쪽이 이상하지 않듯, "평냉파인데 함흥냉면의 성지에와서평냉 찾는 사람이 이상한 거."였고 선택지는 두 개였다.
남아서 오지게 참고 견디던지 아니면 저 좋은 데로 떠나던지
수현은 문득 영어 유치원 친구가 정민처럼 공립에 갔다가 결국 적응 못해 국제학교로 옮겼고 너무 잘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물론 평생을 대치동에 살면서 각종 극성엔 학을 뗀 남편과 시어른들은 '비인가'라 안되느니 "엄마가 극성부리고 유난 떨어봐야 아무 소용없다."느니 하시면서 쌍수를 들고 말리실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장장 오 년간 쌓인 울분이 수현은 이번 일로 한꺼번에터져 버렸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돈이 문제였다.
반대하는 입장이니 당연히 학비는 기대할 수 없고, 따라서 수현이 조달해야 국제학교 행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수현은 난생처음 저축이란 것을 시작했고 쉽지 않았지만 금쪽같은 아들을 위해 그녀는 기쁘고 또 행복하게 절약했는데, 길지 않은 기간에 돈은 꽤 모였고 이제 반대파 설득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