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 먹도록, 그는 지치고 나는 미치고
함께하는 여행은,
마음과 취향이 맞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번 강릉 여름휴가에서 알았다.
진짜 맞추기 어려운 건,
시간을 쓰는 속도였다.
그리고 그 속도는,
결국 협상의 문제였다.
강릉 휴가 전날, 포돌이가 말했다.
“양평 갔다가 내일 아침에 강릉 가자.”
“왜?”
“막히니까.”
“그래.”
실컷 준비 다 하고 났더니,
그는 태연하게 말을 바꿨다.
“에잇 귀찮다, 그냥 내일 가자.”
“…..”
다음 날 아침,
‘출발’이라는 단어만 공중에 둥둥 떠다녔다.
그의 몸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양평 가자.”
오후 다섯 시가 다 돼서야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에이, 그냥 강릉으로 바로 가자!”
으아, 내 인내심 살려~~~~
어? 그런데 길이 뻥 뚫렸다.
넓은 도로에 우리만 달리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포돌이는 시간을 흘려보낸 게 아니라,
시간 속에서 길을 읽고 있었던 거다.
“안 막히는 타이밍 기다리는 중이야.”
그 한마디만 미리 했더라면,
나는 그사이 딴짓이라도 하면서 기다렸을 텐데.
“뭐 먹을래?”
“어제 유튜브 보여준 데 거기 가자.”
“어디지?”
“여고시절분식인가.”
몇 분 뒤 또 묻는다.
“어디 갈까?”
“아까 말했잖아. 가기 싫음 다른 데 가든가.”
출발하면서도 또 묻는다.
“뭐 먹을까?”
이쯤 되니 결론이 났다.
‘아, 가기 싫구나.’
짜증 게이지가 폭발 직전이었다.
“가기 싫으면 가고 싶은 데 찾아서 가!”
내가 날카롭게 내뱉자,
그는 왜 짜증이냐며 되묻는다.
아무 데나 가라고 하고 눈을 감았는데,
차는 결국 여고시절분식 앞에 섰다.
문제는—오늘 휴무.
우리는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싸움과 웃음이 붙어 다니는 건,
포돌이와 나의 묘한 리듬이다.
그리고 그제야 들은 진실.
그가 반복해서 묻던 건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여고시절’인지 ‘빙그레’인지
확인하려고 그랬댄다.
(난 빙그레가 있는줄도 몰랐는데….;;;)
나는 그걸 ‘대답 회피’로 읽었고,
그는 ‘정보 확인’ 중이었다.
같은 말도 이유를 덧붙이지 않으면 오해가 된다.
“파라솔 빌려야 하지 않아?”
“필요 없어.”
“의자 가져갈까?”
“필요 없어.”
“뭐 먹으려면 테이블 있어야 하지 않나?”
“필요 없어.”
“왜 이렇게 다 필요 없다는 거야?”
“어차피 10분 안 돼서 ‘가자’ 할 거잖아.”
“나? 2시간 있을 거거등???!!!!!“
그리고 정확히 10분 후—
“우리 이제 가자.”
생각보다 너무 짠 바다.
달라붙는 모래의 언짢은 촉감.
포돌이는 나를 너무나 잘 알았던 거다.
빈손이었기에 가벼웠고,
가벼웠기에 웃으며 떠날 수 있었다.
이번엔 포돌이가 옳았다.
강릉의 여름은 뜨거웠고,
차 안의 공기는 더 뜨거웠다.
작은 걸로 웃고, 작은 걸로 삐지고
여행이란 원래 그런 거더라.
예전의 나는 여행 중에 싸운 적이 없었다.
싸움이 없었던 게 아니라,
싸움을 피했던 게 맞다.
지금의 나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싸우지 않는 관계보다,
싸워도 금세 회복되는 관계가
더 단단하다는 걸 포돌이를 통해 배웠다.
그래서 이제는?
포돌이와 맘 놓고 싸운다.
실컷 부딪히다가도 “뭐 먹을래?” 묻고,
“이거 먹자” 하며 같은 그릇을 나누는
우리가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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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만 말해줬음 됐잖아.”
그는 나의 계획에 지치고,
“그걸 꼭 미리 정해야 해?”
나는 그의 즉흥에 미친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단순히 속도 차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서로의 이유를 미리 꺼내놓고,
중간에서 만나는 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을 알차게 채워야 마음이 놓이고,
그는 시간을 가볍게 흘려보내야 숨이 트인다.
누구는 시간을 비우고,
누구는 시간을 채운다.
함께 한다는 건
그 채움과 비움의 균형을
평생 조율하는 일이다.
언젠가 이 여름을 떠올리면
길 위의 정적과 바다의 짧은 추억,
그리고 싸움 뒤에 따라온 웃음까지
모두 뜨겁게 기억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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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마더의 회피형 연애 꿀팁
경윤아,
여행에서 싸움이 나는 건
대부분 ‘속도’가 안 맞아서야.
그런데 속도를 맞춘다는 건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게 아니야.
서로의 이유를 꺼내놓고,
방식을 설명해야 ‘협상’이 되지.
이건 연애뿐 아니라 평생 쓸 협상 스킬이야.
회피형은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말보다 타이밍을 믿는 거다.
그러니 “왜 안 가?” 대신
“몇 시에 갈 거야?”를 물어봐.
그때까지는 네 할 일 하면서 기다려.
그리고 표정만 보고 짐작하지 말고,
“먹기 싫어서 그래?”라고
이유를 직접 물어봐.
속도는 맞추는 게 아니라,
중간에서 만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그 중간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거란걸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