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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06. 2024

4장. 아버지의 반대와 어머니의 지지

 "늦었구나."   

 비록 자신의 청에 응해서는 아니었지만, 서연과 함께 단오를 보낼 수 있단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도윤은 사랑채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한석이 대청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시간이 늦어 내일 아침 일찍 문안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네 어미도 계속 너를 기다리고 있는 걸 내가 안채로 돌려보냈다. 무슨 용무가 그리 바빠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 밖으로 나간 게냐?"

 "송구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궐에서 잠깐 얼굴을 본 것을 제외하면 넉 달 만에 제대로 보는 아들의 얼굴이었다. 아들의 얼굴은 여전히 수려했지만 타지 생활이 편치만은 않았던지 얼굴이 조금 상한 듯도 하였다. 심지어 다치기까지 한 것인지 도포 자락 아래로 언뜻 상처를 동여맨 듯한 흰 천이 보였다. 한석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디 보자, 다치기라도 한 게냐? 상처가 깊지는 않은 것이냐?"

 "가벼운 상처일 뿐 걱정하실만한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솜씨 좋은 이가 잘 치료해주어 괜찮습니다."   

  언젠가부터 아들은 상처를 입으면 바로 의원에 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먼저 치료를 받고 오곤 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한석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석은 한숨을 내쉬며 아들을 다그쳤다.  

 "또 그 아이에게 다녀오는 길이더냐? 부모보다 먼저 찾을 만큼 그 아이가 그리도 네게 중요한 사람이더냐?"   "소자의 정혼녀입니다. 당연히 제게 중한 사람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들려오는 도윤의 대답에 한석은 머리가 아파 왔다. 기실 한석도 서연 자체가 탐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서연 하나만 놓고 본다면 고운 성품, 빼어난 미모에 지혜롭기까지 하니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훌륭한 며느릿감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몰락한 가문의 여식인 서연과 혼인한다면 훗날 미약한 처가가 아들에게 독이 될 수도 있었다.같은 노론임에도 사사건건 영의정 김영환과 부딪히고 있는 아들이었다. 아직은 영환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진 않으나, 아들이 제게 위협이 된다는 생각이 들면 온갖 권모술수로 아들을 무너뜨리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옛날 대제학에게 그랬던 것처럼 …….   

 자신은 당시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터라 정쟁을 피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제학은 끝까지 영의정과 맞서다 끝내는 역모라는 누명을 쓰고 한순간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아들은 아비인 저보다도 스승인 민성렬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 곧고 강직한 성품이 언젠가는 영환을 자극할 것이 분명했다. 노론의 거두인 영의정을 상대하려면 자신과 아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 만한 가문의 여식과 혼인을 하는 것이 아들의 장래를 위한 길일 터였다. 한석도 서연의 처지가 안타깝긴 했으나 감정에 휩쓸려 아들이 위험한 길을 가려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곧 예판 대감과 정식으로 혼담을 논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아버지! 소자는 이미 서연 낭자와 정혼한 사이입니다. 어찌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어릴 때 오간 이야기였을 뿐, 네가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아이도 너와 같은 생각이더냐?"     

 "……. "     

 한석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현명한 아이니 당연히 아들과의 혼사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이만 물러가 보거라. 네 어미에게도 잠시 들러 인사라도 드리고."     

 도윤은 아버지의 마지막 질문에 답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사랑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서연의 생각……. 세상의 시선도, 아버지의 반대도 두렵지 않은 도윤이었다. 하지만 서연의 마음을 얻지 못한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윤이 왔니?"     

 답답한 마음을 누르며 안채로 들어서자 어머니 윤화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온화했으나, 아들의 다친 팔을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란 얼굴로 상처부터 살폈다.     

 "많이 다치진 않았니? 어찌 이리 자주 다쳐오는 게야……. 내 요즘은 네게 검술을 배우도록 한 네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단다."     

 "검술을 익힌 덕에 이만한 상처로 끝나는 건지도 모릅니다. 문관이라 하여 검을 쓸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릇 사내라 하면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미로선 아들이 다쳐오는 일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한숨을 지으며 도윤의 팔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윤화가 안심한 표정으로 팔을 다시 놓아주었다.     

 "서연이에게 다녀오는 길이구나……. 이리 야무진 솜씨로 상처를 동여매다니, 이젠 웬만한 의원보다 서연이 실력이 낫겠구나."     

 "송구합니다. 소자,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출타하였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몇 달이나 한양을 떠나 있었는데, 네 마음이 오죽했을까? 이 어미야 네 아버지가 곁에 계시니 네가 안심하고 있는 게고, 응당 서연이부터 찾는 게 당연하지……. 어미는 윤이 네 마음 다 아니 괘념치 말거라."     

 한석이 아들의 장래를 걱정해 서연과의 혼사를 반대하는 것과 달리, 윤화는 아들의 연정을 지지했다. 윤화 또한 아들이 서연과 혼인할 경우 겪게 될 위험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서연이 어떤 존재인지, 아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깊은지 너무도 잘 알기에 자신마저 아들의 사랑을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하루빨리 대제학의 신분이 복권되어서 아들이 서연과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 건데, 서연이가 조금은 반겨주었더냐?"     

 "아직은 갈 길이 먼 듯합니다……. 소자가 여인의 마음을 얻는 데는 영 소질이 없나 봅니다."     

 "서연이도 윤이 너를 그리 대하는 게 편치는 않을 게다. 너를 위해서 부러 그럴 수밖에 없을 거란다. 아픔이 많은 아이니, 네가 곁에서 지켜주고 아껴주려무나……."     

 어미로서 제 아들을 냉대하는 서연이 야속하기도 할 법한데, 윤화는 오히려 늘 서연의 마음을 헤아려주고자 했다. 사모(母)이 살아계셨더라면, 서연도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살았을 거란 생각에 혼자 남겨진 서연이 더욱 애틋하고 안타까웠다. 아들의 쓸쓸한 눈빛을 읽었는지 윤화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참, 휘는 만났니? 네가 돌아왔단 소식을 듣곤 집으로 찾아왔더구나."     

 "예, 만났습니다. 안 그래도 때마침 휘가 서연 낭자의 집에 방문한 덕에 이번 단오를 서연낭자와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청했을 땐 거절하더니 휘가 기지를 발휘해 서연 낭자의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래? 과연 휘답구나. 그 아이는 어쩜 그렇게 여인의 마음을 잘 아는지……. 휘 덕분에 우리 윤이와 서연이가 함께 단오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니, 이리 고마울 데가 있나…….”     

 윤화는 문득 서연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아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라버니를 설득해 주십시오. 저희 집안과 혼약을 유지하는 것이 오라버니에게 아무런 득이 되질 않습니다. 부디 오라버니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가문의 여식과 혼인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지금껏 베풀어 주신 은혜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염치없는 줄은 알지만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만, 주시는 양식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제 곁에 남은 유모마저 굶길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외의 것은 부디 모른 척 해주십시오. 낡은 의복을 입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저 여인 둘이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이면 충분합니다."]     

 비록 서연의 부탁 때문이긴 했지만 고운 옷 한 벌 제대로 지어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윤화였다. 하지만 집 안이 망한 뒤, 처음으로 서연이 단오맞이 구경을 하러 밖에 나가는 것이었다. 제 어미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곱게 딸아이를 치장해 주고 싶었을까? 윤화는 이번 만큼은 꼭 벗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서연의 옷을 지어주고 싶었다.      

 "서연이가 단옷날 바깥 구경을 하러 나가는 게 몇 년만의 일이더냐……. 이 어미 마음이 다 벅차는 구나. 가만있자……. 내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서연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야겠구나. 윤이 너는 이 어미만 믿고 있으렴."     

 윤화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요즘 한양 도성 안에서 가장 바느질 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난침모(자기 집에 살면서 남의 바느질을 도맡아 하는 침모), 덕구 어멈을 불러들여야겠다 생각했다. 서연에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옷감을 직접 골라 누구라도 탐낼 만한 고운 옷을 지어 주리라……. 윤화는 함께 서 있기만 해도 그림처럼 잘 어울릴 두 사람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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