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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27. 2024

19장. 현감의 아들을 쫓는 두 세력

 새로 부임한 현감의 업무가 차질 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도윤은 관아 밖으로 나가 며칠 째 백성들의 상황을 살폈다. 덕수의 사람됨으로 보아 선정을 베풀고 있으리라 짐작되긴 했으나, 직접 눈으로 살펴본 백성들의 실정은 기대 이상이었다. 푸릇푸릇한 벼가 자라고 있는 들판에서는 싱그러운 초록빛이 가득했고, 백성들의 얼굴 또한 싱싱한 벼들처럼 생기가 넘쳤다. 옥구현은 비록 작은 고을이긴 했으나 토지가 비옥하여 논이 많았고, 대하, 대게, 석수어(石首漁), 석화(石花) 등의 적지 않은 토산물이 나는 곳이었다. 위정자(爲政者)들이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넘치지는 않더라도 부족하지는 않게 살아갈 수 있는 평온한 곳이거늘……. 도윤은 한양으로 압송된 옥구현 전(前) 현감 김상민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지평 나리, 마을 곳곳을 살펴보았으나 딱히 문제 될 만한 것들은 없었습니다. 전정, 군정, 환곡 모두 과하게 거둬들이고 있는 것은 일절 없었으며, 부당하게 요역에 동원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현규의 보고를 들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도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전체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도윤은 상민을 잡아들였을 때, 그자의 집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재물들을 떠올리며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도대체 그 많은 재물들은 어디서 났단 말인가.....? 직접 눈으로 둘러본 옥구현은 토지가 비옥하고 토산물도 풍부한 편이긴 하였으나, 그래봤자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고을이었다. 게다가 재력가라 할 만한 지역유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상민이 축적한 재물들은 분명 다른 출처가 있다는 뜻이었다.      

 '도망간 전 현감의 아들을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그자를 붙잡아야 어떤 단서라도 잡을 수 있으리라…….'   

 도윤은 어쩌면 이번 일이 조정의 대신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권세가 막강하고 재력도 풍부한 세도가……. 예를 들면, 영의정 김영환 같은……. 이 작은 고을의 현감에게 막대한 뇌물을 손에 쥐어 주며, 은밀히 시킬 만한 어떤 일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신할 증거를 찾기 전에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현감이 새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토착 세력인 향리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을 걸세. 지금은 모든 것이 평온해 보이나 시일이 지날수록 현감을 조종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테니, 자네는 규찰 업무를 지속하며 현감이 안정적으로 수령의 업무를 다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게."     

 "예, 지평 나리. 한치의 소홀함도 없이 규찰 업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현감의 아들을 찾는 대로 연통하겠습니다."     

 도윤은 듬직한 현규의 모습을 바라보며 격려와 고마운 마음을 함께 담아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제껏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켜 본 일이 없는 현규였다. 이번에도 반드시 도망간 현감의 아들을 잡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주친 두 사람의 눈빛에서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마을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 현규가 먼저 자리를 뜬 뒤, 도윤도 관아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푸른 들판과 맑은 공기, 지지배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까지……. 작은 고을이지만 마을 전체에서 풍겨오는 아늑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도윤은 마을의 평화로운 정경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가에 여기저기 피어난 패랭이꽃들에 잠시 머물렀던 시선에, 어딘지 낯익은 얼굴을 한 여자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빨랫감이 가득 담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퍽 천진해 보였다. 여자아이는 도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지평 나리를 뵙습니다."     

 도윤은 제게 인사를 해오는 말간 얼굴이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가, 순간 일전에 제게 가야금을 들려주었던 기녀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의 아이는 도저히 기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수수하고 얌전해 보였다.      

 "아… 너로구나! 내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 네 나이와 이름조차 묻지를 못했구나. 괜찮으면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소녀의 이름은 월홍이라 하고, 올해 열넷이 되었습니다……."     

 "기명(妓名) 말고, 원래 네 이름 말이다. 아직 정식 기녀도 아니라고 들었다. 그러니 지금은 너를 기명으로 불러야 할 이유가 없을 듯하구나. "     

 천한 기녀에게 이름 따위가 무어 중할까……? 그 누구도 자신의 본명을 궁금해했던 사람은 없었다. 어린 기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도윤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게… 제 이름은 문초희라고 합니다……."      

 "초희라……. 네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초희, 네가 지난밤에 들려주었던 현은 내 평생 잊을 수 없을 듯하구나. 정말로 고마웠다."     

 초희는 한낱 기녀인 자신에게 이토록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는 젊은 선비를 보며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눈앞의 이 잘생긴 사내는 서책에 나오는 인(仁)을 그대로 구현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초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을 천하거나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저 또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나리께 제 현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야금을 배운 것이 이토록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습니다. 저도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리. 내일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신다 들었습니다. 부디 살펴 가십시오."     

 초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해왔다. 자세히 보니 제법 영리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아이였다. 올해 열 넷이라 하였던가.....? 죽은 누이동생이 살아 있었더라면, 초희와 같은 나이였을 것이었다. 잠시 누이를 생각하던 도윤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도윤은 씩씩한 얼굴로 제게 인사를 건네고 멀어져 가는 초희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집안이 망하고 부모까지 여읜 뒤, 분명 갖은 고생을 다 하였을 것인데도 초희에게는 아이다운 해맑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오래전 도윤이 처음 만났던 한 여자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새하얀 얼굴에 복숭아빛 볼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던……. 도윤은 어쩐지 초희가 마음에 계속 걸렸다.      

 '또 보자꾸나, 초희야…….'     

 초희를 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도윤이 이내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     



 도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숨어있던 검은 인영 두 개가 도윤이 서 있던 자리에 내려섰다.      

 "저 아이는 뭔가? 마을 주민인가?"     

 "그게… 관아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허드렛일을 돕고 있는 아이라 들었습니다. 아마 기녀인 듯한데 아직 정식 기녀는 아닌 듯합니다."     

 "기녀라고? 하, 저 목석같은 사내가 기녀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의외로구먼. 지평 나리도 사내는 사내였나 보지? 규찰 업무 중에 기녀에게 한눈이나 팔고."     

 복면을 한 검은 인영 중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 하나가 던진 말에 좀 더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사내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거리가 있어 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으나 그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것 말고는 딱히 기녀에게 한눈을 판다고 할 만한 일도 없었건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하지만, 내색은 못하고 그저 제가 해야 할 보고에만 충실했다.      

 "으레 하는 고을 규찰 외에는 특별히 다른 움직임은 보이질 않습니다. 지평 나리는 내일 한양으로 돌아가고, 그 수하가 남아 규찰 업무를 지속한다 들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전 현감의 아들이 도망간 것을 알고 있으니, 그자를 잡으려 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죄인의 아들을 잡아들이려 하겠지만, 그자를 잡게 된다면 전 현감과 그의 아들이 영상 대감을 위해 무슨 일을 해오고 있었던 지를 알게 될 것이다. 반드시 전 현감의 아들을 찾아 없애야만 한다. 알겠느냐?"     

 "예. 그나저나 석형이 형님도 옥구현으로 다시 내려오신답니까?"     

 "이미 한양에서 출발하셨다고 들었다. 우리는 형님이 오실 때까지 옥구현을 샅샅이 뒤져 현감의 아들을 찾아내면 된다."     

 영상 대감의 수족인 석형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중하다는 뜻……. 복면을 한 두 사내는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본 뒤 다시 빠르게 어둠으로 사라졌다. 좀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사위(四圍)가 고요하기만 했다. 아침밥을 짓는지 마을 어귀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수한 밥 짓는 냄새에 허기진 동네 개들이 어슬렁어슬렁 주위를 돌아다녔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한없이 평화롭기만 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현감의 아들을 쫓는 두 개의 세력이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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