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잎새 Sep 13. 2024

9장. 단옷날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운종가는 단옷날을 맞아 명절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마음 한편이 무거웠던 서연은 어느샌가 거리의 활발한 분위기에 젖어 들어 들뜬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서연아, 우리 저기 가서 수리취떡부터 맛보자꾸나."     

 "내 이리 부채를 들고 있으니, 신선 같아 보이지 않느냐?"     

 "서연아, 이 붉은 댕기는 어떠냐? 색이 아주 고운데, 한 번 매보지 않으련?"     

 휘는 어느 곳 하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 휘의 모습에 서연은 절로 웃음이 났다.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휘가 부러 과장되게 행동하고 있음을 서연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도윤은 조용히 그 뒤를 따르며, 서연이 오랜만에 마음껏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휘와 함께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자신과 둘만 있었더라면 서연이 저렇게 마음 편히 웃음을 짓지는 않았으리라…….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글공부만 할 게 아니라, 여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법도 좀 배워둘 걸 그랬나?'    

 하지만 휘처럼 너스레를 떠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모습도 없을 듯했다. 여기저기 부산을 떨고 다니던 휘가 드디어 각종 장신구를 팔고 있는 도자전(刀子廛)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인장, 요즘 낭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는 장신구가 무엇인가?"     

 "그야 당연히 청국에서 들여온 장신구들이 가장 인기가 있습죠. 옥나비 노리개도 많이들 찾으시고, 모란을 수놓은 향낭(香囊)도 없어서 못 팔 지경입니다."      

 노련한 장사꾼은 딱 봐도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로 보이는 휘를 보자마자, 신이 나서 물건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청국에서 들어온 물건이 맞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지만, 일단 청국에서 들어왔다는 말이 붙으면 가격이 두 배로 뛰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이 인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서연아, 네 보기에는 어떤 것이 고운 것 같으냐? 내 아무리 여인의 마음은 잘 알아도 여인의 장신구는 도통 모르겠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장신구보다는 서책을 더 좋아했던지라 장신구에 대해 잘 모르기는 서연도 매한가지였다. 하나같이 다 화려하고 형형색색 빛을 발하는 게,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 서연의 마음을 끄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휘가 자신의 의견을 물으니 무언가 답은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서연은 고심하며 앞에 놓인 장신구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값비싸 보이는 장신구들이 저마다 영롱한 빛깔을 뽐내는 가운데, 진열대의 맨 끝에 놓인 옥지환(玉指環) 하나가 서연의 눈에 띄었다. 반지는 언뜻 수수해 보였지만, 은은한 옥색 빛이 감도는 데다 작게 세공된 하얀 찔레꽃이 과하지 않아 오히려 우아함을 자아냈다. 서연의 눈길이 한동안 그 옥지환에 머물렀지만 곧 그 옆에 놓인 화사한 매화꽂이를 들어 휘에게 건넸다.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선홍색과 하얀색 매화가 어우러진 게 여인의 탐스러운 머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 줄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선물하긴 당연히 서연이 네게 주려는 게지."     

 서연에게서 매화꽂이를 받아 든 휘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서연의 머리 옆에 매화꽂이를 꽂아주었다.     

 "아, 아니, 오라버니! 저는 이런 장신구가 필요 없습니다."     

 당황한 서연이 매화꽂이를 다시 돌려주기 위해 머리에 손을 뻗었지만 눈치 빠른 주인이 이미 휘에게서 값을 받아낸 뒤였다.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휘인지라, 당연히 그 여인들 중 누군가에게 선물하려는 건 줄 알았건만……. 좀 더 소박한 걸 고르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지만, 값까지 치른 걸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연은 화려한 장신구가 어색해 몇 번이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흐뭇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휘의 모습에 차마 제 머리에 꽂힌 매화꽂이를 뺄 수가 없었다. 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서연에게 선물을 해줄 수 있는 휘가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적당히 거리 구경을 마친 세 사람은 그네터가 설치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신시(申時: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까지)가 넘어가고 있는 초여름의 날씨는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힐 만큼 무더웠다. 하지만 사람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고, 그네터가 가까워질수록 그 왁자지껄함도 배가 되었다.      

 "에구머니나, 저기 그 유명한 사헌부의 감찰 나리와 사간원의 정언 나리 아니야?"     

 "맞네, 맞아! 어쩜 저 인물 훤한 거 봐. 아주 그냥 빛이 나네."     

 "두 나리가 함께 계시는 걸 보다니, 이게 웬 횡재야? 눈이 아주 호강을 하는구먼 그래."     

 "아니, 근데 옆에 있는 저 아씨는 누구시래? 세상에, 월궁의 항아님이 내려온 것 같구먼. 어쩜 저리 고우실까?"   

 인파에 뒤섞여 있던 도윤과 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도윤과 휘는 한양 도성 안에서 워낙에 유명인사였던 데다가, 그 옆에 웬 눈부신 미모의 규수까지 있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도윤과 휘를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연아, 조심하거라!"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며 휘가 서연에게 말했다. 인파에 떠밀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서연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한 사내와 부딪힐 뻔한 찰나, 도윤이 재빨리 팔을 뻗어 서연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풀썩하고 도윤의 품에 안겨든 서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내 정신이 든 서연이 도윤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움직였으나 서연을 안은 도윤의 팔에는 도리어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찔레꽃 향기… 달콤한 찔레꽃 향기가 도윤의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 향낭을 지닌 것도 아닌데, 서연에게서는 늘 은은한 찔레꽃 향기가 났다. 도윤은 제 품에 안긴 채 놀란 눈을 하고 저를 올려다보는 서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청초한 하얀 피부,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크고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분홍달맞이꽃을 닮은 고운 빛깔 입술까지……. 이렇게 가까이서 서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도윤은 자신의 품에 안긴 서연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잠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고 바란 순간, 자신을 밀어내는 서연의 손짓에 숨 막히던 설렘도 흩어져 내렸다.      

 "놓아주십시오."     

 "미안하오. 그대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준다는 것이 그만……."     

 도윤은 아쉬운 듯 천천히 서연을 놓아주었고, 도윤의 품에서 벗어난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고개를 돌린 서연의 두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느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던 휘는 갑자기 무언가 어색해진 두 사람의 분위기를 감지하곤 헛기침을 했다.      

 "큼큼, 좀 걸었더니 배가 출출하군그래. 아까 제대로 맛보지 못한 수리취떡 생각이 간절한데, 윤이 자네가 가서 좀 사다 주지 않겠나?"

 "아, 알겠네. 내 얼른 다녀오겠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애써 누르고 있던 도윤은 휘의 뜬금없는 청이 내심 반가웠다. 계속 서연과 함께 있으면 자꾸 그녀에게 닿고 싶을 것만 같아 혼자 머리를 좀 식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운종가 상점으로 향하는 도윤의 머릿속은 주변의 소란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어지러웠다. 만약 서연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대로 입술을 내려 서연에게 입을 맞추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밤낮으로 글공부를 하며 선비의 정신을 익히면 무엇하는가? 연모하는 여인 앞에선 이리도 자제력이 부족한 범부(凡夫)에 불과한 것을…….'

 도윤은 혹여 아까의 일로 서연이 불쾌하지는 않았을지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지러운 마음을 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도윤의 눈에, 휘가 장신구를 샀던 도자전이 들어왔다. 진열대에 놓인 수많은 장신구들을 눈으로 훑던 도윤은 망설임 없이 맨 끝에 놓인 옥지환을 집어 들었다. 민무늬의 옥반지나 좀 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반지들은 많았지만, 찔레꽃이 세공된 반지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도윤은 잠시 물끄러미 반지를 쳐다보았다.

"아이고, 좀 전에 매화꽂이를 사가신 나리와 함께 계셨던 분 아니십니까? 뭐 더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도자전의 주인이 도윤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이 옥지환을 주게나."

 "같이 계시던 그 아씨께 드리려는 게지요? 나리의 안목이 참으로 탁월하십니다. 사실 그 아씨께는 화려한 매화보다 은은한 찔레꽃이 더 어울리긴 했습니다."

 수수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정교한 세공 탓에 옥지환은 가격이 꽤 나가는 장신구였다. 매화꽂이에 이어 옥지환까지 값비싼 물건을 두 개나 팔아 기분이 좋아진 주인의 사설이 길어졌다.

 "나리, 혹시 찔레꽃의 꽃말이 뭔 줄 아십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듯 도윤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주인이 다음 말을 늘어놓았다.

 "바로 '신중한 사랑'과 '고독'이라고 합니다. 꽃은 그렇게나 청초한데, 꽃말은 좀 구슬프지 뭡니까?"

 신중한 사랑과 고독이라...... 어쩐지 한사코 자신을 밀어내는 서연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아 그 꽃말이 더 애타게 느껴졌다. 언제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를 옥지환을 소중히 갈무리하며 도윤은 다시 한번 찔레꽃의 꽃말을 생각했다.

 '그대의 사랑이 너무 신중하지는 않기를……. 그리고, 부디 그대가 홀로 고독해지는 쪽을 택하지는 않기를…….

 길가에는 조금 일찍 개화를 한 메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연분홍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잔잔하게 퍼지는 분홍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일렁이던 도윤의 마음도 어느덧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던 도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수려하기가 이를 데 없는 선비의 얼굴에 미소까지 서리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도윤을 돌아보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정작 도윤은 사람들의 시선에는 무감한 채 서연과 휘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 08화 8장. 이판 부인의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