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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20. 2024

14장. 어린 시절의 인연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청지기가 사라지고 나자 안심한 영주댁도 자리를 비운 가운데, 집안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서연은 비록 혜인에게 고마움을 느끼긴 했으나, 혜인 또한 낯선 방문객이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도윤과 혼사 이야기가 오가는 규수와 이리 마주하고 있을 연유 또한 없었다. 

 "혜인 아씨라고 하셨습니까? 아까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씨가 아니셨으면, 그자가 그리 쉽게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저 그자가 하는 일이 옳지 못한 듯하여 몇 마디 했을 뿐, 제가 크게 한 일은 없습니다. 애초에 아씨께 그리 무례를 범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요."

 말끝에 혜인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서연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 여인이었다.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진짜로 가까운 벗으로 지냈을지도 모르는……. 하지만 지금의 서연으로선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말고는 달리 더 나눌 얘기도 없는 그런 사이일 뿐이었다.

 "지나는 길에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시 들르신 모양인데, 가던 길을 마저 가보시지요. 오늘 일은 제가 후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실은 서연 아씨를 뵙고 싶어 찾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오는 길에 아씨께 결례가 되는 듯하여 몇 번을 망설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문이 열려 있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길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송구합니다."

 혜인이 자신을 찾아올 연유란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서연은 부러 자신을 보러 왔다는 혜인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혹여 감찰 나리와 혼사 이야기가 오가는 것 때문에 저와 얘기를 나누기가 꺼려지신다면 염려 마십시오. 곧 그 혼사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리 서연 아씨를 찾아온 이유는 감찰 나리와는 상관없이, 그저 아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도윤과의 혼사 이야기가 없던 일이 될 것이란 건 또 무슨 말인지...... 혜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서연은 혼란스러움만 가중되었다. 하지만, 혜인의 눈빛에서 거짓이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저… 그런데, 아까 하도 호통을 쳤더니 목이 타는데, 해갈(解渴)할 것을 좀 청해도 되겠습니까?"

 혜인을 집안에 들여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혜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하나도 밉지가 않아 서연도 그만 혜인을 따라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안으로 드시지요. 유모에게 마실 것을 내어 달라고 이르겠습니다. 무사분께서도 같이 드시지요."

 서연이 자신을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혜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서연과 함께 별채로 향했다. 혜인의 호위무사 진운이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      


    

 서연의 방에 들어서자 은은한 찔레꽃 향기가 풍겨왔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느낌을 주는 방에 향긋한 꽃내음까지 더해지니, 혜인은 마음 한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뒤, 영주댁이 다과상을 들여왔다. 탐스러운 붉은빛을 띠고 있는 오미자차와 맛깔스러운 모약과가 놓인 상이었다. 

 "세상에, 여태껏 제가 먹어 본 오미자차 중 가장 맛이 좋습니다. 오미자차란 게 다 거기서 거기일 듯한데, 어찌 이런 맛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로 목이 많이 탔던지, 영주댁이 다과상을 들여오자마자 단숨에 한 잔을 비워낸 혜인은 오미자차의 맛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기 모약과도 좀 드셔보시지요."

 "아니, 어찌 이리 하나같이 맛이 훌륭합니까? 저희 집 찬모의 솜씨도 나쁘지 않은데, 이 댁 유모가 만든 것들에는 견줄 수도 없을 듯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솜씨입니다"

 "유모가 만드는 음식을 무척 좋아하여, 재료를 가져다주시곤 이것저것 만들어 줄 것을 청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 덕에 저도 이 귀한 것들을 맛볼 수 있지, 사실 저희 집 형편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것들이지요.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영주댁이 내온 다과의 맛이 너무도 기가 막혀 정신없이 입에 넣기 바빴던 혜인은 문득 자신이 너무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서연은 혜인의 잔에 오미자차를 한 잔 더 따라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혜인을 바라보았다. 혜인이 자신과 무슨 이야기가 나누고 싶어 이리 찾아온 것인지 궁금하였으나, 혜인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가 이리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저도 결례인 줄은 알지만, 아씨를 다시 보니 너무 반가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은… 어렸을 때, 아씨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기억으로는 일전에 그네 터에서 말곤 혜인 아씨를 만났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렸을 때 자신을 만난 적이 있다는 혜인의 말에 서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혜인 같은 미모의 규수라면 아무리 어린 시절이었다고는 하나, 기억에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혜인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인지라 의아하기만 했다. 

 "후훗, 제가 어렸을 때와는 얼굴이 많이 다릅니다. 늦게 본 여식인지라 집안에서 하도 어여삐 여겨 이것저것 많이 먹인 탓에, 어렸을 때는 제법 살집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피부도 가무잡잡하여, 아무리 좋게 봐도 곱다고 할 수는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서연 아씨가 못 알아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백옥 같은 하얀 피부에 서연보다 큰 키를 지닌 늘씬한 혜인이 어렸을 때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살집도 있었다니, 아무리 해도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혹 아씨 댁에서 규방 모임이 있을 때면, 혼자 밖에 나와 있던 아이가 기억나십니까?"

 "아! 그럼, 그때 그 아이가 바로……. “

 서연은 그제야 혜인이 기억날 듯했다. 당최 바느질이나 수놓기에는 취미가 없었던 지라, 서연은 어머니의 규방 모임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규방 모임이 있어 어머니가 바쁘신 날이면, 서연은 도윤과 휘와 어울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가끔 안채 마당에 나와 있던 작은 아이를 발견한 적이 있는데, 아이는 서연이 말을 걸라치면 방으로 다시 들어가기에 바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바로 혜인이었을 줄이야…….

 "어머니를 따라 규방 모임에 나가긴 했으나 바느질이나 수놓기는 제겐 어렵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동무도 사귀지 못해, 어머니께는 적당히 둘러대고 늘 혼자 안채 마당에 나가곤 했지요. 거기서 몇 번 아씨를 뵌 적이 있습니다. 아씨가 제게 말을 걸어주긴 했으나, 그때는 어쩐지 부끄러워서 아씨와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제게 상냥하게 대해주시는 아씨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혜인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어머니께 아씨도 저처럼 바느질이나 수놓기에 서툴러 규방 모임에 나오시지 않는단 말을 듣고, 어쩐지 아씨가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언젠가 저도 아씨처럼 아리따워지고 나면, 용기를 내어 아씨에게 동무가 되어 달라 청하리라 마음먹었지요. 그런데, 그 뒤 갑자기 아씨 집안이 화를 당하고 더 이상 아씨를 뵐 수 없게 되어 늘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혜인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서연에게 환한 웃음을 보인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세월이 흘러 저도 아씨를 잊고 살다가 감찰 나리와 혼사 얘기가 오가며 다시 아씨의 이름을 듣게 되었습니다. 꼭 아씨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던 차에, 그네 터에서 우연히 아씨를 만나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제가 아씨를 찾아 온 까닭입니다. "

 혜인의 말이 끝나고 난 뒤에도 서연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도윤과 혼사가 오가는 집안의 규수라고만 여겼던 혜인이, 어린 시절 만난 적이 있던 그 작은 아이였다니…….

 "아까 제가 감찰 나리와의 혼담은 없던 일이 될 것이라고 한 말은 사실입니다. 며칠 전 감찰 나리가 저를 찾아와 이 혼담을 거절해 줄 것을 청해왔습니다. 감찰 나리가 멋진 분이시긴 하지만, 한평생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살 이를 서방님으로 맞고 싶은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시는 분이니, 아버지께 말씀드려 이 혼사를 거절할 생각입니다."

 자신 때문에 혼담이 무효가 될 수도 있단 생각에 서연은 그러지 말라고 혜인을 만류하고 싶었으나, 서연의 뜻을 읽은 혜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씨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저만을 아껴주는 이를 만나, 백년해로하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감찰 나리는 제 신랑감으로 적합한 분이 아니십니다. 감찰 나리에게 마음을 준 적도 없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더 진행되기 전에 이 혼담을 없던 일로 하는 게 저에게도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한양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도윤을 자신에게 적합한 상대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혜인의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당당해 보였다. 혜인이라면 필히 그녀가 원하는 신랑감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연은 혜인이 누구인지 알고 난 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혜인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두 여인의 이야기꽃은 서너 식경이 지나서야 끝을 맺을 기미를 보였다.     

 "서연 아씨, 제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혜인이, 서연에게 청이 있다며 부탁을 해왔다.

 "말씀해 보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씨보다 한 살이 많은데, 저를 언니라고 불러주시지 않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지금의 저는 아씨와 동무가 될 수 있을 만한 처지가 아닙니다. 제가 어찌 아씨를 그렇게 편히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저 가끔 이렇게 아씨와 담소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쓸쓸한 눈빛으로 자신의 청을 거절하는 서연을 보며 혜인은 마음이 아팠다. 변한 상황 때문에, 서연이 놓으려고 하는 것이 너무도 많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혜인은 서연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혹 제가 아씨와 입장이 바뀌었다면, 아씨는 달라진 제 처지 때문에 저와 동무가 될 수 없다고 여기셨을 겁니까? “

 "아, 그것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제야 혜인의 진심을 알아들은 서연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만난 적이 있던 두 여자아이의 인연은 십여 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이어졌지만, 그 마음의 깊이는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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