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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24. 2024

16장. 결코 해줄 수 없는 한 가지

 지평직에 봉해진 도윤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감찰직에 있을 때도 많은 업무를 수행하긴 했으나, 대관(臺官)의 업무를 수행하는 지평과는 그 업무의 막중함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현장에 파견되어 규찰 업무를 주로 하는 감찰과는 달리, 언관으로서의 언론 활동을 하는 대관의 업무는 도윤이 가장 필요로 하던 일이었다. 비리 관원에 대한 탄핵이나 간쟁의 권한을 얻음으로써, 드디어 영의정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윤은 영환에게 칼날을 겨눌 그날을 위해, 몸의 고단함도 잊고 업무에만 정신없이 매달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옥구현으로 떠나야 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서연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있던 도윤은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연의 얼굴을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던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대장청을 나서려는데, 때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집의(執義) 서형욱과 장령(掌令) 김태식을 마주치게 되었다.

 "이지평, 내 오늘 자네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할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마침 자네도 오늘은 업무가 일찍 끝난 듯하군."

 "집의 영감, 외람된 말씀이오나, 오늘은 제가 긴한 일이 있습니다. 규찰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제가 먼저 모실 터이니, 오늘은 양해해 주십시오."

 "아니, 영감께서 친히 청하시는 자리를 거절하다니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도윤의 정중한 거절에 정작 형욱은 가만히 있는데, 그 옆에 있던 태식이 벌컥 화를 내며 도윤을 다그쳤다.

"괜찮네. 이지평이 과중한 업무로 제시간에 퇴청한 게, 도대체 언제 적 일이었나? 용무를 볼 시간도 없었을 터이니, 오늘이라도 일찍 들어가게 해 주게. 이지평, 어서 가보게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도윤에게 어서 가보라고 손짓하는 형욱은 도윤이 처음 사헌부에 왔을 때부터 도윤의 재능과 강직한 성품을 무척이나 아끼는 상관이었다. 그에 반해 도윤의 비범함을 시기하던 태식은 사사건건 도윤에게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자신은 늦은 나이에 급제해 마흔을 훌쩍 넘겨서야 장령이 되었는데, 새파랗게 어린 도윤이 벌써 지평직에 오르자 시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태식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돌아서는 도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집의 영감이 자꾸 감싸고 도시니, 이지평이 저렇게 버릇이 없는 게 아닙니까? 사헌부의 기강을 우습게 보고 제멋대로 굴다니, 한 번 본때를 보여줘야겠습니다."

 "어허, 그만하게나! 이지평이 언제 버릇없게 굴었단 말인가? 이지평만큼 예의가 바르고 청렴하며, 과중한 업무에도 싫은 내색 하나 없는 이를 내 일찍이 본 적이 없네. 게다가 또 능력은 얼마나 출중한가? 그런데도 교만한 태도라곤 일절 찾아볼 수도 없네. 그런 이가 긴한 용무가 있다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자네는 어찌 그리 아랫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겐가, 쯧쯧."

 도윤의 허물을 들추어 내려다 오히려 상관의 꾸지람만 듣게 된 태식은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언젠가 네 놈의 그 잘난 낯짝이 구겨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김장령이 꽤나 열이 받았겠구나."

 "분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채로 대장청을 나서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영환은 수하로부터 좀 전에 사헌부 대장청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고 받고 있는 중이었다. 도윤이 옥구현 전(前) 현감의 아들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도윤의 움직임을 간과할 수 없게 된 영환이었다.

 '사헌부 장령이라……. 일이 재미있게 되었군."

 사헌부 내에 자신의 조력자가 생긴다면, 앞으로 도윤을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터……. 영환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영환은 수하에게 사헌부 장령 김태식에 대해 낱낱이 조사해 올 것을 명했다. 본시 사람이 잘나면 잘날수록, 그것을 시기하는 적들도 많은 법이었다. 인간의 본성은 제가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이를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론 갖지 못한 그 능력을 두려워하고 질시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영환은 그런 어리석은 인간의 본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데는 도가 튼 자였다. 영환은 수하가 보고한 내용이 퍽 마음에 든 듯,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느긋한 손놀림으로 연신 수염을 쓸어내렸다.

 "내 조만간 김장령을 위로하는 자리를 한 번 마련해야겠구나. 새파랗게 어린놈 때문에 제 상관에게 꾸지람까지 듣고, 그 속이 얼마나 말이 아니겠느냐? 껄껄껄."

 영환이 말하는 자리가 결코 김장령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수하는 영환을 따라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 영 심기가 불편했던 영환이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기에, 그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적당히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맞추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거짓 웃음을 만들어낸 수하는 앞으로 자신이 감시해야 할 이가 하나 더 늘었음을 직감했다. 



**   

  


 형욱과 태식을 만난 탓에 시간이 지체된 도윤은 서둘러 서연의 집으로 향했다. 급히 오느라 관복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지만, 어차피 서연의 얼굴만 잠시 보고 갈 생각이었던 터라 의복의 불편함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이 지평 나리가 되어서 오셨군요!"

 "잘 있었는가, 영주댁? 내 그동안 오고 싶어도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었네. 휘를 통해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여 별일은 없었는가?"

 "예. 휘 도련님이 자주 들러주시고, 돌쇠도 수시로 오가며 집안일을 돌봐주어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씨께서도 며칠 전부터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신 듯하니 어서 별채로 가보시지요."

 "낭자가 나를 기다렸다고? 그게 정말인가?"

 "예, 도련님."

 서연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믿지 못할 말에 놀란 표정으로 영주댁을 쳐다보니, 영주댁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며칠 전부터 서연이 도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지평의 자리에 오른 도윤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일 거라고 지레짐작한 영주댁은 급히 걸음을 옮기는 도윤의 뒷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과연 영주댁의 말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서연이 툇마루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자신을 보면 돌려보내기에 바빴던 서연이 두말하지 않고 안으로 들 것을 청하자, 도윤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잘 지냈소? 내 사령장을 받자마자 그대에게 달려오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했소. 휘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지평직에 제수(除授)되었다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으나 상감마마의 성은으로 중한 직책을 맡게 되었소."

"참으로 장하십니다. 돌아가신 아버님도 아마 하늘에서 나리를 지켜보며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겁니다."

 서연의 입에서 스승의 얘기가 나오자, 도윤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승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그 모습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고맙소……. 그대가 이리 칭찬해 주니, 그동안의 수고가 하나도 고생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 같소. 이번에 옥구현 일만 마무리 짓고 오면, 앞으로는 지방에 규찰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가 없는 동안은 휘와 돌쇠가 자주 다녀갈 것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꼭 그들에게 말하시오."

 과중한 업무로 얼굴이 말이 아니면서도 도윤의 머릿속은 온통 서연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늘 자신의 안위보다 서연이 우선인 도윤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도윤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말없이 도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서연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도윤에게 대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서연의 입에서 순순히 그리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도윤은 깜짝 놀라 서연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도윤은 서연의 분위기가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혹여나 자신의 노력이 이제야 서연의 마음에 닿기라도 한 것일까? 도윤은 갑자기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이라면 왠지 서연에게 옥지환을 건네주어도, 그것을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드는 도윤이었다. 도윤이 품 안에 갈무리하고 있던 옥지환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서연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리, 제게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꼭 들어주셔야만 합니다."

 "뭐든 말해보시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리 해줄 것이오."

 자신을 바라보는 도윤의 눈빛이 어찌나 다정한지, 서연은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의 관계를 정리해야만 했다.  

 "나리, 휘 오라버니가 제게 하는 것처럼, 나리도 저를 누이로만 대해 주십시오. 나리가 그리해 주신다면, 저도 다시 나리를 예전처럼 편히 대하겠습니다."

 좀 전까지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서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청천벽력 같은 말에 도윤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정혼한 여인을 어찌 누이로 생각하라는 말이오? 그럴 수 없소."

 도윤은 단호하게 서연의 청을 거절했다. 

 "그저 어린 시절 가볍게 오간 얘기일 뿐입니다. 그 언약을 맺은 분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지킬 필요도 없는 약조에 얽매어, 어찌 장래를 망치려 하십니까?"

 "장부가 어찌 한 번 약조한 일을 번복한단 말이오? 스승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소."

 "나리, 어찌 그리 어리석은 말씀을 하십니까? 지난날의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정녕 조정의 기대를 저버리려 하십니까?"

 평소에도 늘 도윤의 마음을 거절하는 서연이었지만, 이번은 제대로 마음을 먹은 듯 그 단호함이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대와 혼인을 하는 것이 조정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오? 처가의 위세를 등에 업지 않아도 내 얼마든지 나라에 큰 힘이 될 수 있소. 그러기 위해 지금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고."

"그 노력, 하지 마십시오. 편한 길을 두고 왜 사서 위험한 길을 가시려는 겁니까? 나리의 안녕을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리께 기대를 걸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눈이 보이지도 않습니까? 나리 한 사람만 마음을 바꾸시면, 모두가 다 편해질 수 있습니다. 부디 집안에서 정해주는 훌륭한 가문의 여인과 혼인하여, 나리의 힘을 키우십시오. 영상에게서 나리를 지켜줄 수 있는 힘 있는 가문의 여인과 혼인하셔야만 합니다!"

 스승의 복권을 위해, 영상의 잘못을 벌하기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을 돌려받은 서연이 다시 웃을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도윤은 서연의 냉정한 말에 미치도록 가슴이 아팠다. 서연은 어찌 그리 쉽게 자신을 놓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제게 서연이 어떤 존재인데…….

 "미안하지만 그대의 청은 들어줄 수가 없겠소. 그대도 감정이 격해진 듯하니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시오. 한양에 올라오는 대로, 내  다시 오리다."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도윤을 보며, 서연은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윤이 끝을 맺지 못한다면, 자신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도윤을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어째서 제 마음은 생각도 하지 않으십니까? 애초에 제가 하고 싶었던 혼인이 아닙니다. 나리가 싫단 말입니다. 나리와 혼인하고 싶지 않은 제 마음도 존중해 주십시오!"

 힘없이 돌아서던 도윤은 서연의 마지막 말에 충격을 받고,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서연의 마음이 자신처럼 깊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싫다는 서연의 말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것이었다. 

"내 눈을 보고 말해 주시오. 그것이 그대의 진심이 맞소?"

도윤은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서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로... 내가 그렇게 싫은 게요?"

 서연과 눈을 맞춘 도윤이 다시 한번 서연에게 물어왔다. 그렇다고 어서 말을 해야 하는데, 슬픔이 깊게 서린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차마 입에서 독한 말을 쏟아낼 수가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불안하게 흔들리는 서연의 눈빛을 보며, 도윤은 서연의 말이 전부 다 진심은 아닐 거라고 애써 위안을 삼았다.      

 "방금 그대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소."     

 "나리!"     

 "이번 규찰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게요. 부디 몸 보중하고 있으시오."     

 "나리! 제발 다시 생각하십시오!"     

 서둘러 방을 나서는 도윤을 보며 서연이 다급히 외쳐보았지만 도윤에게선 아무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서연은 결국 또 제자리로 돌아온 도윤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좀 더 모질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도윤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서연의 말을 막고자 급히 방을 나서긴 했으나, 막상 별채를 벗어나고 난 뒤에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싶은데, 그대는 어찌 내가 해줄 수 없는 그 한 가지 만을 바라는 것이오? 미안하오. 그대를 놓지 못하는 내 이기심이 그대를 힘들게 해서……. 그럼에도 그대를 놓을 수가 없어서, 참으로 미안하오…….'

 천천히 돌아서는 도윤의 등 뒤로 한껏 쓸쓸한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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