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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09. 2024

5장. 세손강서원

 세손의 조강을 위해 도윤이 입궁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궁 일대가 소란스러웠다. 그의 잘생긴 얼굴을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몰려든 궁녀들 때문이었다. 나이 지긋한 상궁들이 아무리 불호령을 내려도 소용이 없었다. 궁녀들은 없던 일도 억지로 만들어내어 근처를 서성거리거나, 몰래 숨어서 도윤의 얼굴을 훔쳐보기 일쑤였다. 심지어 내관들도 도윤의 수려함에 넋을 놓을 지경이었으니 나이 어린 궁녀들의 설렘이야 말해 무얼 할까……?

 하지만 도윤은 그런 궁녀들에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곧장 세손이 기다리고 있는 강서원으로 향하는 도윤의 등 뒤로, 궁녀들의 하릴없는 탄식이 이어졌다.      

 “세손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스승님. 제가 스승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송구합니다, 각하. 옥구현에서 일이 지체되어 각하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스승님이 이리 무탈히 돌아오셨으니 되었습니다. 스승님이 안 계신 동안 다른 대신들의 따분한 강연만 듣느라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소신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학식이 뛰어나신 분들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손은 늘 겸양하며 자신을 낮추는 스승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문득 도윤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사헌부 정육품 감찰인 도윤이 처음 강서원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세손은 임금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장원 급제자였다고는 해도 자신의 스승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데다 강서원에 정식으로 속한 관원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첫 조강 시간이 끝났을 때는 이미 도윤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 뒤였다. 세손이 고루한 대신들의 강연에 갑갑함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임금은 수재로 명성이 자자한 데다 나이도 젊은 도윤을 세손의 스승으로 들인다면 좋은 자극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그 판단은 정확히 적중했다.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한 데다 일부러 고약한 질문만 해댔건만 어떤 질문을 해도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는 박식함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까지… 도윤은 세손이 그리는 이상적인 스승, 딱 그 자체였다.      

 학문의 깊이만으로도 놀라운데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 있는 모습에 용모는 또 어찌나 수려한지......  이 젊은 스승에게 흠뻑 빠진 세손은 도윤이 조강만 맡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게다가 그마저도 도윤이 규찰 업무로 지방에 가 있을 때는 다른 강서원 관원이 대신하는지라, 늘 가뭄에 단비처럼 도윤의 조강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세손은 오랜만에 보는 아끼는 신하이자 스승인 도윤이 너무도 반가워 한참 동안이나 그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긴 시간 타지에서 고생한 티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어찌 그 수척함마저 잘생겨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손은 새삼 이 잘난 사내가 과연 어떤 여인을 부인으로 맞을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요즘 궐 안팎으로 스승님의 혼사에 관한 이야기가 떠들썩하던데 제게도 좀 들려주십시오.”     

 조강을 시작하기 위해 서책을 펼치던 도윤은 별안간 세손이 자신의 혼사 얘기를 물어 오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할바마마도 스승님의 혼사에 기대가 크시단 말을 들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듣기로는 이판 대감이 눈여겨보고 있는 규수가 있다 하던데, 혹... 그 규수가 예판 대감의 둘째 여식이 맞습니까?"     

 일개 신하인 자신의 혼사에 어찌 일국의 왕과 세손까지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하지만 궁금한 것은 꼭 알아내야 하는 세손의 성정을 알기에 잠시 서탁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소신은 예판 대감의 여식과 혼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듣기로는 가문도 훌륭하지만 미모도 빼어나고 제법 학식까지 갖춘 여인이라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소신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아니, 스승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런데 어찌 여태껏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겁니까?"     

 한양 도성 안에서 자신의 스승을 사윗감으로 마다할 집안이 있을 리가 없기에 세손은 도윤의 말이 의아하기만 했다.      

 "……."     

 서연의 일을 가볍게 말하고 싶지 않은 도윤이었지만 세손이 저렇게까지 물어 오니 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스승이셨던 대제학께서 살아계실 때 집안끼리 정혼을 한 사이입니다. 비록 스승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여인이 제 정혼녀란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손도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긴 했지만 설마 집안이 몰락한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려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냥 뜬소문 정도로 치부했었다.     

 "스승님의 혼사는 스승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몰락한 가문의 여인과 혼인을 한다면 훗날 영상과 맞서게 될 때 스승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홀로 정쟁에 휩쓸리게 된다면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손의 눈빛에서 아끼는 신하를 위하는 진심이 느껴져 도윤은 세손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신이 어찌 혼자입니까? 제 아비도 있고, 벗인 정언도 있고, 또 이리 소신을 걱정해 주시는 세손 각하도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예판 대감은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영상의 편으로 돌아설 만큼 편협한 분이 아니십니다."     

 "허나 영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자를 상대하려면 더욱 많은 힘이 필요하단 걸 스승님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판 대감의 여식과 혼인을 한다면, 비단 예판뿐 아니라 그 일가친척들도 스승님에게 힘을 실어줄 것입니다."     

 얘기가 길어지자 도윤은 아무래도 오늘은 이 주제로 강연을 이끌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세를 고쳐 잡고 올곧은 시선으로 세손을 바라보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불환인지불지기 환기불능야(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라 하였습니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는 뜻이지요. 소신이 능력이 있으면 뜻을 같이하고자 하는 이들이 소신을 믿고 함께할 것입니다. 만약 따르는 이가 없다면 그것은 소신이 부족해서이지 처가의 힘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소신은 혼사를 통해 파벌을 형성하고, 그 힘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힘은 정세가 변하는 순간, 언제라도 흩어질 수 있는 덧없는 모래알 같은 힘일 뿐입니다. 소신은 소신의 능력만으로도 영상과 대적할 자신이 있습니다. 각하가 보시기에 소신의 역량이 그리도 미덥지 못하십니까?"     

 "하지만 전(前) 대제학도 능력이 부족해 그리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손의 입에서 스승의 일이 거론되자 도윤은 아픈 기억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이 그리되신 것은 스승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처가의 힘이 미약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을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스승님처럼 어질고 의로우리라 믿으셨던 게지요. 영상이 역모죄를 뒤집어씌우리라고는 의심조차 해보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소신은 스승님과는 다릅니다. 악한 이들까지 품어줄 생각은 없습니다. 벌할 것은 반드시 벌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도윤의 모습에, 세손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분명 쉽지 않은 길이란 걸 아는데도 허튼 말을 하지 않는 도윤의 성정을 알기에 그의 말은 신뢰가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제 스승의 능력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찌 스승님의 역량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님의 뜻이 그리 확고하니,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신의 뜻을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이 이렇게까지 깊게 마음을 준 여인이라니……. 어떤 여인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주위에서 빼어나다고 늘 추어올리니 오만방자하여 모든 것에 무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일깨워주고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게 해 준 여인입니다. 그 여인이 있어 지금의 소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前) 대제학 대감의 여식이라면 분명 평범한 여인은 아닐 듯합니다. 스승님을 일깨워줄 정도라니 그 아비를 닮아 무척 총명한가 봅니다."     

 아름답다거나 성품이 곱다거나 하는 그런 흔한 이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까지 거론하는 사랑이라니……. 세손은 스승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그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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