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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10. 2024

6장. 영의정 김영환

 세손의 앞에선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지만 강서원을 나서는 도윤의 마음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연이 세간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살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굳이 서연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혼사가 자꾸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듯하여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던 도윤의 눈에 마침 초헌(軺軒)을 타고 입궐 중이던 영의정 김영환이 들어왔다. 언제 보아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행렬이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 도윤은 가벼운 목례로 예의를 표하고 그대로 지나치고자 하였으나, 영환은 가마꾼들에게 손을 들어 굳이 가마를 멈추게 하였다.     

 "이감찰, 이게 얼마 만인가? 옥구현 현감이 백성들을 수탈하고 공물을 빼돌린 것이 자네에게 적발되었다지? 그런 작은 고을에서 일어나는 부정까지 찾아내다니, 역시 대단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정중한 목소리였으나 웃음기 하나 없는 차가운 표정은 도윤이 얼마나 영환을 반기지 않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곧 자네를 사헌부 지평(持平:사헌부에 속한 정오품 벼슬)에 봉한다는 상감마마의 교지(敎旨)가 내려올 걸세. 내 미리 경축하네. 이젠 이감찰이 아니라 이지평이라고 불러야겠군, 허허."     

 "승정원에서 교지가 내려오기도 전에 함부로 상감마마의 교지에 대해 거론하시다니, 이 무슨 불충입니까? 한 나라의 정승답지 않은 경솔한 언사이십니다."     

 임금의 교지를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영환이 경솔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자신의 세가 강하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기 위함임을 도윤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임금조차 우습게 여기는 영의정의 교만한 태도에, 도윤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느라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      

 "내 자네를 아껴 미리 귀띔해 주는 것이니 너무 정색하지는 말게."     

 영환은 도윤의 차가운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역시 영의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가마를 멈추었네. 예서 나눌 만한 얘기는 아니나, 자네도 정무가 바빠 따로 시간을 내기는 힘이 들 터이니 내 간단히 말하지."     

 영환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의심스러웠지만, 정일품인 영의정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어 도윤은 일단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실은 내게 아주 참한 조카딸이 하나 있네. 재색을 겸비한 아이니 자네의 배필로 손색이 없을 걸세. 자네만 좋다면 내 자네 부친을 만나 혼사를 의논해 볼까 하는데, 어떤가? 내 집안과 혼사를 맺으면 자네에게도 득이 되리라 생각하는데."     

 "대감에게 혼기가 찬 조카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혹 올해 조카 따님의 연치가 어찌 되시는지요?"     

 "올해 열한 살이 되었네만 외양이 성숙하여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     

 "혼사를 거론하기에는 조카 따님이 너무 어리신 듯합니다. 그리 어린 신부를 내세워가면서까지 혼사를 치를 만큼 저와 대감의 사이가 막역했습니까? 대감의 조카사위라니 생각도 해본 적 없습니다. 허니 굳이 제 아비까지 만나 혼사를 거론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기껏 생각해서 제 집안과 혼사를 맺게 해주려 했건만, 자신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리는 도윤의 태도에 시종일관 여유롭던 영환의 얼굴에도 노기가 드러났다.     

 "상참(常參)에 가시던 길이 아니셨습니까? 곧 상참이 시작될 것이니 서두르시지요. 그럼 저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하지만 영환의 노기에 눈치를 볼 도윤이 아니었다. 도리어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건방진 놈……. 제 스승과는 다를 줄 알았건만 세상 혼자 사는 듯한 그 도도함은 아주 제 스승을 빼다 박았구나. 재주가 아까워 옆에 둘까도 생각했건만 감히 내 집안과 혼사를 맺을 기회를 그따위로 거절해? 언제까지 네놈이 그리 방자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영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도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      


 고관대작들의 저택이 몰려 있는 북촌 내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집을 꼽으라면 단연 영의정 김영환의 사가(私家)일 것이었다. 우뚝 솟은 솟을대문을 시작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행랑, 바깥사랑과 안사랑, 내당, 별채, 십 수명도 거뜬히 들어갈 만한 정자를 둘러싼 커다란 연못과 그 위에 놓인 아름다운 석교까지… 아흔아홉 칸 기와집, 어느 곳 하나 화려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보료에 비스듬히 누워 곰방대를 피우던 영환은 아침에 만났던 사헌부 감찰, 이도윤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건방진 놈……. 그런데도 보면 볼수록 탐나는 놈이란 말이야……. 이판이 아들 하나는 잘 뒀군.'     

 같은 노론임에도 저와는 생각부터가 다른 아비를 둔 데다, 당대(當代) 최고의 권력을 지닌 제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당돌한 놈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영환은 이 젊은 사헌부 관원이 자꾸 욕심이 나는 것이었다. 수재로 불릴 만큼 총명한 두뇌에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곧 정오품 지평직에 오를 만큼 출중한 인재였다.  게다가 수려한 외모에서 풍기는 청수한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과거에 딱 한 번, 지금처럼 제 사람으로 곁에 두고 싶은 이가 있었다. 소론 출신으로 대제학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민성렬……. 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불의(不義)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선비였다. 성균관 대사성을 지낼 때부터 수많은 유생들이 그를 따랐고, 그가 배출해 낸 걸출한 인재들만도 수십에 달했다.      

 영환은 성렬의 뛰어난 학식과 강직한 성품을 높게 사, 처음에는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높은 관직이나 부와 명예에는 아무런 욕심도 없는 대제학을 회유할 방법은 없었다. 성균관에 묻혀 지낼 때야 그저 탐나는 인재였으나, 대제학이 된 후로는 경연이 열릴 때마다 사사건건 해대는 입바른 소리가 거슬렸다. 

 문제는 임금이 성렬의 입바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리대를 통해 제 배를 불리고 있던 지방의 수령들, 매관매직과 뇌물을 당연시하는 탐관오리들, 임금의 눈과 귀를 속이는 간신배들이 모두 성렬의 통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는 대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私兵)을 지적했을 때, 영환은 그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임금이 혹시라도 성렬의 말을 받아들여 사병을 제한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낭패도 없었던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민성렬이란 인물이 워낙에 청렴결백했던지라 그를 모함할 만한 구실하나 찾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하늘이 저를 버리지는 않았던지 드디어 영환에게도 기회가 왔다. 소론들이 조정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꾸미고 있던 것이 발각되었고, 그 우두머리였던 윤지가 거사 전 자신의 수하를 보내어 성렬을 만나게 했던 것이다. 성렬이 모의에 동참할 뜻을 내비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니, 분명히 거절했을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역적의 무리와 접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렬을 공격할 구실이 생겼던 것이다.

 영환은 성렬을 만나러 갔던 윤지의 수하, 한용수를 필사적으로 추적해 마침내 그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용수에게서 성렬이 오히려 역모를 꾀하려는 자들을 설득하고자 했음을 알게 된 영환은 역으로 용수를 이용하기로 했다. 용수를 매수해 성렬이 역모죄에 가담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도록 일을 꾸몄던 것이다. 거짓으로 증언만 해준다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게 해주는 것은 물론, 평생 구경하기도 힘들 만한 재물을 손에 쥐게 해 주겠다 약조했다. 윤지와 그 수하들이 모두 잡혀 들어간 터라 돌아갈 곳조차 없어진 용수에게는 분명히 솔깃한 제안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토록 눈엣가시 같은 성렬을 모함할 기회를 잡았다는 기쁨에 방심했던 탓일까……? 평소의 영환답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용수가 시종일관 협조적인 태도로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였던 터라, 용수를 너무 허술하게 감시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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