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가슴에 용광로를 안고 태어난 아이

by 계영배




너무도 근면 성실의 아이콘 이어서 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었던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법이 있어야 지대루 사람 구실하고 살' 딸내미는 집안에서 혼자만 가슴에 들끓는 용광로를 안고 태어났었다.







모진 시집살이에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평생을 술 한 잔을 입에 안 대는 등 좌우지간 신기할 정도로 모범적으로 살아온 엄마와 본인 아버지한테는 십 원 한 장 안 받고 맨손으로 시작하여 심지어 첫째가 아닌데도 동생들 공부 가르치고 시집 장가도 보내며 또 당신 자식들 유학도 보내는 등 기꺼이 주변 가족들을 위해 본인의 등을 활짝 오픈하여 수많은 빨대를 꽂게 허용하신 가히 자수성가의 아이콘 같은 아버지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던 나는 특히 엄마가 항상 안쓰러웠다.(근데 나이 먹어보니 아빠는 아빠대로 안쓰럽고 또 엄마는 엄마대로 안쓰럽더라...)







연애시절 엄마를 업고 다녔었다는 아빠는(이 부분은 좀 부럽다. 나는 연애시절 호방한 여자 친구였던 탓에 술만 먹으면 힘이 세져서 당시 마치 순진하고 조신한 샌님처럼 자신을 철저히 위장(?)했던 남편을 내가 술기운을 빌어 종종 업어주곤 했었다) 이렇게 당신 삶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수많은 혹들로 고달팠던 탓에 특히 시댁과 문제가 있을 때면 절대 엄마 편을 들어줄 수 없었고 엄마는 그럴 때마다 "너네만 없었으면 엄마는 벌써 어디론가 훨훨 날아갔을 거"라고 하시면서, "엄마한테는 너희가 전부라 너희 때문에 참고 사니 빨리빨리 커라. 엄마 좀 훨훨 날아가게."라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이제 애를 낳고 키워보니 엄마의 “훨훨 날아가게.”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너무 알겠다.)







엄마는 이 스트레스 상황을 어떻게 그 가녀린 몸으로 술 한잔 입에 안 대고 또 맛나고 힘도 나는 고기도 한 조각 안 먹고 버텼을까.... 정말 다시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람인데 무튼 그 에프엠 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 혼자만 무슨 연고도 없는 예술가 스피릿만 충만하게 태어난 나는 '내 본성은 이따위더라도 모범적 성향을 가진 부모님 자식이고 또 첫째니까 그에 걸맞게 나도 올바르고 근면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과 '그래도 나도 숨 좀 쉬어야 하지 않겠나 나만 이 집안에서 왜 이렇게 아빠의 표현을 빌자면 <천지도 모르고 날뛰는> 꼴통 기질을 타고난 건가... 어딘가 나와 비슷한 소울을 가진 사람들이 있진 않을까'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뒤섞여 나름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다소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건 내 사정이고 일단 첫째로써 감정적으로 힘든 엄마에게 유일하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공부라고 생각했던 나는 꼴통 기질을 꾸역꾸역 눌러가며 어찌어찌한 끝에 부모님이 원하시던 그 소위 '시집 잘 간다'던 대학엘 결국엔 가게 된다.(시집을 잘 가는지는 딱히 잘 모르겠으나 '알선'이 좀 활발한 것은 분명한 게 내가 학교 주소록에 신혼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올려놨었는데 신혼집으로 중매쟁이 아주머니한테 전화가 와 나를 찾으며 "아가씨~~ 생각 있으면 선을 좀 봐라 좋은 선자리가 있다."라고 해서 내가 막 웃으면서 "아주머니 저 벌써 시집갔어요. 이 번호는 신혼집 번호입니다.ㅎ"하면서 전화를 끊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나는 그간 눌러왔던 각종 꼴통 기질을 아낌없이 분출하며 신나게 놀아주었고 ‘1.83’이라는 화려한 학점과 함께 나의 대학 생활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화려했던 학점 탓에 거창한 곳은 지원도 못하고 내 전공 관련 아담한 곳에 취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나는(사장님 그래도 뽑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운 좋게도 일하던 중간에 내 열정을 불사를 직업을 찾게 되었고 또한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신박하기 이를 데 없는 기회를 통해 지금의 남편도 만나 나의 오랜 숙원인 ‘현모양처’의 꿈을 드디어 실현시키게 되는 줄(그때까지는 그런 줄) 알고 '결혼생활'이란 것을 시작했었다.







막내였던 남편과 만났을 때는 나는 적어도 내게는 무지 무거웠던 장녀의 옷을 잠깐 벗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이들처럼 아주 신나고 재밌는 연애를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몇 년 후 나의 청혼으로 시작되어 처음엔 아주 아주 재미가 있었던 결혼생활은 어찌 된 일인지 아이가 태어난 후 다양한 분야에서의 의견 차이로 인해 순탄치 않은 날들이 많았다.(그러나 연애결혼이라 그런가 무튼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하면서 벌써 20년째 아직 같이 살고 있는 중이긴 하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 가슴에 불을 안고 태어났던 아이인 내게 우리 아들이 대여섯 살 무렵 아이와 함께 떠났던 ‘유학 간 남동생 집 방문’으로 시작, 유럽의 몇몇 나라를 둘러봤던 여행은 이후 그간 내 안에 고요히 잠자고 있던 '가슴의 불'이 다시 당기는 계기가 되었고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말로만 듣던 '진정한 자아 찾기'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누군가 행복과 불행은 교대로 오지 않고 덩어리 지어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했던가 그간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고 “니 나이에 무슨 공부냐 돈 한 푼 못 벌면서 눈만 높아가지고는 쓸데없는데 돈 쓰고 돌아다니지 말고 생활비 차곡차곡 모아 저축하고 집안일이나 잘하라.”는 등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었던 ‘뒤늦은 진정한 자아 찾기’ 여정으로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내 삶은 그 이후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등 연이어 내게 찾아온 고통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말 그대로 ‘180도’ 바뀌게 되었고 원래 태생적으로 외향적이고 사회성 좋던 나는 세상과 아주 아주 높은 벽을 쌓고 홀연히 '잠수'라는 것을 타게 된다.








잠수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인들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고 나는 어느새 혼자가 되었다.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날짜가 다가오면 숨이 점점 가빠져 급히 약속을 깨기가 일쑤였고 심지어는 나가려고 옷을 다 입고도 갑자기 호흡곤란이 와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남편은 “신체적인 검사는 다 해도 큰 이상이 없으니 너는 정신과나 가보라.”라고 했지만 난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의사한테 털어놓는다고 의사가 내 상황을 해결해줄 것도 아닌 데다 또 긴장을 이완시켜주는 약물을 준다 해도 약물 따위에 의존하여 내 정신이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좌우지간 죽든 살든 내 정신만큼은 내가 리드하고 싶었다.






그러면 남편은 또 여지없이 "네가 의사냐,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아주 우리 집안 의사 나셨네." 하면서 또 한 번 내 속을 뒤집어 놓곤 했지만 그렇게 정신과 병원에만 찾아가면 다 해결된다면 우리나라에 지금 이렇게 오은영 박사님 열풍이 불었을까







오은영 박사님은 말씀하셨다. "아이들의 모든 특이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고... 나도 내 몸에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 신체적 증상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은가. 무슨 관련 분야 권위 있는 논문을 수 백개 발표하신 박사님이라고 해도 신내림 받은 무당들도 부지기수로 틀리는 마당에 어떻게 사람이 오늘 처음 만난 여자의 사정을 수 분 듣고 처방을 뚝딱 내려 환자를 낫게 할 수가 있겠는가







결국 수년간 쌓아 온 데이터를 통한 확률 높이기의 일환일 텐데 물론 뇌과학 같은 분야는 좀 더 내 취향에 맞아 좀 더 논리적이거나 객관적인 결론 도출 과정 확인이 가능하다고 어디선가 들었으나 사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몇 달 사이 세상에 모든 정신과들이 담합하여 갑자기 홀연히 없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 나중에 정 안되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땐 받더라도 우선은 그간 가장 만만하고 편하니까 정신없고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엄마로서 딸로서 부인으로서 며느리로서 쳐내야만 하는 상황에 그때그때 대처하느라 그저 가끔 징징거려도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라고 등짝을 때려가며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기만 했던 '나라는 불쌍한 몸뚱이'를 일으켜 세워 제대로 한 번 그 아이의 말을 좀 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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