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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17. 2024

11장. 달빛 아래, 그 설렘

 새로 생겼다는 세책점은 서연이 늘 가던 곳보다 두 배는 더 큰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과연 서책의 종류도 다양했고, 그 수도 훨씬 많았다. 서연은 의서가 진열된 곳을 찾자마자 정신없이 서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도윤과 휘는 서연이 서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건…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예전부터 꼭 보고 싶었던 의서가 눈에 띄자, 서연은 반색하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먼저 서책을 꺼내 드는 것이 아닌가? 제게 서책을 내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서연의 눈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스승님!"

 "구급간이방은 구급방서(救急方書)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만합니다. 언해가 잘 되어 있어, 보시기에도 편하실 것입니다."

 "스승님도 단오 구경을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세책점 주인장에게 부탁해 둔 서책이 들어왔다고 기별을 받아 들렀습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서연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미소는 봄바람을 머금은 듯 산뜻했다. 서연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 도윤과 휘가 서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네는……?"

 "휘 오라버니, 이분은 제 스승님이십니다. 근자에 제가 스승님께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오호, 서연이 네가 배우러 다닌다는 게, 그럼……?"

 "예, 여인인 제게도 편견 없이 가르침을 주시는 고마운 분이세요."

 "오호, 의원이라고?"

 휘는 오호를 연발하며, 서연이 스승이라고 소개한 사내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두 분 나리를 뵙습니다. 구리개에서 의원을 하는 최승원이라고 합니다."

 "아니, 무슨 의원의 인물이 이리 훌륭한 겐가? 환자들이 자네 얼굴만 봐도 저절로 치료가 되겠군그래. 허허, 거참 뉘 집 자식인지 참으로 잘생겼군, 잘생겼어."

 휘는 점잖은 목소리로 자신을 의원이라고 소개한 승원이 마음에 들었다. 좀 더 승원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아차 싶어진 휘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도윤은 서연이 휘나 영주댁 외의 다른 사람에게 곁을 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저렇게나 훤칠하고 준수한 사내라니……. 휘에게 느끼곤 하던 투기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도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승원은 자신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휘에게 마주 웃어 보이다, 그 옆에서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반악(潘岳)에 견줄 만큼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다. 승원은 두 사람이 한양 도성 안에서 가장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사헌부의 감찰 이도윤과 사간원의 정언 김휘 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잠시 도윤의 얼굴에 머물던 승원의 눈길이 도윤의 도포 자락 아래에 닿았다. 승원은 도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잠시 제게 팔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도윤은 말없이 승원을 응시하다 도포 자락을 걷어 팔을 보여주었다. 승원은 상처를 동여맨 천을 풀어낸 뒤 한참을 살펴보더니 다시 도윤의 팔을 놓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처치를 아주 잘했습니다. 이대로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되실 때, 의원에 한 번 들러 주십시오. 의원에는 좀 더 많은 약재와 고약이 있으니 회복 속도가 훨씬 빠르실 겁니다."

 스승의 입에서 자신의 솜씨를 칭찬하는 말이 나오자, 서연은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도윤은 흐뭇한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보는 승원과 수줍은 미소로 그에 답하는 서연의 모습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휘가 도윤의 불편한 심기를 읽고선 서둘러 자리를 파하고자 승원에게 인사를 고했다.

 "최의원이라고 했던가? 집안 어른들이 드실 탕약을 지으러 수일 내로 한 번 들르겠네. 그때 다시 보세."

 "언제든 환영입니다. 특별히 좋은 약재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승원은 돌아서는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그런 뒤 서연에게 다가가 자신이 들고 있던 서책을 내밀었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입니다. 곁에 두고 수시로 보십시오."

 "아니, 이 귀한 걸 어찌 제게……?"

 "이전부터 보고 싶어 하시던 의서 아닙니까? 뛰어난 제자에게 스승이 주는 작은 선물입니다. 그럼, 글피에 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고 돌아서며 서연은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집에 돌아가 서책을 펼쳐 보고 싶은 마음에,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승원에게 받은 서책을 소중히 품에 안는 서연을 보며 도윤은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서연에게 옥지환을 건넬 수조차 없는데 오늘 본 서연의 스승이란 자가 스스럼없이 서연에게 선물을 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도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서연아, 구리개라 하면 나이가 지긋한 박의원이 하는 의원이 제법 유명한 걸로 아는데, 최의원이 하는 의원은 이번에 새로 생긴 곳이더냐?"

  승원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한 휘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 박의원이 바로 스승님의 외조부세요. 연로하신 외조부를 대신해 스승님이 의원을 이어받으셨대요. 약재를 팔러 간 것이 인연이 되어 스승님께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도윤은 아까 승원이 서연에게 글피에 보자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럼 의원에는 얼마에 한 번씩 가는 게요?"

 "엿새에 한 번씩 가고 있습니다."

 엿새라……. 그리 자주는 아니긴 했지만, 승원과 서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엿새가 아니라 달포에 한 번씩이라도 싫을 것 같았다. 서연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배우게 해주고 싶지 그것을 막고 싶지는 않았지만, 승원의 번번한 얼굴을 생각하면 서연이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었다. 도윤은 자신이 이렇게나 도량이 좁은 사내였나 싶어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도 싫은 마음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연은 아까부터 도윤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아 신경이 쓰였지만 그게 승원 때문이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종일 거리에 나와 있어 도윤의 몸에 무리가  은 아닌지 그것이 걱정될 뿐이었다.

 "오늘 두 분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였습니다. 망설였던 것이 무색할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집 앞에 이르자, 서연이 도윤과 휘에게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네터에서 만난 여인들로 인해 잠시 심사가 어지럽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두 사람과 함께 단옷날을 보내길 잘한 것 같았다.

 "예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서연이 집안으로 사라졌다가, 이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서연은 먼저 휘에게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을 내밀었다. 휘가 서연에게서 받아 든 물건은 녹색의 세조대(細條帶)였다.

 "값비싼 것은 아닙니다. 너무 약소하여 드리는 것도 부끄럽지만,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입니다."

 "약소하다니? 내 이리도 맘에 드는 세조대는 처음이구나! 이제 다른 세조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는걸, 하하!"

 휘는 세조대를 받아 들자마자 자신의 허리에 둘린 세조대를 풀어버리고, 서연이 준 것을 착용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휘가 세조대를 마음에 들어 하자, 안심이 된 서연은 이번에는 도윤에게로 다가섰다.

 "내 것도 있는 게요?"

 도윤이 기쁜 마음으로 서연에게 묻자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윤에게 청색의 세조대를 건네주었다. 도윤이 그것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민 순간, 손끝이 닿자마자 서연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을 거두어 버렸다. 갑자기 낮에 넘어질 뻔한 것을 도윤이 잡아주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서연이 자신과 닿는 것을 피하는 것만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고맙소. 소중하게 간직하리다. “

 도윤도 서연에게서 받은 세조대를 그 자리에서 바로 착용했다. 맑은 가을 하늘을 닮은 푸른빛 세조대가 도윤의 환한 얼굴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도윤은 도포 안에 갈무리하고 있던 옥지환을 꺼내 자신도 서연에게 전해주고 싶었으나 이를  서연이 받아줄 리 만무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애써 마음을 누르며, 대신 아까 운종가에서 사 왔던 수리취떡과 앵두 절편을 서연에게 내밀었다.

 "아, 유모가 앵두 절편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걸 파는 곳이 있었나 보군요. 감사합니다."

 마음의 무게가 담기지 않은 가벼운 선물인지라, 서연도 편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설마 내 건 없는 겐가?”

 휘가 도윤의 빈 손을 살피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연이 풋 하고 웃으며 제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려고 하자, 도윤이 서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그 뱃속에 수리취떡이 한가득 들어가는 걸, 내 똑똑히 보았네만.”

 “한창 자랄 나이라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단 말일세!”

 “이미 다 자라고도 남을 나이 아니었나?”

 “하!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이래 봬도 어디 가면 아직 열여덟로 본단 말일세!”

 서연은 얼핏 티격태격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도 사이가 좋은 도윤과 휘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어렸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무런 근심 없이 셋이서 어울려 다니던 그때로…….

 시도 때도 없는 휘의 농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도윤은, 문득 서연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앞에서는 늘 차가운 얼굴만 보여주려 하는 서연이, 잠시 무방비한 얼굴을 하고 어렸을 때처럼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그 예쁜 웃음을 감추긴 했지만, 찰나의 순간이라도 도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밤하늘엔 여인의 고운 눈썹 같은 초승달이 높게 걸려 있었다. 그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서연의 얼굴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아름다워 보였다. 도윤은 문득 서연과 단옷날을 함께 보낸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자신을 내치기에 바쁜 서연이, 이렇게 세조대까지 선물해 주었으니 그게 어디인가?

 이렇게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서연에게 다가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녀의 마음이 열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도윤은 밤하늘에 걸린 미황색 달을 바라보며, 서연에게도 오늘 하루가 자신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날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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