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아, 그네 앞에 줄을 선 낭자들 수가 제법 되는구나. 윤이 오길 기다렸다간 줄만 더 길어질 듯하니, 어서 가서 줄부터 서려무나. 윤이 오면 예서 함께 네가 그네 뛰는 것을 보고 있으마."
수리취떡을 사러 간 도윤이 생각보다 늦어지자, 휘는 서연에게 먼저 줄부터 설 것을 권했다.
"이젠 밀어주지 않아도 혼자 그네를 뛸 수 있겠지?"
"오라버니도 참, 제 나이가 몇인데 그네도 못 뛰겠습니까? 제가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 지나 잘 보고 있으셔요."
몇 년 만에 뛰어보는 그네이던가……? 막상 커다란 나무에 높게 매달린 그네를 보니, 얼른 그네에 올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서연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여인들의 무리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저마다 고운 옷을 차려입고 한껏 치장을 한 규수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그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연도 그 속에 섞여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혹… 전(前) 대제학 댁의 서연 아씨 아니십니까?"
하나, 둘, 줄어드는 줄을 보며 제 차례 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웬 낭랑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서연이 뒤를 돌아보니, 미색 저고리에 붓꽃이 수 놓인 세모시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미모도 뛰어났지만, 말투에 서린 기품이며 음전한 모습이 예사 집안의 규수 같지는 않았다.
"저를 아십니까?"
자신의 이름까지 아는 여인이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서연이 여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쓰는 사이, 여인의 옆에 있던 한 무리의 규수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제학이라뇨, 혜인 아씨. 복권(復權)도 되지 않은 집안에 대제학이 웬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혜인 아씨는 너무 인정이 많으시다니까요."
"하긴 이리도 고우신데 마음씨까지 비단결 같으시니, 이판 대감께서도 아씨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하시는 거 아니겠어요?"
호의적인 태도로 서연에게 처음 말을 건네온 여인과는 달리, 다른 규수들의 말투는 싸늘하기만 했다.
"그만들 하세요.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서연 아씨, 저는 예조 판서 박명훈 대감의 둘째 여식, 박혜인이라고 합니다. 정언 나리와 함께 계시길래 혹 서연 아씨가 아닌가 해서 그저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결례가 되었다면 송구합니다."
혜인이라는 여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연을 쳐다보고 있는 다른 여인들에게 따끔하게 주의를 준 뒤, 서연에게 공손히 사과를 해왔다.
"오래전에 삭탈당한 관직이라 틀린 말도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그럼……."
예판 대감의 여식은 왠지 제게 호의를 품고 대화를 더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들과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서연은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설마 오늘 감찰 나리도 함께 나오신 건 아니겠죠?"
"어렸을 때 정혼자였단 이유로 감찰 나리 곁을 맴돌다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등 뒤로 들려오는 여인들의 앙칼진 음성이 서연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니, 도대체 오늘 왜들 이러는 겁니까? 더 이상 애먼 사람에게 무례를 범하면, 제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혜인이 화가 난 표정으로 서연에게 시비를 거는 여인들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서연은 괜찮다는 듯 혜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저 조용히 그네를 타다 가고 싶었을 뿐인데…….'
서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자신을 향해 뾰족한 시선을 날리고 있는 규수들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도윤과의 정혼이 결정된 뒤, 꼭 지금처럼 제게 시비를 걸어오는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그 여자아이들은 마치 제 것을 서연에게 빼앗기기라도 한 것마냥 분한 얼굴로 하고픈 말들을 쏟아내곤 했었다. 아무리 네 아비가 대제학이라고는 해도, 그래봤자 소론출신 아니냐고……. 언감생심 대대로 노론 명문가인 이판 대감 댁의 외아들과 정혼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그때처럼 어린 여자아이들은 아닌지라 함부로 말을 쏟아내지 못하고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마 제게 하고픈 말은 같을 것이었다. 너 같은 건 그분과 어울리지 않으니, 당장 떨어지라는…….
눈 앞에 서 있는 규수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서연의 얼굴에 돌연 꽃 같은 미소가 어렸다. 분해서 눈물이라도 흘리거나 아니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서연이 자신들을 바라보며 웃으니 여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그 미소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여인들인 자신들마저 설렐 지경이라, 서연을 왜 불러 세웠는 지도 잊은 채 잠시 서연의 미모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옛일이라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정혼을 낭자들께서 일깨워주시는군요. 그러잖아도 감찰 나리 곁에 있을 방법을 몰라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이리 친절하게 알려주시다니…….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다정하십니다. 낭자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오늘부터 정혼을 핑계 삼아 감찰 나리 옆에 딱 붙어있어야겠습니다."
"아, 아니, 우리가 언제……."
"또 제게 해주실 조언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새겨듣겠습니다. 그럼 이만……."
서연의 미모에 홀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여인들은 서연의 말에 기가 막혀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서연은 이미 그네에 오르고 난 뒤였다. 혜인은 그런 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사실 혜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간 규방모임에서 서연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뒤 서연의 집안이 화를 입게 되면서 더 이상 서연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마음 한편에선 늘 서연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서연 아씨……. 이리 다시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혜인은 어린 시절 서연에 대한 좋은 기억을 안고 있었기에, 오늘 그네터에서 우연히 서연을 마주치게 되어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천천히 그네를 앞뒤로 젓고 있는 서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머지않아 서연을 꼭 한 번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는 혜인이었다.
미소까지 지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그네를 타고 있는 서연의 속마음은 전혀 여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예판 대감 댁의 규수라고 했던가? 여러 낭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태가 나는 데다, 기품 있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게다가 인품마저 고와 보였으니, 이판대감이 아들의 배필로 눈여겨보시는 거겠지…….
서연은 몸을 밀어 앞으로 나갔다 뒤로 나갔다를 반복하며, 그네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넷줄이 높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언제 왔는지 휘의 곁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는 이 그네가 정말로 좋았었다. 아버지는 단옷날이면 늘 서연을 위해 별채 마당에 그네를 만들어주시곤 하셨다. 서연은 그넷줄이 높이 올라갈 때마다 담장 너머 바깥세상이 훤히 보이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계속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하늘 끝까지 닿을 것만 같아 무서운 줄도 모르고 높게 오르곤 했다.
그러나 열아홉이 되어 다시 오른 그네는, 그때와는 달리 서연에게 답답함만 안겨주었다. 이제 서연은 그네가 결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서연에게 그네는, 오를 때의 설렘과 즐거움이 너무 커서 내려오는 순간은 다시 오르기 위한 잠깐의 쉬어감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서연에게 그네는, 내려올 때의 허망함과 아쉬움이 너무 커서 오르는 순간은 다시 내려가기 전에 느끼는 덧없는 즐거움일 뿐이었다. 아무리 더 오르고자 애를 써도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넷줄이,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처럼 느껴졌다.
**
오랜만에 그네를 뛰고 온 서연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자, 도윤은 아까의 일로 서연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한번 사과를 한다 한들 분위기만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휘를 쳐다보니, 휘도 서연의 기분이 왜 가라앉아 있는지를 모르는 듯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서연은 아무 말 없이 땅을 보고 걷기만 했다. 아까 그네터에서 보았던 혜인이라는 규수의 얼굴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판 대감이 아들의 배필로 생각하고 있다던 여인… 정작 제게 비수를 날린 건 다른 규수들이었는데, 그 규수들이 한 말들은 이미 다 잊었건만 왜 혜인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광통교 아래 새로 생긴 세책점에 구하기 힘든 책들도 많이 있다고 들었소. 혹 그대가 원하는 책들도 있을지 모르니, 한 번 가보지 않겠소?"
혼자 상념에 빠져있는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도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도윤의 제안에 서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은 생각일세. 나도 마침 찾고 있던 서책이 있으니, 얼른 가보세."
휘 또한 도윤의 제안을 반기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유시(酉時)가 넘어가는 거리에는 가게 주인들이 하나, 둘, 매달기 시작한 등롱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불빛을 길잡이 삼아, 세책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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