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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23. 2024

15장. 서글픈 결심

 서연에게 전해 줄 기쁜 소식을 가지고 급히 서연의 집을 찾은 휘는 마침 대문에서 나오고 있던 한 여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자신과 도윤 외에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아는 휘는 의아한 얼굴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었기에 여인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하지만 휘가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여인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듯한 사내가 휘의 앞을 막아서며 더 이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진운아, 괜찮으니 비켜서거라."

 여인의 낭랑한 음성에 진운이라 불린 호위무사가 뒤로 물러났다. 다시금 나타난 여인의 모습은 비록 쓰개치마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두눈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었다. 

 "낭자는 누구시길래 이 집에서 나오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집에는 제게 누이동생과도 같은 이가 기거하고 있어, 이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낭자는 처음 뵙는 듯합니다만..."

 혜인은 한눈에 눈앞에 서 있는 잘생긴 사내가 사간원의 정언 김휘 임을 알아보고,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

 "저는 예조 판서 대감의 둘째 여식 박혜인이라고 합니다. 서연이와는 동무 사이이니,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연이를 만나러 오셨나 본데,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그럼......" 

 도윤과 혼담이 오가는 여인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서연의 동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휘로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제 할 말이 끝나자마자, 휘가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에 그대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여인들은 휘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거나 말이라도 한 번 더 걸고 싶어서 안달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순식간에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여인은 난생처음이었다. 한 번도 여인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 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왜 예판 댁 여식이 이곳을 다녀간단 말인가? 게다가 나를 보고도 그 데면데면한 반응은 또 뭐란 말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별채로 들어서는 휘를 발견한 서연이 방긋 웃음을 지으며 휘를 불렀다. 

 "휘 오라버니!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서연아! 내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혹 예판 댁 규수가 이곳에 다녀간 게 맞느냐?"

 "아, 오시는 길에 혜인 언니를 보셨나 보군요. 맞습니다!"

 "혜, 혜인 언니?"

 휘는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예판대감 댁 여식을 언니라고 부르는 서연의 모습에 입이 쩍 벌어졌다. 일전에 서연의 집에 다녀온 게 불과 며칠 전인 것 같은데, 그 짧은 시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서연은 휘가 놀라는 것도 당연한지라, 일단 휘를 자리에 앉힌 뒤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휘는 서연과 예판 대감 댁 규수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지만, 서연의 말을 듣고 나니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윤이와 혼사 이야기가 오가는 규수와 동무로 지낼 수 있겠느냐?"

 서연은 혜인과의 인연에 대해서는 빠짐없이 설명해 주었지만, 어쩐지 혜인이 혼사를 거절하는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가 난처해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혼담은 없던 일이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게 정말이더냐? 참으로 잘 되었구나. 예판 댁 낭자가 그리 말하였다면, 허튼 말은 아닐 게다. 나도 이제야 한시름 놓겠구나."

 다행히 휘도 더는 물어오지 않았다. 휘는 다과상 위에 놓인 유과를 하나 집어 들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서연에게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서연아, 내 지난번에 모약과가 먹고 싶어 영주댁에게 청해 두었는데, 혹여나 만들어 둔 게 있더냐?"

 "아, 그것이… 모약과는 하나도 없습니다. 좀 전에 혜인 언니가 오셨을 때, 무척이나 입에 맞아하셔서 다 내어 드렸습니다. 오라버니가 오늘 오실 줄 알았으면, 남겨 두는 건데……. 다음에 오실 때는 꼭 넉넉히 준비해 두겠습니다."

 "괜찮다. 영주댁이 만든 거라면 무언들 맛이 없겠느냐? 이 유과로도 충분하니 괘념치 말거라."

 휘는 미안해하는 서연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다 말해준 뒤, 다시 한번 혜인을 생각했다.

 '내 용모에는 관심이 없으나, 내 과자에는 관심이 있는 여인이라……. 거참, 내 체면이 말이 아니군.‘

 휘는 서둘러 돌아서던 혜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크고 맑은 눈망울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쓰개치마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얼굴이 몹시도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오늘따라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아까 들어오실 때도 그러시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유과 하나를 손에 든 채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휘를 보며, 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서연아… 혹 오늘 내 모습이 평소와 좀 달라 보이느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거 왜, 있잖느냐……. 오늘 입은 도포가 좀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마노 갓끈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거나, 그도 아니면… 내 얼굴이 오늘따라 그다지 잘나 보이지 않는다거나……. 뭐, 그런 거 말이다."

 "예?"

 서연은 의아한 얼굴로 휘의 말에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휘가 이런 물음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도 생소했다.  

 "어디 보자……. 청록색 도포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시고, 푸른빛 입영은 오라버니의 훤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음… 그러고 보니, 평상시보다 오늘이……."

 "오늘이?"

 서연은 잠시 말을 멈춘 뒤,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제가 아는 휘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서연은 풋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곧 제 눈에 비친 휘의 모습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평상시보다 오늘이 딱! 곱절로 잘생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 다 물으시다니, 오라버니답지 않습니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막상 서연의 말을 듣고 나니, 제 용모에 대해 물었던 것이 어쩐지 민망해진 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큼큼, 아무것도 아니다. 네게 별 걸 다 물었구나. 신경 쓰지 말거라."

 휘는 이제야 눈앞에 놓인 다과상이 들어오는지 오미자차를 한 잔 들이켠 뒤, 유과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달콤한 유과가 입 안에 들어오자, 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들뜬 목소리로 서연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내 정신을 봤나……. 예판 댁 규수를 마주치고 하도 놀란 탓에 네게 전해 줄 말이 있어 온 것을 깜박하고 있었구나."

 서연은 왠지 휘가 전해줄 말이란 게, 도윤과 관련된 것일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옷날 이후로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도윤이었다. 사헌부 일이란 게 워낙 바쁜 터라 사사로이 시간을 내는 게 어렵긴 했지만, 도윤은 한양을 떠나 있는 게 아닌 이상은 어떻게든 짬을 내어 서연을 보러 오곤 했다. 도윤을 위해서는 이 집에 드나드는 게 좋을 것이 없다 여기고는 있지만, 막상 도윤이 보이지 않으면 그의 안위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윤이에게 교지(敎旨)가 내려왔는데, 사헌부 지평에 제수한다는 상감마마의 사령장이라는구나."

 "아……."

 스물둘의 나이에 정오품의 벼슬에 오르다니, 실로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서연은 아버지가 살아생전 도윤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알고 있었기에, 제자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시는 게 너무도 안타까웠다. 

 "감찰직에 오른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 반대하는 대신들도 있었지만, 그간 윤이 세운 공이 워낙 혁혁한 데다 상감마마의 뜻이 굳건한지라 인사가 무리 없이 단행되었단다. 네게 제일 먼저 달려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을 텐데, 일이 워낙에 바쁜가 보더구나. 지금쯤 네가 보고 싶어 아주 애가 타고 있을 게다."

 서연은 아무 말 없이 휘가 들려주는 도윤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어려서부터 윤이가 수재 소리를 듣긴 했다만, 가끔 윤이를 보면 벗인 나조차도 그 뛰어난 기량에 놀랄 때가 있단다. 윤이가 이번 규찰 업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대로 윤이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자꾸나."

 도윤의 승진 소식을 제 일처럼 기뻐하는 휘의 모습을 보며, 서연은 도윤에게 휘처럼 좋은 벗이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자신과 도윤의 인연은 머지않아 끝이 나겠지만, 휘만은 언제까지나 도윤의 곁에 남아 그에게 의지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서연은 도윤을 위한 축하연을 준비할 생각에 들뜬 휘를 바라보며, 이제는 정말로 자신의 존재가 도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헌부 지평은 대관(臺官)의 업무를 수행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지평직에 올랐으니, 앞으로 도윤이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도윤이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낼수록 그를 지지하는 세력뿐만 아니라 그를 시기하고 무너뜨리려는 세력들도 생겨날 터. 만약 도윤에게 제 아비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 없어 서연은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힘있는 가문의 여인과 혼인을 해야 앞으로 닥칠 위험 앞에서도 그를 지켜줄 수 있으리란 사실이 자명한데, 이를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휘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함께 웃으며 기쁨을 나누었지만, 서연의 웃는 얼굴 한편에는 서러운 서글픔이 묻어났다. 서연은 자신의 이런 감정을 휘에게 들킬 것만 같아, 유과를 좀 더 가져오겠다는 구실을 대고 급히 방을 나섰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세월이 흐르고 나면, 잊혀지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어. 부모님을 여의고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잖아? 오라버니를 보내주는 것이, 그분을 위하는 길이야…….'

 밖으로 나온 서연은 자신의 서글픈 마음 같은 건 모른다는 듯, 저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밝게 빛나는 별들이 야속하리만치 아름다웠다. 같은 한양 하늘 아래, 같은 별을 보고 살아가고 있어도 도윤은 저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도윤이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이라도 그 정을 끊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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