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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04. 2024

2장. 직진 선비의 정석

 10년 뒤 한양.

 목멱산 아래 위치한 남촌의 한적한 마을.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기운마저 감도는 대문 앞에 한 선비가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선비가 입고 있는 청색의 도포는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했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생긴 선비의 인물 덕에 평범한 차림새마저 돋보이는 듯하였다.

 짙은 눈썹에 깊고 검은 눈매와 시원한 콧날, 그린 듯한 붉은 입술까지… 참으로 수려하기가 이를 데 없는 선비였다. 선비의 이름은 이도윤, 올해 스물둘이 된 사헌부의 정육품 감찰(監察)이었다.

 "영주댁, 있는가?"

 "아이고, 도련님! 아니, 감찰 나리! 전라도 규찰은 무사히 다녀오신 게지요?"

 "자네 덕분에 무탈히 다녀왔다네."

 "넉 달이나 못 뵙다가 나리를 뵈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나리가 들르시지 않으니 집안이 어찌나 썰렁하던지……. 아이고, 쇤네가 주책입니다. 감찰 나리가 얼마나 바쁘신데 집에 자주 들러주시지 않는다고 푸념이나 늘어놓다니……."

 "아닐세. 늘 이렇게 환대해 주는 자네 덕에 내가 이리 드나들 수 있는 걸세.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그리고, 나는 자네가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다네. 그러니 집안에서라도 편히 부르게."

 영주댁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도윤은 누군가를 찾는 듯 집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영주댁이 눈치 빠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곧 서연 아씨도 돌아오실 거니 편히 앉아 쉬고 계세요, 도련님. 지난번 가져다주신 호박으로 만든 식혜 맛이 아주 기가 막힌답니다. 쇤네가 얼른 한 그릇 떠오겠습니다. “

 급히 사라지는 영주댁의 뒷모습을 보며 도윤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눌러보았다. 이 집의 주인이 영주댁의 반만이라도 자신을 반겨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은 단 한 번의 웃음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서연이 야속하기는커녕 그립기만 한 도윤이었다.

 "하……. 이쯤 되면 나도 중증인가……."

 도윤은 스스로의 모습이 답답해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끼익…….

 하지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걸음에 앞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문 안으로 들어서던 서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도윤의 모습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쌀쌀맞은 표정으로 도윤을 지나쳤다.

 "잘 다녀왔냐는 인사조차 해주지 않는 게요? 일에 차질이 생겨 생각보다 많이 늦어졌소. 최대한 빨리 돌아오려고 서둘렀는데, 혹 내 걱정은 하지 않았소?"

 "……."

 "유시(酉時: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가 다 되어 가는데 어딜 다녀오는 게요? 다음부턴 혼자 다니지 말고 꼭 영주댁과 함께……."

 도윤의 물음에도 묵묵부답 별채로 걸음을 옮기던 서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도윤을 다그쳤다.

 "퇴청하시자마자 바로 이리로 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렇소. 그대가 걱정되어 집에 들러 환복만 하고 오는 길이오. “

 "긴 시간을 타지에 있다 돌아오셨으면 마땅히 댁에 머물며 부모님을 먼저 뵈셔야지요. 이판 대감과 대부인께서 어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제야 자신과 눈을 맞추어 준다 생각했는데, 서연의 눈빛에서는 자신을 향한 그리움이나 반가움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늘 겪고 있는 냉대였다. 하지만 이번은 꽤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기에 조금은 자신이 그립지 않았을까 기대했던 도윤은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어머님은 예판 대감 댁에 가셨다고 들었고, 아버님은 이미 궐에서 뵈었소. 두 분은 이따 저녁에 뵙고 얘기를 나눠도 되지 않겠소?"

 먼 길을 다녀오는 사람에게 이리 쌀쌀맞은 말만 골라하는 서연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하지만 이조판서 이한석의 아들, 이도윤이 누구인가? 문과에 최연소 장원급제를 한 것은 물론이고 청요직이라 불리는 사헌부의 관원으로서, 조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출중한 인재가 아니던가?

 게다가 강서원에서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세손의 스승이기도 했다. 세손이 이 젊고 유능한 스승을 얼마나 따르는지 궐 안팎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디 능력만 출중한가? 한양 최고 미인이었던 이판 부인의 미모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내치고는 지나치게 고울 정도로 외모가 아름다웠고, 체격은 또 아비를 닮아 육 척(六尺:일척은 약 30.3cm)이 훌쩍 넘는 훤훤장부였다. 가히 한양 최고, 아니 조선 최고의 신랑감으로 모든 사대부가에서 탐내는 사윗감이 아니던가?

 그에 반해 자신은 역모에 휩쓸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버린 그저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일 뿐이었다. 비록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은 벗었지만 아비의 관직은 여전히 박탈당한 채였고, 설상가상으로 아비와 어미 모두 역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제 서연에게 남겨진 것은 규모만 예전 그대로인 허름한 저택과 유모인 영주댁이 전부였다.

 아무리 어린 시절 정혼한 사이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아비가 홍문관 대제학이었을 때 얘기고,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는데도 변함없이 자신을 정혼자처럼 대하는 도윤이 너무도 불편한 서연이었다. 서연은 도윤의 앞날을 위해 혼약을 없던 일로 하고자 하였으나 도윤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도윤을 냉대할 수밖에 없는 서연은 오늘도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차가운 얼굴로 도윤을 대할 뿐이었다.

 "제가 무탈한 걸 확인하셨으면 이제 그만 댁으로 돌아가시지요. 넉넉지 않은 살림에 나리까지 거드시면 집안 곡식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자리를 뜰 기색이 보이지 않는 도윤을 보며 서연은 그를 돌려보내고자 궁색한 변명을 찾았다.

 "내 그 정도로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오. 아까 돌쇠가 곳간을 채워 두었을 테니, 오늘 저녁은 여기서 신세를 좀 지겠소."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호박 식혜를 들고 왔다 두 사람의 눈치만 보던 영주댁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씨! 도련님이 곳간에 양식을 채워 주셨는데, 이대로 그냥 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랜만에 오시는 건데 제가 솜씨 한 번 발휘하게 해 주세요, 네?"

 "……."

 영주댁이 간곡하게 부탁하자 서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평소 도윤의 성품은 냉철하면 냉철했지 가라고 떠미는 데도 버티고 설만큼 뻔뻔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거늘 자신에게만 오면 어찌 저리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인지...... 서연은 한숨을 내쉬며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긋 웃음을 짓고 있는 도윤을 쳐다보았다.

 넉 달 만에 전라도에서 올라온 도윤은 그간 일이 많이 고단했던지 얼굴이 좀 상해 있었다. 햇빛에 많이 그을린 것도 같고, 팔에 상처도… 상처? 말없이 도윤을 훑어보던 서연은 도포 자락에 스며든 핏자국을 발견하곤 도윤의 팔을 낚아챘다.

 "다치셨습니까?"

 재빠르게 도포 자락을 걷어 올리니 대충 묶어둔 헝겊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얼른 헝겊을 풀어 상처를 확인한 서연의 눈이 커졌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고 제대로 치료도 하지 않고 이 상태로 자신의 집으로 곧장 왔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아니, 상처를 입었으면 의원에 가서 치료부터 해야지 그냥 여길 오시면 어떡합니까? 나리 몸은 도대체 무슨 죄입니까? 주인을 잘못 만나 이리 고생을 하다니……."

 서연은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 구급약이 담긴 상자를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서 건율(乾栗)을 꺼낸 서연은 그것을 곱게 빻아 가루를 낸 뒤, 물에 개어 도윤의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쌀쌀맞은 말투와는 달리 상처를 치료하는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서연이 냉정하지 않은 유일한 순간... 그것은 바로 자신이 다쳤을 때임을 알기에 언젠가부터 도윤은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은 이상은 의원보다 서연을 먼저 찾곤 했다. 종종 도윤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서연의 솜씨는 일취월장해 이제는 어설픈 의원보다 실력이 더 나을 때도 많았다.

 도윤의 상처에 속상한 마음을 그대로 내비치던 서연은, 상처를 깨끗한 천으로 꼼꼼히 동여매고 난 뒤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갔다.

 "지혈에 좋은 건율 가루로 처치를 하긴 했으나 수일 내 꼭 의원에 가셔서 제대로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계피차가 염증에 좋으니 의원에 가시면 그것도 달라고 하세요. 귀찮더라도 아침저녁으로 꼭 차로 우려 드시고……. 제가 돌쇠에게 일러두겠습니다."

 도윤은 좀 전까지 자신의 팔에 닿아 있던 서연의 온기가 아쉬워 다친 게 차라리 양팔이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자신이 다치면 저리 걱정을 해주니 서연의 마음에 자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리라.

 "이레 뒤가 단오인데 함께 광통교에 나가 단오맞이 구경이라도 하지 않겠소?

 "제가 왜 나리와 거길 갑니까? 정무가 바쁘신 분이 명절을 즐길 시간은 되시나 봅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시면 상처가 덧나지 않게 댁에서 요양부터 하세요."

 역시나 서연이 한 번에 자신의 청을 수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명절 때마다 지방에 규찰을 가 있었던 도윤은 이번만큼은 꼭 서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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