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쾅쾅!
도윤과 휘를 제외하고는 찾아올 사람도 없는 집에, 느닷없이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댁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니, 웬 낯선 사내 하나가 비단에 싸인 물건을 잔뜩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뉘십니까?"
"나는 건넛마을 김진사 댁 청지기올시다만, 이 댁에는 청지기나 다른 하인들은 없소?"
"지금은 다른 일들을 하러 나가고 없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리 찾아오신 겝니까?"
눈치 빠른 영주댁은 낯선 사내에게 집안의 사정을 낱낱이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부러 말을 꾸며냈다.
"우리 도련님이 이 댁 아씨께 선물을 전해드리라 하셔서 이리 찾아왔소. 짐이 무거우니 아씨께 이것부터 전해드리게 집안으로 안내부터 해주시오."
"그 댁 도련님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아씨는 낯선 이가 주는 선물을 함부로 받지 않으니 돌아가시오"
"아니, 김진사 댁 둘째 도령이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오? 우리 도련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에 소과 초시를 준비하고 있으신 데다, 인물까지 아주 훤칠하신 분이오."
"아, 글쎄 모른다고 하지 않소?"
"하! 우리 도련님이 이 댁 아씨께 마음이 있어 이리 선물까지 준비하였으니, 감사한 줄이나 아시오. 언감생심 이런 집에선 꿈도 꿀 수 없는 분이란 말이오."
본디 부리는 사람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일지 짐작할 수 있는 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청지기의 태도를 보며 영주댁은 본 적도 없지만 그 집 도련님이 어떤 사람일지 알 것만 같았다. 영주댁은 청지기에게 거듭 돌아갈 것을 요청했으나, 청지기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버티고 서서 집안으로 안내해 줄 것을 고집했다.
"내 아씨를 직접 만나기 전에는 절대 돌아갈 수 없으니, 그리 아시오."
"아니,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데도, 이게 무슨 짓이오? 아씨는 만날 수 없으니 어서 돌아가시오!"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청지기와 이를 막으려는 영주댁 사이에 작은 몸싸움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소란은 별채의 약초밭에서 약초를 가꾸고 있던 서연에게까지 들려왔다. 서연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무슨 일인가 하여 마당으로 걸음 하였다가, 마침 영주댁을 완력으로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청지기를 발견하곤 호통을 쳤다.
"알지도 못하는 자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려고 하다니, 이 무슨 무례한 일인가?"
청지기는 노기 어린 음성으로 자신을 꾸짖고 있는 서연을 아래위로 훑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도련님이 눈길을 줄 만큼 대단한 미모긴 하구나. 하지만 그래봤자 몰락한 가문의 여식일 뿐, 제깟게 반반한 얼굴 말곤 무어 내세울 게 있다고, 흥!'
청지기는 속마음을 감춘 채 서연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서연 아씨 되십니까? 저는 건넛마을 김진사 댁에서 일하고 있는 청지기입니다. 제가 모시고 있는 도련님이 아씨께 선물을 전해드리라 명하셔서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김진사댁 도련님이라 하면 지난번에 총명탕(聰明湯)을 지으러 의원에 오셨던, 그 둘째 도련님을 말하는 겐가?"
"아이고, 아씨께서도 도련님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얘기가 쉽겠습니다. 우선 들어가셔서 도련님이 보내신 이 선물들부터 받으시지요."
"그 댁 도련님은 의원에 오셔서 탕약을 지어 가셨을 뿐, 이리 선물을 주고받고 할 만한 사이가 아니네. 나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으니, 어서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가게."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어 힘에 부치던 차에, 서연이 선물을 반기기는커녕 돌아가라고 자신을 내치자 청지기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집 안에는 두 여인 말고 다른 하인들은 없는 듯하여 제 신분도 망각한 채 서연에게 주제넘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씨, 이리 나오시면 후회하실 겝니다. 우리 도련님처럼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저 아씨 하나만 보고, 아씨를 좋아할 이가 또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아씨 처지에는 이만한 자리도 없으니, 못 이기는 척 따르시지요." "아니 이런 무례한 작자를 봤나, 아씨께 이 무슨 망발이오? 썩 이 집에서 나가시오!"
영주댁은 서연에게 함부로 구는 청지기에게 분노하며 청지기를 밖으로 끌어내고자 했으나, 사내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청지기는 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욱 의기양양하여 하고자 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아씨가 이리 뻣뻣하게 나오시는 게, 혹여 감찰 나리를 믿고 하시는 행동은 아니시지요? 지금 도성 안에 감찰 나리와 예판 대감 댁 따님의 혼사 이야기가 자자한데,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동안은 도윤의 비호 아래 감히 서연에게 함부로 수작을 거는 자들이 없었으나, 도윤이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할 것이란 소문이 도니 이리 찾아와 무례를 범하는 것이었다.
"제가 다 아씨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감찰 나리가 어디 넘볼 수나 있는 분입니까? 아씨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그만 쳐다보시고, 우리 도련님 같은 분이 마음을 줄 때, 얼른 기회를 잡으십시오. 안 그러면……."
더 이상은 청지기의 무례함을 참아줄 수 없다고 여긴 순간, 서연보다 한 발 앞서 청지기를 호되게 꾸짖는 이가 있었다.
"네 이놈! 반상(班常)의 법도가 지엄한 법이거늘, 네놈의 방자함이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을 지경이구나! 양반댁 아씨께 이 무슨 무례한 태도냐?"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알아볼 순 없었으나, 입고 있는 옷차림이나 말투에서 느껴지는 위엄이 예사롭지 않은 한 여인이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로 보이는 데다, 호위무사까지 대동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청지기는 슬며시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소인이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감찰 나리와 예판 대감 댁 아씨의 혼사 얘기가 오가는 게 사실인지라 그저 아씨가 걱정되어서……."
"네놈이 뭐라고, 이 댁 아씨 걱정을 한단 말이냐? 그리고, 걱정한다는 이의 말투가 그리 고약하단 말이더냐?"
청지기는 여인의 질타가 계속되자, 무언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대관절 아씨는 뉘시길래, 소인에게 이리 지청구를 하십니까?"
여인이 청지기의 물음에 덮고 있던 쓰개치마를 벗어 내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아리따운 얼굴이 드러났다. 서연은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곤 깜짝 놀랐다.
'저 여인은 단옷날 그네터에서 보았던 예판대감 댁의 여식이 아닌가? 저 여인이 왜 여기에……?'
혜인은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서연에게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표하곤, 쓰개치마를 곱게 접어 한쪽 팔에 걸고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어찌나 우아한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넋을 잃고 혜인을 바라보고 있던 청지기는 아무래도 혜인이 보통 집안의 규수가 아닌 듯하여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고관대작의 여식에게 함부로 굴기라도 했다간 멍석말이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는 청지기를 호위무사가 막아서자, 혜인이 다가가 다시 한번 큰소리로 청지기를 꾸짖기 시작했다.
"내가 바로 감찰 나리와 혼사가 오간다는 그 예조 판서 댁의 둘째 여식이다. 아직 집안끼리 아무것도 결정된 바가 없거늘 저자에 떠도는 소문만 가지고 이리 찾아와 아씨께 함부로 굴다니, 네 주인이 이리하라고 시키더냐?"
지체 높은 가문의 아씨일 것이라고는 짐작했으나, 예조판서 댁의 금지옥엽이라니……. 청지기는 사색이 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왜 예판 댁 아씨가 이곳에 와서 이 댁 아씨 대신 저리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뒤탈이 없도록 혜인의 노여움을 푸는 것이 옳을 듯해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아이고, 소인이 아씨를 몰라 뵙고,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 댁 아씨께 하거라."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그런데… 이 댁 아씨와는 어떤 사이이신지 제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서연 아씨는 나와는 둘도 없는 동무 사이다. 내 귀한 벗에게 이리 함부로 구는데, 내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 네 주인에게 가서 전하거라. 앞으로 한 번만 더 서연 아씨를 찾아와 괴롭히면, 감찰 나리뿐 아니라 예판 댁에서도 그냥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알겠느냐?"
청지기는 너무 놀라 입이 쩍 벌어진 채 제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혼사가 정해진 게 아니라면 감찰 나리가 이 댁 아씨에게 관심을 끊은 게 아닐 터인데, 이리 찾아와 무례를 범한 것을 알면 당장 감찰 나리의 손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청지기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서연에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아씨,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저 아씨를 연모하는 도련님의 성심을 전해드린다는 것이 그만... 아씨께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좀 전까지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오간 데 없이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청지기의 모습이 기가 막혔으나, 서연도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본디 아랫사람에게 관대한 성정인지라,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이를 딱히 벌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네 도련님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자네 도련님과 나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이니 선물은 받을 수 없네. 자네도 주인에 대한 충심으로 그리 한 것일 터이니, 내 오늘 일은 문제 삼지 않겠네. 허나, 내가 자네를 용서해 준 대신 다시는 이리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하게.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네!"
청지기는 살았다는 심정으로 서연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사과한 뒤, 어서 빨리 이 집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겼다.
"네 이놈! 가져온 물건들도 빠뜨리지 말고 몽땅 챙기거라! 슬며시 놓고 갔다, 이후에 납채(納采)를 보냈다는 둥 하며 시비를 걸어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은근슬쩍 물건을 흘리고 가, 나중에라도 도련님이 말을 붙일 구실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던 청지기는 혜인의 일갈에 뜨끔해져 서둘러 자신이 가져온 물건들을 모두 챙긴 뒤 줄행랑을 쳤다. 참으로 귀신같은 아씨였다. 저런 무시무시한 아씨가 뒤에 버티고 있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도련님이 이 댁 아씨를 포기하는 것이 옳을 성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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