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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26. 2024

18장. 그리움을 달래주는 현

 "아이고, 지평 나리. 오셨습니까? 어서 이리 드시지요."

 전라도 옥구현의 현감 김덕수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도윤 일행을 맞았다. 덕수는 전(前) 현감이 의금부로 압송되고 난 뒤 새롭게 부임한 현감이었다. 덕수는 이 젊디 젊은 사헌부 지평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은 터라, 미리부터 관아의 기강을 바로잡고 도윤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기생을 부르는 술자리를 마련하지 말라는 전언이 있어 따르긴 하였으나, 덕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술 싫어하고, 여인 싫어하는 사내가 어디 있다고……. 제가 혹여나 실수를 하는 건 아닌가 하여, 아까부터 흘끔흘끔 도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덕수는 동헌을 둘러보겠다는 도윤의 말에 앞장서서 동헌을 하나하나 안내하기 시작했다. 형형한 눈빛으로 동헌을 둘러보고 있는 도윤의 얼굴에서 딱히 못마땅한 기색이 비치지 않자, 덕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헌을 모두 둘러보고 난 뒤, 덕수는 내아(內衙) 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도윤을 안내했다. 조용한 곳에 자리를 마련하라는 명에 따른 것이었다. 

 "현감, 차린 음식이 지나치게 많은 듯하네. 한양에서 객이 온다고 자네가 마음 써준 것은 고맙네만, 보다시피 일행의 수에 비해 과한 양이네. 이쪽 상에 놓인 음식이면 충분하니, 나머지는 거두어 관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게."

 방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불호령이라도 떨어지는 건 아닌가 하여 지레 겁을 먹은 덕수는 도윤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을 위해 마련한 각종 산해진미를 노비들에게 나누어 주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지평 나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겐가? 어서 음식들을 거두어 가도록 하게."

 하지만 도윤의 옆에 있던 현규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정신이 번쩍 든 덕수는 관노들로 하여금 상을 내가도록 한 뒤 다시 자리를 정돈했다. 본디 덕수도 사치스러운 인물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한양에서 사헌부 지평 나리가 내려온다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어 평소와 달리 거하게 차려 낸 상이었다. 덕수는 혹여나 제가 늘 이렇게 진수성찬들로 가득한 음식을 먹는 줄 오해라도 할까 봐 괜히 눈치가 보였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내뿜는 기운이 어찌나 서늘한지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도윤은 자리에 앉자마자 덕수에게 정무 보고부터 받고, 승계받은 현감의 업무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전들까지 모두 물리고 자신만 자리하게 한 도윤의 의중이 궁금하긴 했으나, 감히 묻지도 못한 채 덕수는 성실하게 보고를 마쳤다. 도윤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덕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미리 알아본 대로 이 신임 현감은 비록 배포가 작아 보이긴 했으나, 관리의 본분에 충실한 자인 듯하였다. 규찰 업무를 수행하며, 뒤로 은밀히 전(前) 현감의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감인 덕수의 조력이 필요했다. 도윤은 덕수의 마음을 꿰뚫어 볼 듯한 눈빛으로 가만히 덕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총기로 빛난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선량함이 느껴지는 맑고 곧은 눈이었다. 도윤은 덕수가 믿고 일을 맡겨도 좋을 만한 사람이란 판단이 서자,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전(前) 현감이 한양에 압송되던 날, 그자의 아들이 사라졌네. 노비 하나가 현감의 아들 행세를 하고 대신 잡혀 들어갔더군.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현감의 아들은 행적이 묘연해진 뒤였네. 전(前) 현감의 아들을 찾게. 그자는 아직 옥구현을 벗어나지 못하였네."

 덕수는 도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백성들을 수탈하고 공물을 빼돌린 죄로 현감과 그의 아들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들었는데, 그 아들이 도망을 쳤다니……. 덕수는 이 서늘한 사헌부의 관원이 그래도 자신을 신뢰해 이런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는 생각이 들자, 좀 전까지의 숨 막히는 긴장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새로 부임한 현감인 자네를 감시하고, 민생치안을 살피며 옥구현을 규찰하는데 전념할 것이네. 그자의 행적을 쫓는 것은 은밀히 진행하게. 그자를 찾는 다른 무리들이 있었네. 반드시 그들보다 먼저 전(前) 현감의 아들을 찾아야 하네."

 "분부 받들겠습니다. 제가 또 사람 찾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앞날이 창창한 사헌부의 관원이 은밀히 자신에게 명을 내리자, 덕수는 일이 잘되면 자신도 덕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왠지 이 사내를 실망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내 대신, 박감찰이 이곳에 남아 일을 도모할 것이네. 자네는 박감찰을 도와 일이 한시라도 빨리 해결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이네. 그리고, 이 일은……."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저는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만……."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입이 무거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덕수에게선 이제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윤은 그런 덕수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알고 보면 배포가 작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나서야 도윤은 수저를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시장기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자신이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수하들도 편히 음식을 들 수 없을 것을 알기에 마지못해 한 술이라도 뜨려는 것이었다.

 옥구현으로 내려오기 전, 도윤이 서연을 만나러 갔던 것을 알고 있던 현규는 시름이 있는 듯한 상관의 얼굴을 보며 서연에게 갔던 일이 잘되지 않았음을 짐작했다. 현규는 휘를 제외하고는 도윤이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는 벗이자, 믿고 일을 맡기는 수하였다. 현규는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난 역량과 인품을 지닌 도윤에게 매료되어, 처음 만날 날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도윤을 따랐다. 현규는 도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시간을 내어 서연을 만나러 갔던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도윤의 어두운 얼굴이 마치 제 일인 듯 마음이 아팠다. 

 "지평 나리, 이곳의 일은 제게 맡기시고, 하루빨리 한양으로 돌아가십시오. 일이 진행되는 대로 수시로 연통하겠습니다."

 도윤은 믿음직스러운 현규의 얼굴을 보며, 알았다는 듯 엷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라진 자의 행적을 쫓는 일이라면 현규와 다른 수하들로도 충분할 것이었다. 덕수는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관리였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있는 듯하였다. 그 덕에 규찰할 것도 많지 않아 한양으로 돌아갈 시일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자 그동안 참고 있던 그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서연 낭자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조금쯤은 내 생각을 할까……?'

 서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도윤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현규의 노한 음성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기녀를 들이지 말라는 지평 나리의 전언을 듣지 못한 겐가?"

 기녀로 보이는 듯한 한 여인이 가야금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서려다, 현규의 호통에 놀라 자리에 멈춰 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제가 어찌 지평 나리의 분부를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유흥을 위해 부른 아이가 아니니, 우선 제 말부터 좀 들어보십시오."

 아닌 게 아니라, 술자리를 위해 불러들인 기녀라면 혼자일 리가 없었다. 

 "본디 양반집 여식이었으나, 집안이 망한 뒤 관기로 팔려온 아이입니다. 아직 나이는 어리나 가야금을 뜯는 솜씨가 어찌나 훌륭한지 저희만 알고 있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실력입니다. 허락하여 주시면 먼 길을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지평 나리를 위해 한 곡조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도윤은 잔뜩 겁먹은 눈빛으로 가야금을 꼭 끌어안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라 하기에는 아직은 아이에 가까운 앳된 얼굴에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네가 그렇게 현을 잘 다루느냐?"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자, 기녀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곤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숙여 버렸다. 눈앞의 사내는 단연코 자신이 살면서 본 가장 잘생긴 사내일 것이었다. 한양에서 왔다는 사헌부의 지평 나리가 이토록 젊은것도 놀라운데, 게다가 숨 막히는 수려함까지 갖춘 사내라니……. 어린 기녀는 너무 떨려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나리께서 물으시질 않느냐?"

 도윤의 물음에도 기녀가 묵묵부답이자, 보다 못한 덕수가 대답을 재촉했다. 현감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기녀가 곧 도윤에게 공손히 대답을 해왔다. 

 "비천한 실력이라 현을 잘 다룬다고 감히 말씀드릴 순 없으나, 현을 다루는 것이 무엇보다도 즐거운 것만은 사실입니다."

 "왜 현을 다루는 것이 즐거운 것인지 물어보아도 되겠느냐?"

 "아, 그것은……."

 기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도윤의 물음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위로를 받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쁠 때 들으면 기쁨이 두 배가 되고, 슬플 때 들으면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 하였습니다. 제가 하는 무언가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현을 연주하는 것이 제겐 특별한 일이 되었고, 현을 다루는 순간이 가장 즐겁게 되었습니다."

 말이 끝난 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가야금을 어루만지는 기녀의 말투와 행동에서 기품 있는 양반가의 여식이었던 태가 났다. 도윤은 문득 어린 기녀의 처지가 안타까워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가야금 연주를 허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윤은 기녀가 아직도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녀에게 말을 건넸다. 

 "내게 한 곡조 들려줄 수 있겠느냐? 현을 그토록 아끼는 네가 연주하는 소리는 어떨지 궁금하구나."

 그냥 명을 해도 될 것을, 연주를 해달라 청을 하는 도윤의 정중한 태도에 기녀는 놀란 눈으로 도윤을 쳐다보았다. 좀 전까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던 것도 잊은 채, 잠시 멍하니 도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덕수는 기녀의 연주를 허락하는 도윤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기녀에게 어서 빨리 연주를 시작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아 자세를 갖춘 기녀는 현을 몇 줄 튕겨 소리를 맞춰보더니, 숨을 고르며 다시 한번 긴장을 가라앉혔다. 돌연 눈빛이 변하는가 싶더니 시작된 기녀의 연주 소리에 일순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현을 타는 현란한 손놀림은 어찌나 빠르고 화려한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고, 그 손가락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튕겨 나오는 소리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구슬픔과 아름다움이 섞여 있었다. 덕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현규는 귀신에라도 홀린 표정으로 멍하니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보다 현을 아끼는 마음이 배인 기녀의 연주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특별함이 있었다. 기녀의 말처럼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만한 소리였다. 지금 기녀가 연주하고 있는 것은 마치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 주는 듯한 소리였다. 애달픈 서정이 담긴 가락이 가슴속에 스며들어와, 일렁이던 감정을 부드럽게 가라앉혀 주었다. 방 안 곳곳에서 기녀의 연주에 감탄한 사람들의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직 나이도 어린 기녀가 어찌 저런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도윤은 눈을 감고 묵묵히 기녀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도윤이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가야금 소리에 정신없이 빠져있던 현규가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도윤을 쳐다보았다. 비록 한 잔으로 그치긴 했으나, 규찰 업무 중에 도윤이 술을 입에 대는 것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규는 그 모습이 놀랍긴 했으나, 기녀의 연주가 제 상관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단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소리였다. 술 한 잔을 비워낸 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높게 걸린 달이 오늘따라 시리도록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쯤 한양에도 같은 달이 떠 있겠지……. 서연 낭자도 저 달을 보고 있을까? 한양에 돌아가서 그 얼굴을 보게 되면, 또다시 내게 자신을 놓으라고 말하겠지……. 그래도, 그 냉담한 얼굴이라도 좋으니, 어서 빨리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곡조가 끝이 나자 다시 수줍은 얼굴로 돌아온 기녀가 조심스럽게 도윤의 반응을 살폈다. 도윤의 얼굴에 묻어난 그리움을 눈치채고 부러 선택한 곡조였는데, 과연 그의 마음에 들었을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숨을 죽인 채 도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만을 기다리고 있던 기녀는 자신을 향한 도윤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제 연주가 나쁘지 않았단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어린 기녀는 곧이어 나온 도윤의 칭찬에, 비로소 제 연주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도윤의 마음을 사로잡았단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소리구나. 네 가야금 소리가 내게 많은 위로가 되었단다……. 고맙구나. 괜찮다면 다음에도 내게, 너의 이 훌륭한 연주를 들려줄 수 있겠느냐?"

 다음에 또 그에게 가야금 소리를 들려줄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녀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수십 번이라도 그에게 자신이 아끼는 현을 들려주고 싶었다. 덕수는 한낱 기녀에게조차 예의를 잃지 않는 도윤의 모습에, 참된 군자의 덕이란 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고 있는 듯했다. 

 그동안 제가 보아온 조정의 관리들은 그 지위가 높을수록 고개가 뻣뻣하다 못해 부러질 지경이었고, 저보다 못하다 여기는 사람들을 괄시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대대로 노론 명문가 집안의 자제인 이 젊은 사헌부 관원은 겸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덕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젊은 관리에 대한 충심이 절로 우러나오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제게 맡겨진 임무를 반드시 해내리란 결의까지 다지게 된 덕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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