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옷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댁이 얼른 나가보니 돌쇠가 커다란 꾸러미 하나를 들고 혼자 서 있는 게 아닌가? 돌쇠는 대뜸 이판 부인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니 절대로 거절하지 말라는 당부만 남기고선 서둘러 돌아갔다. 평상시라면 집 안으로 들어와 어디 수리할 곳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이것저것 살피고 갔을 돌쇠였지만, 오늘은 웬일로 허둥지둥 돌아가기 바쁜 것이었다. 영주댁은 꾸러미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별채로 들어섰다.
"아씨, 이판 부인께서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내게 선물을 보내셨다고?"
영주댁이 이판 부인이 주었다는 선물을 건네주자, 서연은 난색을 보이며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꾸러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집안이 몰락한 뒤 조용히 살고 싶다는 서연의 뜻을 존중해 오랫동안 따로 왕래를 하고 있지 않은 터였다. 그 때문에 갑작스러운 이판 부인의 선물이 당혹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판 부인께서 친히 주신 선물이신데, 풀러는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영주댁의 말에 하는 수 없이 꾸러미를 풀어보니 그 안에는 서연을 위해 준비된 듯한 단오빔이 들어 있었다.
"아이고, 아씨! 참으로 고운 빛깔입니다. 어쩜 이리 고운 옷을 골라 보내셨을까요?"
생고사(生庫紗) 원단의 녹색 저고리와 붉은색 치마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노리개와 갑사댕기며 꽃신에 쓰개치마까지 들어 있어, 얼마나 세심하게 입을 이를 배려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저고리와 치마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영주댁과 달리, 누구나 탐낼 만한 고운 옷을 바라보는 서연의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이판 부인이 자신을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했을 이 선물이 너무나도 감사했지만 도윤과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서연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한 것이었다.
"아씨, 도련님이 곧 뫼시러 오실 테니 얼른 옷부터 갈아입으셔요."
"유모, 꼭 이 옷을 입어야 해? 이판 부인께서 친히 주신 거라고는 하지만, 옷감도 너무 값비싸 보이고……. 아무리 봐도 내가 입기에는 과분한 것 같아."
"아이고, 아씨! 무슨 말씀을 그리하셔요? 이리도 고운 옷이니 이판 부인께서 선물한 것이지요. 쇤네는 감사하다고 엎드려 절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동안도 아씨에게 고운 옷을 지어주고 싶으셨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씨의 마음이 불편할 것을 배려해 그러지 못하고 있으셨을 터인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이판 부인께서 이리 옷을 보내오신 것이었다. 눈치 빠른 영주댁은 서연이 망설이고 있는 틈을 타 얼른 서연의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이판 부인의 마음을 단칼에 거절할 수 없어 주저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아씨가 냉정을 찾고 정중하게 선물을 돌려보낼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에 미모가 출중해 삼베옷만 입고 있어도 늘 아름다운 서연이었으나, 화사한 색감의 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서연의 모습은 평소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영주댁은 돌아가신 대제학 부부가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몰래 눈물을 훔쳤다. 어느덧 단장을 마친 영주댁이 면경을 가져다주었다. 서연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영주댁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다가, 면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웬 낯선 여인 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면경을 잘 보지도 않았기에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서연은 문득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단옷날이면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고운 새 옷을 차려입고, 아버지가 매어 놓은 그네에 오르며 신나 하던 그 모습이……. 한참 동안 면경을 바라보고 있던 서연은 이내 정신을 차리곤 자신이 원래 입고 있던 옷을 찾기 시작했다. 영주댁은 애써 치장한 아씨의 고운 모습이 사라질까 안절부절못하며 서연의 옷을 숨기기에 바빴다.
"영주댁, 우리가 왔네."
마침 들려오는 휘의 반가운 목소리에 영주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연도 마지못해 그 뒤를 따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서연이는 어디 가고, 천상의 선녀가 여기 내려와 있는 게냐?"
서연을 데리러 온 휘와 도윤이 별채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연의 주위를 돌며 너스레를 떠는 휘와 달리, 도윤은 그 자리에 박힌 듯이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도윤에게 있어서 서연은 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녹의홍상(綠衣紅裳)을 곱게 차려입은 서연의 모습은 그냥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준비하신다는 게 이거였구나……. 감사합니다, 어머니.'
만약 자신이 선물한 의복이었다면 서연은 받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서연도 윤화가 주는 것은 쉽게 거절할 수 없었으리라……. 서연의 눈에 자신의 저고리와 같은 빛깔의 도포에 푸른색 입영으로 장식된 흑립을 쓰고 있는 도윤의 모습이 들어왔다. 휘가 평소 의복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에 비해 도윤은 주로 흰색이나 어두운 색감의 의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리도 산뜻한 빛깔의 의복을 입고 있으니 그야말로 옥골선풍(玉骨仙風)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 한양의 내로라하는 사대부 가문에서 앞다투어 그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 다시 한번 도윤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깨닫자 서연은 지금 입고 있는 의복이 제 것이 아닌 것 마냥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역시 이 옷은 그냥 돌려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고운 의복에 미혹되어 잠시 제 것이 아닌 것을 탐했습니다. 금방 환복하고 나올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돌아서는 서연을 휘가 만류하고자 하였으나 도윤의 손길이 조금 더 빨랐다. 서연의 팔을 붙든 도윤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준비하셨을 게요. 그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벗의 딸을 위해 정성껏 마련하셨을 어머니의 성의를 보아서라도 이번 한 번만 그대가 져주면 안 되겠소?"
평소라면 서연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주었을 도윤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서연이,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욕심을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서연은 도윤에게 붙잡힌 팔을 뿌리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이판 부인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물리칠 수도, 그렇다고 편하게 받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서연아, 복잡하게 생각할 게 무어 있느냐? 의복은 의복일 뿐이다. 게다가 곱기까지 한 의복이지. 거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거라."
"그래요, 아씨.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즐겁게 보내다 오세요."
"영주댁의 말이 옳다. 서연이 너는 무엇부터 구경하면 좋을지 그것만 생각하려무나."
휘는 서연이 더는 망설이지 못하도록 얼른 밖으로 서연을 이끌었고, 영주댁이 따라와 서연의 머리에 쓰개치마를 씌워 주며 세 사람을 배웅했다.
"영주댁, 낭자는 늦지 않게 잘 모셔다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게.“
휘와 서연의 뒤를 따르며, 도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영주댁에게 말했다.
"아이고, 도련님. 도련님이 아씨와 함께 계시는데, 제가 무어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우리 도련님 멋지신 줄이야 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두 분이 나란히 서 계신 모습을 보니 선남선녀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
"아니, 영주댁. 윤만 이렇게 편애하긴가? 자네 눈에 나는 보이지도 않는군. 참으로 섭섭하네, 섭섭해."
"아이고, 정언 나리. 나리의 준수함이야 온 한양 사람들이 다 아는데, 쇤네가 입에 담지 않는다고 그 잘생긴 얼굴이 어디 가겠습니까?"
"이것 보게, 이것 봐. 윤은 도련님이고, 나는 나리라고 부르질 않는가? 그것부터가 차별일세!"
"아, 아니 나리, 그게 아니오라……."
오늘따라 되지도 않는 생떼를 쓰는 휘를 보며, 영주댁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보다 못한 서연이 나서서 휘를 잡아끌며 발길을 재촉했다.
"휘 오라버니, 농은 이제 그만하십시오. 유모가 진짠 줄 알고 놀라겠습니다. 사람들이 더 몰리기 전에 얼른 광통교로 나가봐요. 유모, 다녀올게!"
휘는 서연에게 이끌려 나가며, 영주댁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도윤은 영주댁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영주댁은 휘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휘가 벌인 소란에 정신이 없어진 서연이 더는 환복을 하겠다 고집부리지 않고, 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에 바빴던 것이다.
'두 도련님들이 아씨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도련님들이 저리도 훌륭하게 장성해서 아씨 곁을 지키니 그저 든든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영주댁은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