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tsuya Ishida, 'Mebae (Awakening)',1998, Acrylic on board,Courtesy Kyuryudo Art Publishing Co, Ltd
보통 어릴 적엔 엄마가 가까이 지내는 집 애들이랑 대충 어울려 놀다가도 아이들은 머리가 굵어지면 자기 취향을 찾아 나서 결국엔 자기와 맞는 친구를 찾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민이 다니는 학교에선 정민과 비숫한 취향을 가진 친구가 없었는 모양이었다.
그저 해맑던정민의 눈빛이 점점 건조해지고 아기 같던 말랑함이 사라질 무렵,드디어 정민의 소지품도 분실을 멈췄고수현도 오래간만에 깊은 호흡을 할 수 있었다.
평소 서로의 집에도 놀러 다니고 어울리는 아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정민은 "그냥 노는 것일 뿐 정말 맘에 맞는 친구는 아니.'라고 했었는데,
"엄마 그런 친구는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
감자기 들어온 질문에 수현은 당황해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고, 정민은 질문을 던져놓고는 창너머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Tetsuya Ishida, 'Viaje de regreso', 2003, Acrylic on canvasTakemi Art Photos, Courtesy Kyuryudo Art
'글쎄.. 어디 가면 그런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저 좋다는 친구는 저가 시시해하고 자기가 좋다는 친구는 또 자기를 시시해하고..
그러나 어찌 이러한 법칙이 비단 어느 초등학생의 친구 관계에서만 있으랴
살다 보면 직장도 사람도 심지어 집을 사거나 자동차를 구입할 때도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다,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한 30%쯤더 요구하는 법이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다 한 30%쯤 내 맘에 안 차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수현은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야 삶의 이런 '진상'같은 면면을 깨달았던 것 같은데 아들 정민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를너무 힘들게 배우고 있는 것 같았고 수현은 자주 마음이 힘들었다.
외삼촌이 유럽에 유학 가있던 탓에 어릴 적부터 유럽 여기저기를 다니곤 하던 정민은 그래서인지 어쩐 건지, 신기하게도 캐릭터에 열광할 나이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즐겼었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수현은 정민을 일부러 캐릭터 샵에 데려가기도 했었는데, 정민은 이내 싫증을 냈고 오히려 미술관이나박물관에 가선 마치 놀이공원에 온 아이 모냥 여기저기를 구석구석 자기 방식대로 만끽하곤 하던 정민은 어른도 지겹기 쉬운 클래식 공연도 잘 버티는 등, 무튼 좀 다른 아이였다.
게다가 또래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엄마와 서로 애정 표현이 풍부하던 아들은, 엄마가 입혀주는 불편한 셔츠들이나 코트 그리고 구두들도 잘도 입고 신고 다니곤 했는데, 수현은 남편과 자신의 장점만 쑥 뺀 아들을 아침에 공들여 입혀 놓고는 학교 가기 전얼굴에 뽀뽀를 백만 번 해서 보냈고, 봉쁘앙 Bonpoint으로 풀착장을 한 초등생 아들은 물 건너온 엄마의 버터리한 립밤 냄새가 듬뿍 묻은 얼굴로 학교에 갔다.
Harold Wilson, 'A Park Street Boy' 1931, (1904-1938활동) Birmingham Museums Trust
그런데 정민의 5학년 담임 선생님은 그런 정민이 싫었을까
언제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선생님들에겐 예쁨 받는 것이 디폴트 값이던 정민이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그간 정민의 각종 애로에 학교와 관련한 이슈엔 눈치가 백 단이되어도 시원찮을 수현이었는데 수현이 너무도 좋아하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수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을 해, 더욱 인상 깊었던 정민의 담임 선생님은 심지어 정민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는 말에 수현은 담임 선생님과 더욱 수월한 소통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고 긴장의 끈을 조금은놓고 있었으나, 이건 뭐 짚어도 단단히 잘못짚은 모양이었다.
"어머니! 정민이 옷 좀 편하고 평범하게 입혀 보내세요!"
정민의 지각건으로 전화를 했던 지원의 담임 선생님이 지각 이슈로 일장 연설을 한 후 갑자기 투척한 발언에 수현은 순간당황했다.
'네???'
수현은 급 멍해져 입 밖으로 소리도 못 내고 놀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영겁 같던 찰나가 지나고 수현은 잠시잠깐 놓았던 정신줄을 간신히 되잡을 수 있었는데, 말을 던진 정민의 담임도 수현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둘 사이엔 예정이라도 된 듯 짧지 않은 적막이 흘렀다.
Elizabeth Bogard, 'Checking Calls', 2009, Acrylic On Paper
"아네네..."
간신히 짧은 대답을 한 후, 정민 담임 선생님의 전혀 상상도 못 한 변화구에 수현은 달리 이어서 대꾸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꿀 먹은 벙어리모냥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이게 지금 이렇게까지 혼날 사안인 걸까...'
수현이 저 혼자는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을 때 정민의 담임 선생님은 "정민의 지나치게 정갈한 옷차림이 정민의 학습활동에 저해가 된다."며 당신 발언의 배경을 밝혀주셨다.
'선생님의 '저해'와 내가 알고 있는 '저해'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계속 꿀 먹은 벙어리이던 수현은 결국 주인에게 된통 혼난 똥강아지 모냥 깨갱거리며 전화를 끊었는데,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정갈한 옷차림의 반 학습적 측면에 대해 알게 된 그녀는 통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정민의 옷장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었고 어쩌면 낮지 않을 수도 있다며 자신의 반사회성 정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Naomi Vona (1982~)'In August ',2020,Paper on Paper
수현과 남편 재원의 장점 아니 양쪽 집안 유전자의 우성만 다 모아 결혼 5년 만에 어렵게 태어난 정민은 수현의 전부였다.
연애시절 툭하면 간과 쓸개를 꺼내 무한 제공하던 남편이 결혼과 동시에 업장을 닫은 후, 수현은 밀려오는 상실감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었는데, 여자는 자식이 재산이라고 했던가? 친정 엄마의 등쌀에 전국의 고양이들을 다 고아먹는 등 천신만고 끝에 얻은 정민 육아에 수현은 온 맘과 정성을 다했고 아이는 밝고 예뻤다.
그런 정민의 옷장은 소위 '아동복계의 에르메스'라는 '봉쁘앙 Bonpoint'으로 가득했는데, 당시 경기도 백화점에는 매장이 없어 수현은 '압구정 현대백화점'이나 '갤러리아 백화점', 그리고 도산공원 '에르메스 Hermès' 매장 옆의 본점 등을 극성으로 찾아다녔고, 정민의 봉쁘앙 켈렉션은 그렇게 수현의 피땀눈물을 갈아 넣어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동복계의 에르메스'라는 별칭답게 '봉쁘앙'은 높은 퀄리티만큼이나 높은 가격을 자랑했는데, 따라서 원래 이런 브랜드는 백화점 가서 정가를 주고 턱턱 사줘야 제 맛이었다.
도쿄 긴자 Bonpoint 매장-2017년 오픈한 아시아 최초 컨셉 스토어
그러나 저도 또한 옷성애자라 자기 옷도 사대 야하니 두 가지를 다 커버할 총알은 절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정민을 봉쁘앙으로 도배해주고 싶던 수현은 "패밀리 세일'이니 뭐니 좌우지간 각종 행사 때마다 부지런히 쫓아다니곤 했는데, 우습게도 갈 때마다 매번 마주치는 '비숫한 처지의 봉쁘앙 성애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언젠가부터 서로 눈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각종 프로모션이란 프로모션은 좌우지간 샅샅이 찾아다니면서 양말부터 코트까지 열심히 실어 날라 댔던 수현에게 사실 봉쁘앙 옷 하나하나는 그냥 옷이라기보다 일종의 소원을 담은 편지지 같았다.
수현은 매번 득템 한 옷들마다 '정민이 그 누구보다 밝고 현명한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등 수현의 크고 작은 바램들을 조심스레 끼워 넣곤 했는데, 그 소원들이 날아갈세라 수현은 희망들을 단디 고정한 후 그 어떤 것들보다도 예쁘게 개어 정민의 옷장 안에 고이 넣어 주곤 했었다.
photo by 한영수 Han Youngsoo. '서울 명동 Meongdong Seoul',1958, image by 한영수문화재단
수현의 이러한 자식옷 집착은 수현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수현의 어머니 옥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즐겨 읽는 문학소녀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 탓에 그녀의 배움은 지속되지 못했었는데, 직장을 얻어 서울에 온 옥선은 대체로 수더분하던 동료들과 달리 도도하고 까칠한 아가씨였고 어느 날 나갔던 미팅에서 손으로 찌개의 두부를 집어 먹는 남자에 기겁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옥선이 어느 날 소개받았던 태환은 멋쟁이였다.
그 역시 삶의 여정이 쉽진 않았던 청춘이었는데 그러나 태생적으로 배포가 크고 상남자였던 태환은 삶의 애환들에게 지기보다는 그냥 다 먹어치워 버리는 앗쌀한 스타일이었고 그 덕에 작지만 딴딴한 생활근육이 자리 잡힌 멋진 청년이었다.
Image by NEWSBANK
전날 아무리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더라도 꼭, 일찍 일어나 바지에 찔릴듯한 칼주름을 잡고 출근을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던 태환은 '월화수목금토일' 다 다른 여자를 만나던 인기쟁이였는데, 한창 자기 못지않게 날스럽던 양장점 아가씨를 만나던 태환은 별생각 없이 나갔던 소개자리에 나온 '옷 잘 입는 수녀' 같던 옥선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 많던 여자를 단번에 다 끊고는 그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런데 옥선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좌우지간 대쪽 같은 여자였다.
게다가 저세상급 청결함을 자랑하던 옥선의 살림솜씨는 가히 수준급이었는데 때문에 한 톨의 물리적 먼지도 허용하지 않던 그녀의 곤조는 태환의 본가 조공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고 둘은 자주 다퉜다.
어찌 된 일인지 둘째지만 맏 아들 역할을 하던 태환은 다부지긴 하지만 크지 않은 등판에 좌우지간 여러 개의 빨대가 꽂혀 있었는데 옥선 생각에 정당성이 떨어지는 대개의 빨대들은 종종 둘 사이의 다툼의 도화선으로 작용했고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또 격렬하게 싸우곤 했었다.
옥선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Vihelm Hammershoi(1864 - 1916),'Interior with Young Woman Seen from the Back' ,1904,Oil on canvas
그녀가 밤낮으로 반들반들하게 닦아대는 가구들만큼이나 윤이 나고 빛나는 삶을 원했던 옥선은 그 어떤 엄마들보다도 바지런하기 그지없었는데 수현은 평생을 엄마 옥선이 그저 앉아서 한가로이 티브이 등을 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옥선은 항상 부엌에서 음식을 하거나 아니면 집안 청소를 하고, 앉아 있더라도 마늘을 까거나 나물을 다듬는 등 언제나 그냥 쉬는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래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자기 본분에 온몸을 갈아 넣는 사람이었는데, 그 덕에 수현은 '엄마들이란 원래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하곤 벽을 보고 혼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디폴트 값'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렇게 온몸이 정당성으로 뜰뜰 뭉친 그녀는 때문에 당당함 또한 본능적으로 탑재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당당하기로는 또 둘째가라면 서럽던 남편 태환과 옥선은 신혼시절 한두 달을 제외하곤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툼이 끊이질 않았었다.
뭐 사실, 둘만 있으면 괜찮았다.
옥선은 기꺼이, 24시간, 자신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온 집안의 말초까지 살살이 돌볼 수 있는 여자였고 또 태환 역시 기꺼이 자신의 온몸을 갈아 그 가정에 피를 넘치게 델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둘의 살림은 항상 빠듯했는데, 이는 태환의 등에 결혼 전부터 꽂혀있던 수많은 빨대들 때문이었다.
Ned Axthelm, 'Quiet Bus', 2013, Oil on Canvas
일하는 사람을 둘 씩 두고 여유가 있던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는데, 태생적으로 배포가 크고 그릇이 방대했던 차남 태환은 장남이 있지만 없던 가정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비장한 결의를 했고, 고심 끝에 부엌에있던 얼마안 되는 엄마 돈을 훔쳐 14살에 홀로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러나 기대이하의, 실로 생각보다 더욱 형편없던 엄마의비상금 단지 사정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 진 태환은 14살이지만 마치 44살 어른의 그것처럼 기형적인 책임감이 저절로 탑재되었는데, 따라서 저도 모르게 자체 생산된 조바심에 태환은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가며 낯선 서울살이를시작했다.
달리 기거할 곳도 없이 그저 용산역 앞에서 양말을 팔아 그날의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하며 무작정 시작한 태환의 서울살이는 말 그대로 쉽지 않았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배포도 크고 남다른 그릇을 탑재했던 태환은 신통방통하게도 짧은 시간 내에 가족들을 서울로 부를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었고 그렇게 태환 가족의 서울 살이는 태환의 주선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중매가 잘되면 술이 석 잔 안되면 뺨이 석대"라고 했던가
배우자를 주선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보다 태환 가족 개개인에겐 당장은 더욱 큰 일일 "삶의 터전 이동 제안"에 가족들은 처음엔 반신반의했으나 결국 태환이 이끄는 대로 서울행을 결심했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어느 변화나 궁극엔 해피엔딩이더라도 중간에 좌충우돌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시기는 피할 수 없기 마련이지만 그건변화를 자신이 선택했을 때 어필해 볼 수 있는 이야기고 타인의 종용으로 서울행을 택했다고 생각한 어머니를 비롯한 태환의 가족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Tetsuya lshida, 'Decided by Myself',1999, Oil on wood panel Takemi Art Photos, Courtesy Kyuryudo Art
때문에 태환이 때마다 제공하는 서울살이용 키트가 맘에 들지 않을 때마다 제공자의 제공여정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가족들은 뺨을 후려갈기기라도 할 듯 앞다투어 강한 원망을 쏟아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뺨대신 등을 내어주던 태환은 어느새 크지 않은 등에 빨대를 잔뜩 꽃은 기형적인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은 태중부터 그를 과하게 예뻐하셨었을까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자아에 태환이 치어 결국엔 콱 죽어버리기라도 할 것을 우려하셔서인지 신은 태환에게 태환의 가혹한 운명 못지않게 기형적일 만큼 넘치는 여유와 긍정성을 붙여주셨는데 덕분에 태환은 서너 살 위는 그냥 맘먹어 버리기 일쑤였고 열 살 연장자 정도는 맞담배를 피우며 넉넉히 상대해 낼 만큼 가히 그 넉살이 단연 으뜸인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넘치는 흥 또한 남달랐던 태환은 등에 수많은 빨대를 꽂고도 뭐 빨대는 빨대인 거고 일이 없는 주말이면 칼주름이 번뜩이는 판탈롱을 차려입고 고고장을 찾곤 했는데, 여러 아가씨들과 이 밤의 끝을 잡으며 종종 빨대가 잔뜩 꽂힌 등에 난 수많은 상처를 잊곤 하던 그에게 어느 날 나타난 '옷 잘 입는 수녀' 옥선은, 태환이 고고장에서 주말을 보내는 동안 자신은 '양로원 목욕 봉사'를 한다고 심히 고고한 말투로 자신의 여가 활동을 밝혔고 태환은 이 외계 여자에게 남은 인생을 걸기로 결심을 했다.
이렇게 철저히 다른 별에서 살던 태환과 결혼 생활을 시작한 옥선은 둘이 철저히 다른 세계 출신임을 매 순간 온몸으로 체감하며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는데, 그런 그녀에게 그 갖은 애환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는 아이들과 못이었고 따라서 그런 아이들에게 예쁜 옷을 입혀주는 행위는 옥선에겐 단순히 아이에게 옷을 입히는 것 이상의 유일한 안식처 그 자체였다.
이러한 옥선의 딸 수현을 위한 옷 쇼핑 여정은 아침 일찍 시작해 저녁 하늘이 빨개져 올 때쯤 마무리되곤 했다.
Ruud van Empel(1958~), 'World #19', 2006, Cibachrome
형편 탓에 가장 예쁜 옷 한 벌만 살 예산을 가지고 시작한 여정은 쇼핑 장소를 서너 번 옮겨 다니고 상점은 거진 열 군데를 돌았으며 수현이 옷을 서른 번쯤 갈아입고 난 후에야 겨우 끝나곤 했는데, 때문에 매번 기진맥진한 상태로 임무를 완수하곤 했던 수현과 디렉팅에 지친 엄마 옥선은 배고픔 덕에 더욱 맛나진 순대와 떡볶이를 양껏 사 먹었고 불러진 배만큼이나 흡족하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엄마에 그 딸 아니랄까 봐 수현 역시 엄마 옥선을 닮아 옷에 있어선 까칠 정도가 높았다.
특히나 요란스러운 것은 딱 질색인 탓에 두드러지는 로고는 없으나 그 존재감이 쩌는 '봉쁘앙'을 더욱 애정했었는데 이런 수현은 봉쁘앙의 여러 아이템 중에서도 특히 흰색 긴팔 셔츠를 애정했다.
그 어떤 로고도 없이 그 핏이 마치 '브리오니 Brioni 키즈'라도 되듯 완벽해, 셔츠를 입히며 수현은 매번, '이 셔츠처럼 정민이 조용하지만 기품 있고 내실 있는 사람이 되길..' 기도하곤 했었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남성복 럭셔리 하우스인 브리오니Brioni의 2023 Holiday gift package
그러나, 매번 수현이 원하는 방향은 좌우지간, 학교 아이들이 좋아하는 방향은절대 아니었고,덕분에, 정민의 고생 역시 마치 화수분 같았다.
엄마의 기대와 자신의 자아, 그리고 친구들의 시선들과 수년간 싸우면서 정민은 어느덧 마음에도 굳은살이 두껍게 쌓여갔는데, 굳은살과 함께 정민도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5학년, 고학년이 되었고, 눈이 제법 깊어진 것이 이제 누가 봐도 형아 티가 났다.
5학년이 된 지 좀 지난 어느 날, 수현은 형아가 된 정민에게 물었다.
"정민아 5학년 반친구들은 어때?"
"음 지금 반에선 친한 친구는 없지만, 4학년 때 친구들이랑 쉬는 시간에 노니까 괜찮아."
정민은 레고를 만들면서 무심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는데 그 무심한 표정은 수현을 더 아프게 했다.
차라리 저학년 때 친구들이 괴롭힌다고 울며 생떼 부리던 것이 더 나았을까
정민의 마음이 온통 딱딱한 굳은살로 덮여버린진 꽤 된 것 같았다.
매일 눈물로 가득 차 축축하기 그지없던 눈이, 그리고 울먹이던 목소리가 저렇게 건조해지기까지 정민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혼자 견뎠을까
상상이 안되어 수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는데, 정민은 그런 수현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이내 다시 레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Tetsuya lshida, 'Untitled' (2004). Acrylic and oil on canvas. Courtesy the artist and Gagos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