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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03. 2024

1장. 첫만남

 청지기의 안내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낯선 대문을 들어선 순간, 도윤을 맞은 것은 하얀 얼굴에 복숭앗빛 볼을 한 작은 여자아이였다. 먼저 사랑채로 들어서는 도윤의 아비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 아이는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도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라버니는 이름이 뭐야? 나는 민서연이라고 해. 천천히 서(徐)에 잇닿을 연(聯)을 쓰는 서. 연."

 자그마한 얼굴을 가득 채운 커다란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기대에 찬 눈빛을 실망시켜선 안될 것 같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나는 도윤이라고 한다, 이도윤."

 도윤의 짧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서연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 아니. 오라버니도 나처럼 답을 해주어야지. 무슨 도 자(字)를 쓰는지, 무슨 윤 자(字)를 쓰는지 제대로 알려 주어야지."

 예상치 못한 서연의 말에 당혹감이 서렸던 것도 잠시, 도윤의 얼굴이 이내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오늘 처음 본 제 이름의 뜻이 무어 그리 궁금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꼭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또다시 좀 전과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법도 도(度)에 다스릴 윤(尹)을 쓴다. 이제 되었느냐?"

 "우와... 오라버니, 얼굴만큼 이름도 멋지구나!"

 이제야 원하는 답을 들었다는 듯 서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겨우 이름 하나 알게 된 게 저렇게나 기뻐할 일이던가……. 도윤의 무심하던 눈빛이 저도 모르게 이채를 띠고 서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마저 포근한 그런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까르르 웃는 서연의 웃음소리가 도윤의 귓가를 간질였다. 봄기운을 잔뜩 머금은 듯 보드랍고 정다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아이였다.

 "나는 여태껏 휘 오라버니가 제일 잘생긴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제 보니 오라버니가 더 예쁜 것 같아. 아, 휘 오라버니가 누군고 하면 바로 우리 아버지의 수제자야. 키도 크고 엄청 재미있는 오라버니야."

 서연은 도윤의 옆으로 다가와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을 쉴 새 없이 재잘재잘 늘어놓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자마자 하늘나라로 가 버린 누이동생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이였지만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누이 생각이 나서인지 도윤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서연에게 눈길이 갔다.

 "윤이, 게 있느냐? 거기 있으면 어서 안으로 들어오너라."

 먼저 대사성의 방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아버지가 도윤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서연에게 머물던 시선을 거두고 도윤은 아버지에게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윤이 오라버니! 다음에 또 만나자! 그땐 오라버니가 먼저 ‘서연아’ 하고 불러줘야 해, 알았지?"

 서연의 낭랑한 목소리가 도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도윤이 서연을 향해 돌아서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시 보게 될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하겠다 답을 해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꼭이야! 약속했다!"

 수락의 뜻을 비치는 도윤의 모습에 신이 난 서연이 달려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도윤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작고 하얀 꽃 한 송이였다. 그러고 보니 이 집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과 같은 꽃이었다.

 "찔레꽃이야. 우리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꽃이야."

 서연은 마치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는 양 도윤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귓가를 간질이는 그 생경한 느낌에 깜짝 놀란 도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서연을 쳐다보았다.

 마침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에 하얀 꽃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꽃비가 봄빛에 내려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꽃비들 사이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서연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생각한 순간, 바람을 타고 온 찔레꽃 향기가 도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

 

"네가 이번에 새로 스승님의 제자가 되었다지? 이름이 이도윤이라고 들었는데, 맞느냐?"

 아직 퇴청하지 않은 성렬을 기다리며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따스한 햇살을 내리쬐고 있을 때였다.  도윤은 등 뒤로 들려오는 호기로운 사내아이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제 또래의 도령 하나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또 시비를 걸어오려는 건가?'

 예전에 서당을 다닐 때 숱하게 괴롭힘을 당해 본 적이 있는 도윤이었다.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시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서당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도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도윤은 이곳이 좋았고 대사성과 좀 더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제게 찔레꽃을 건네던 그 여자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상대의 이름을 묻기 전에 네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니더냐?"

 도윤이 툇마루에서 내려와 여전히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도령과 마주하고 섰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겐가…….'

 자신의 물음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저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도령의 모습에 도윤도 지지 않고 눈에 힘을 줬다.

 "내가 졌다, 인정한다. 서연이 말이 정말이었구나."

 오랜 정적을 깨고 먼저 말문을 터트린 것은 도령 쪽이었다. 도령의 입에서 나온 서연이라는 반가운 이름에 도윤도 경계를 풀고 다시 도령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내 소개가 늦었구나. 내 이름은 김휘라고 한다. 빛날 휘(輝) 자를 쓰지. 서연이가 나보다 잘생긴 녀석이 있다고 하길래, 내 믿을 수가 있어야지. 예의에 벗어나는 줄 알면서도 네 얼굴부터 살펴보았구나, 미안하다."

 김휘라면… 지난번 서연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키도 크고 엄청 재미있는 오라버니라고 하였던가? 서연이 이름을 말할 때 한자의 뜻까지 밝히는 것은 아마도 이 녀석에게 배운 것이리라…….

 "근데, 윤이 너 정말로 잘생겼구나. 인물로 누군가에게 밀려보기는 난생처음이다."

 휘는 신기한 보물을 보기라도 하는 듯 계속해서 도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뭐, 뭐 하는 게냐......"

 도윤은 어느 순간 제 코앞까지 다가온 휘의 얼굴에 흠칫 놀라 뒷걸음을 쳤다. 휘는 도윤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도윤이 물러난 거리만큼 다시 다가섰다. 다시 한번 도윤의 얼굴을 살핀 휘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제 이마를 손으로 탁 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내가 패배한 이유가 우리 아버지에게 있었구나."

 도윤은 느닷없이 제 아비를 언급하는 휘의 말이 의아하기만 했다. 게다가 무얼 겨뤄본 적도 없건만 패배라니… 첫 등장부터 요란하더니 참으로 부산스러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어머니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미인이시거든. 그런데 승지 영감을 떠올린 순간, 내 바로 깨달음을 얻었지. 이전에 네 아버지가 스승님을 찾아오셨을 때, 얼굴을 뵌 적이 있다. 같은 사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수려한 분이셨지. 그러니 윤이 네 얼굴이 나보다 잘난 것도 이해가 되는구나. 분하긴 해도 이건 뭐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지금 누구 얼굴이 더 잘났는지를 두고 혼자 겨루고 있었다는 건가? 도윤은 너무도 황당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망설여졌다. 여태껏 또래의 사내아이들은 도윤을 시기하고 괴롭히거나, 아예 다가오지 않는 부류가 다였다. 그런데 이런 녀석은 난생처음이었다. 말로는 분하다고 하면서도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얼굴은 전혀 분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이곳에 온 걸 환영한다, 이도윤.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휘는 아프지 않게 도윤의 어깨를 툭 치고선 초승달처럼 휜 두 눈 가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음이었다. 도윤에게 벗이 되고자 다가온 이는…….

 '사실은 나도 벗이 있었으면 했던 건가…….'

 어색한 표정으로 휘를 마주하고 있는 도윤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대로 벗을 사귀어 본 적이 없는 도윤에게 또래의 사내아이를 대하는 것은 그저 어렵기만 한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는 이 녀석이라면, 이리 서툴기만 한 자신이라도 벗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휘를 바라보는 도윤의 눈빛에도 어느덧 따스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앗, 뭐야! 휘 오라버니, 벌써 윤이 오라버니를 만난 거야? 어때, 내 말이 맞지?"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알아본 서연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휘가 서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서연이 말이 맞구나. 너도 윤이를 보러 오는 길이더냐?"

 "응, 윤이 오라버니가 아버지의 제자가 되기로 했단 말을 듣고, 이제나저제나 오라버니가 오는 날만을 기다렸어."

 서연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서연아……."

 도윤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을 듣는 순간, 서연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차올랐다. 도윤이 저와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 오라버니!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구나?"

 '민서연… 기억하고 말고. 이 아이는 알까? 내가 대사성 영감의 제자가 되기로 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단 걸…….'

 천천히 서(徐)에, 잇닿을 연(聯)…….  그 이름처럼 천천히 그 아이에게 잇닿게 될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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