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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05. 2024

3장. 휘의 기지

 "서연아, 잘 있었느냐? 윤이 자네도 오랜만이네 그려"

 어떻게 해야 서연을 설득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던 도윤은 별안간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가 선명한 자줏빛 도포와 화려한 수정 갓끈이 썩 잘 어울리는 선비 하나가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워낙에 준수한 얼굴 덕에 눈에 띄는 차림새가 전혀 과해 보이지 않는 선비였다.

 "내 그러잖아도 자네가 여기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랬군. 전라도에서 넉 달이나 있다 한양에 올라왔는데 집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여기와 있으니 서연이가 반겨줄 리가 있나? 게다가 그 팔은 또 뭔가? 제발 조심 좀 하게. 이리 자꾸 다쳐오면 내 마음이 아프지 않은가?"

 옆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도윤의 팔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너스레를 떠는 이는 도윤의 오랜 벗인 정언(正言: 사간원의 정육품에 속하는 벼슬), 김휘였다. 홍문관 대제학에게 수학하던 시절 도윤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휘는 도윤보다 훨씬 먼저 서연의 집안과 왕래가 있었다. 그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서연이 친 오라비처럼 잘 따르는 사이였다. 서연은 집안이 망한 뒤 도윤과는 거리를 두며 더 이상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일도 없었으나 휘와는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오고 있었다.

 "휘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우리 서연이는 그새 더 고와졌구나. 영주댁 말이 요즘 무언갈 배운다고 바쁘다던데 뭔가 재미있는 게 있으면 나도 같이하자꾸나."

 "후훗, 아직은 오라버니께 말씀드리고 할 만한 단계는 아닙니다. 좀 더 시일이 지나고 나서 말씀드릴게요."

 자신에게는 그리도 어려운 저 웃음이 휘에게는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인지...... 휘와 서연을 바라보는 도윤의 미간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두 사람이 오누이 같은 사이라고는 해도 저리도 다정한 모습을 보면 투기하는 마음이 솟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이번 규찰 일이 꽤 힘들었나 보군. 얼굴빛이 영 안 좋아."

 "……."

 휘는 도윤의 마음을 다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딴소리를 했다.

 "서연아, 호박 식혜 한 잔만 가져다주겠느냐? 지난번에 들렀을 때, 영주댁이 내온 그 식혜 맛이 아주 일품이더구나."

 "네, 오라버니. 천천히 말씀 나누고 계세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는 서연의 뒷모습에서 눈이 떨어질 줄 모르는 도윤을 보며 휘가 혀를 찼다.

 "쯧쯧, 조선 최고의 수재라는 자네가 어찌 그리 여인의 마음은 모르는가?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면 어느 여인이 좋아하겠는가? 자고로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하거늘 자네는 여인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

 "자네처럼 모든 여인의 마음을 다 얻고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네. 난 한 사람의 마음만 있으면 되네."

 "아, 그 서연이의 마음 하나를 못 얻고 있지 않은가?"

 "……."

 "자네가 어디 필부(匹夫)인가? 한양 사대부 가문이라면 전부 다 자네를 사위 삼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고 조정에서도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이 늘 화제이거늘, 그런 자네가 자신만 보고 있으니 서연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담스럽겠나? 자네 마음은 알겠네만 그럴 때일수록 천천히 돌아가는 전략이 필요하네. 잘해주다가도 무심한 척도 좀 하고, 소식도 좀 없고, 자네가 없으면 안 되게끔 서서히 다가가야지. 자네는 직진도 너무 직진일세."

 도윤은 휘의 말이 답답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모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게 도대체 무엇이 죄란 말인가? 하물며 저렇게 자신을 내치는 서연에게 도리어 무심하게 대한다? 도윤으로선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아니,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옥구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자네에게 상처까지 입힐 정도면 그쪽도 보통이 아닌 듯하니 조심하게나."

 옥구현은 전라도 규찰지 중 가장 마지막 지역이었다. 그곳의 현감이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물을 빼돌린 것이 적발되어 옥구현에서의 일정이 길어지게 된 것이었다.

 "현감을 한양으로 압송하고 난 뒤 그의 아들이 도망간 것을 알게 되었네. 한양으로 올라오기 직전 현감의 아들의 행적을 알고 있단 자가 있다 하여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그곳에는 무장한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네. 옥구현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네. 죄인의 아들을 잡아들이려는 관리를 해하려 하다니… 그자가 잡혀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단 거겠지. 새로 부임한 현감을 규찰하기 위해 옥구현에 다시 내려가 봐야 하네. 그때 도망간 현감의 아들의 행적도 알아볼 생각이네."

 "무언가 냄새가 나긴 하는군. 그나저나 자네가 또 한양을 떠나 있어야 하니 그전에 서연이랑 단오라도 같이 보내고 싶은 거로군. 우리 서연이가 '제가 왜 나리와 거길 갑니까?' 이 말을 하는 순간, 딱! 내가 집 안으로 들어왔지 뭔가, 하하!"

 도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박장대소를 하는 휘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휘는 아무래도 자신이 서연에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도승지 김학균 대감은 성미가 대쪽 같고 근엄하기로 유명한데, 그 아들인 휘는 어찌 이리 가볍고 농을 즐기는 것인지……. 가끔은 자신이 어쩌다 휘와 벗이 된 것인지 스스로도 의아할 때가 있었다.

 "염려 말게나, 내가 누군가? 내 비록 과거시험은 자네에게 밀려 아원(亞元)에 그쳤지만 여인의 마음에 대해서만큼은 장원(壯元)일세. 내 특별히 자네를 도와주도록 하지."

 휘는 도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마침 호박 식혜를 가지고 들어오던 서연에게 다가섰다.

 "서연아, 이 오라비가 네게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느냐?"

 "오라버니가 제게 부탁을 다 하시고… 무슨 긴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릴 테니, 말씀해 보십시오."

 "나도 이제 혼기가 꽉 차다 보니 언제까지 혼사를 미룰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혼인하고 나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을 터, 앞으로 우리 세 사람이 이렇게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영……. "

 물기 어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숙이는 휘의 모습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평소 워낙에 장난기가 많은 휘인지라 좀 미심쩍긴 했지만 두 사람이 혼례를 치를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단 것은 서연도 잘 알고 있었다.

 올해 스물둘이 된 휘와 도윤은 끊임없이 혼처가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휘는 좀 더 자유를 즐기고 싶단 이유로 혼사를 미루고 있었고, 도윤이야 서연만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혼기를 훌쩍 넘겨 버렸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집안 어른들의 뜻을 거스를 순 없기에 두 사람 다 머지않아 혼사를 치러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단옷날에는 셋이 함께 추억이라도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 셋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단오가 될지도 모르는데……. 운종가에 나가서 거리 구경도 하고, 또 오랜만에 서연이 네가 그네 뛰는 모습도 보고 싶구나. 어떠냐?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느냐?"

 들뜬 휘의 목소리에 서연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명절날의 흥겨운 분위기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서연도 여느 규수들처럼 고운 옷을 차려입고 남부럽지 않게 명절을 보내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옛일일 뿐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가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집안이 망한 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기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서연의 마음을 눈치챈 휘가 다시 한번 서연을 설득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많을 때 나가면 인파에 묻혀 눈에 잘 띄지도 않을 게다. 사람들 속에 섞여 우리도 이런저런 구경을 하며 단오를 즐기고 오자꾸나."

 평소 무언가를 해주면 해주었지 부탁하는 일이라곤 없는 휘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서연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연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휘는 곁으로 다가가 특유의 미소를 흘리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서연아,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우리 셋이 단옷날을 함께 보낼 수 있겠느냐? 이 오라비의 소원 한 번 들어준다 생각하고 함께 나가보자꾸나, 응?"

 '휘 오라버니가 저렇게까지 부탁을 해오는데 계속 거절할 수도 없고...... 도윤 오라버니와 단둘이 가는 게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서연은 어쩌면 셋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번 단오를 두 사람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하고 승낙의 뜻을 내비쳤다.

 "오라버니 뜻이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잠시 나갔다 오는 정도라면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청은 단칼에 거절해 버린 서연이, 휘의 청은 너무도 쉽게 수락하자 도윤은 한편으론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가자고 할 땐 안 된다고 하더니, 휘에게는 어찌 그리 쉽게 수락하는 게요?"

 "그야 휘 오라버니는 누구처럼 제게 혼인하자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 항상 휘 오라버니는 편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만약 휘가 그대에게 혼인하자고 했으면, 내가 살려두지 않았을 게요."

 "하, 하……. 이 친구 참, 농 한번 살벌하게 하는군."

 자신을 향한 도윤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며, 새삼 서연을 누이로만 생각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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