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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18. 2024

12장. 구리개의 젊은 의원

 모처럼 제시간에 퇴청을 하게 된 도윤은 사헌부 관청을 나선 뒤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구리개로 발걸음을 향하였다. 승원이 하는 의원(院)에 들러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혹 최승원이라는 의원을 알고 있는가?"     

 "아, 그 인물이 훤하신 젊은 의원님을 말씀하시는 게지요? 이쪽으로 죽 따라가시다 보면 금방 나옵니다. 최 의원님이 어찌나 바지런하게 의원을 관리하시는지 새것처럼 깔끔한 곳이라 아마 보시는 순간,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     

 "맞습니다요. 이곳 구리개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지요."     

 승원의 의원은 이곳에선 제법 유명한 듯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의원 앞에 이르니 각종 약초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약재들은 잘 정돈된 채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서고에는 의서인 듯한 서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사람들 말대로 의원 내에 놓인 모든 것이 정갈한 느낌을 주는 것이, 어쩐지 지난번 보았던 승원의 단정한 모습을 닮은 듯하였다. 내실로 들어서자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승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리달에 고뿔에 걸리면 배로 고생을 합니다. 날이 덥다고 자꾸 몸을 차게 하지 말고, 항시 아이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십시오. 다행히 열이 오르지는 않아 증세가 심하지는 않습니다.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승마, 감초, 생강 따위를 넣여 달여 만드는 탕약)에 들어갈 약재를 처방해 드릴 테니 잘 달여 먹이십시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의원나리. 간밤에 아이가 끙끙 앓으며 한숨도 못 자길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낙이 승원의 말을 듣고 난 뒤, 안심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승원은 다정한 눈빛으로 두 모녀를 바라보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서 나아 신나게 뛰어놀고 싶으면 제때 탕약을 잘 먹어야 한다. 알겠느냐?"     

 승원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이는 부끄러운 듯 두 볼이 빨개져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탕약이라면 질색을 하는 데도 의원 나리가 지어주신 탕약은 희한하게도 잘 먹습니다."     

 "탕약을 잘 먹는다니 참으로 장하구나. 상으로 엿을 줄 터이니 탕약을 먹고 난 뒤 하나씩 먹으려무나."

  형편이 어려운 백성들에게는 거의 무료에 가까운 값으로 약재를 처방해 주고 있는 터라 승원의 의원에서는 백성들도 심심찮게 탕약에 들어갈 약재를 받아가곤 했다. 승원에게서 엿을 건네받은 아이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제 어미를 쳐다보았다. 아낙은 승원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도윤은 가난한 백성의 진료에도 한치의 소홀함이 없는 승원의 모습을 보며, 승원이 외양만 보기 좋은 게 아니라 인성까지 바른 사내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서연의 스승이라는 자가 믿을 만한 사람인 듯하여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흠잡을 곳 없는 승원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뒤늦게 도윤을 발견한 승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어서 오십시오, 감찰 나리. 환자를 진료하느라 오신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척을 해 주셨으면 이리 서 계시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닐세. 의원이 환자를 진료하는 것보다 더 중한 게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막 들어서던 참이니 괘념치 말게."     

 승원은 도윤에게 자리를 권한 뒤 상처를 감싼 천을 풀어 상태부터 살폈다. 역시나 덧나는 곳 없이 잘 아물어가는 중이었다.     

 "이리 다치시는 일이 잦으십니까?"     

 "잦지는 않네만 아주 없지는 않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겐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궁금하였을 뿐입니다."     

 의아해하는 도윤의 얼굴을 보며 승원은 서연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     



 아직은 꽤나 매서운 소소리바람이 불던 3월의 어느 날, 웬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약초를 팔러 왔다며 승원의 의원을 찾아왔다. 이전부터 외조부와 거래를 해오고 있다는 여인은 의원이 아니라면 잘 알지도 못할 약재의 이름을 술술 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 승원은 여인과 제법 긴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의술을 공부하고 있다는 여인은 비록 행색은 소박했으나 아무리 보아도 양반댁 아씨로 보였기에, 양반이 하물며 여인이 의술을 왜 공부하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승원은 대화를 하는 동안 몇 번이나 여인의 영민함에 놀라며, 어느 순간 자신이 이 여인과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쩍 늘어난 환자들로 인해 마침 일손이 필요했던 승원은 괜찮으면 의원에서 일을 하며 의술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여인은 감격한 표정으로 그렇다면 이제부터 스승으로 모실 터이니 잘 부탁드린다며 공손히 인사를 했고, 그것이 서연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헌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혹여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씨가 의술을 배우시려는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실은... 제게는 갚지도 못할 큰 은혜를 입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상처를 입고 오는 일이 종종 있어 제가 의술을 제대로 배운다면, 미약한 재주나마 그분께 도움이 될까 하여 의술을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      

 "은혜를 갚고 싶다는 그분이 아씨께 소중한 분이시군요."     

 "……."     

 서연은 비록 말이 없었지만 서연의 눈빛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     



 승원은 세책점에서 도윤을 마주친 그 순간, 서연이 그때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헌부의 감찰 나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을 찾아온 도윤을 보며 그 짐작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서연 낭자는… 이곳에서 어떤 것을 배우고 있는 겐가? 의술을 배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인데, 혹 힘들어하지는 않던가?"     

 "지금은 주로 약재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곧 침술도 가르쳐 드릴 생각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염려스러운 마음도 있었으나, 곧 기우였단 걸 깨달았습니다. 서연 아씨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영매한 분이십니다. 게다가 의원을 찾는 환자들을 성심성의껏 돌보셔서 모든 이들이 다 아씨를 좋아합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아씨를 무척 잘 따릅니다."     

 서연의 얘기를 듣고 있던 도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눈앞에 서연이 있기라도 한 듯 그리움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서연이 머물렀을 이곳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도윤의 상처에 백급(白芨) 가루를 바르고 있던 승원은 그런 도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있어도 잘생긴 사내였으나, 미소까지 띤 얼굴은 절로 한숨이 나올 만큼 수려한 것이었다. 승원은 서연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서연이 의술을 배우려는 연유가 도윤 때문이라는 사실을 본인에게는 알려 주고 싶지가 않았다.     

 "앞으로는 아씨께 사흘에 한 번씩 오시라고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침술까지 배우시려면 지금처럼 엿새에 한 번씩 오셔서는 제대로 배우시기도 힘들뿐더러, 환자들도 아씨가 더 자주 오시면 좋아할 것입니다."     

 "그건 아니 되네!"     

 "예? 어찌 안된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건……."     

 서연이 지금처럼 엿새에 한 번 이곳에 오는 것도 이토록 신경이 쓰이는데, 사흘에 한 번씩 승원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급해져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혹여라도 서연 낭자의 몸에 무리가 되진 않을까 저어 되네."     

 "아, 그런 거라면 염려치 마십시오. 절대 아씨의 몸에 무리가 갈 만큼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씨가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커서 제가 쉬엄쉬엄하시라고 만류할 정도입니다."   

 도윤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는 승원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가 싫네…….' 

 승원과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도윤은 세책점에서 휘가 승원에게 보이던 호의적인 태도가 수긍이 갔다. 상처를 치료하는 손길의 신속함과 정확함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 의원으로서의 실력도 의심할 것이 없었다. 더 이상 물색없는 핑곗거리를 찾기 어려웠기에, 도윤은 서연이 승원에게 의술을 배우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치료가 끝나자 도윤은 한사코 값을 받기를 거부하는 승원에게 자신은 사헌부 관원인지라 그럴 수 없다며 제값을 치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윤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을 배웅하는 승원에게 들어가라는 인사와 함께 한마디를 더 건넸다.     

 "서연 낭자에게 의술을 가르쳐 주어 진심으로 자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낭자를 잘 부탁하네. 그리고… 서연 낭자는 내 정혼녀이네. 그러니 혹여나 낭자에게 다른 마음은 먹지 말게나.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일세."     

 예기치 못한 도윤의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이 된 승원은 곧 묘한 미소를 지으며 도윤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도윤은 승원이 알겠다고 했지, 그리하겠다고 답한 것이 아니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의원을 나섰다. 승원은 멀어지는 도윤의 뒷모습을 보며, 왜 자신의 기분이 가라앉고 있는 것인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승원이 제법 괜찮은 사람임을 알게 된 도윤도 서연에 대한 도윤의 깊은 마음을 확인하게 된 승원도 그 어느 쪽도 마음이 편치 않은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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