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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Sep 30. 2024

20장. 도윤을 위한 축하연

 한양에 올라와 모든 용무를 마친 도윤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서연의 집부터 찾았다. 한양을 떠나오던 날의 일이 생각나 서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긴 했으나, 그보다는 보고 싶은 그리움이 훨씬 컸던 까닭이다. 도윤은 인자한 얼굴로 자신을 반겨줄 영주댁을 떠올리며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휘의 모습에 깜짝 놀라 뒷걸음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지평 나리. 몸성히 잘 다녀오셨습니까?"

 휘가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까지 굽혀 가며 도윤을 맞았다.

 "자, 네가 어찌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겐가? 아직 궐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자네가 돌아왔는데, 내 어찌 궐에서 허비하고 있을 시간이 있겠는가? 한시라도 빨리 자네를 위해 축하연을 열어주고 싶어 참을 수가 있어야지. 집에 급한 일이 있다 둘러대고 빠져나왔지 뭔가, 하하! 그리 감격한 얼굴로 쳐다보지는 말게. 그 잘생긴 얼굴로 자꾸 쳐다보면 내 가슴이 마구 널을 뛴단 말일세."     

 휘의 너스레에 정신이 없어진 도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휘의 뒤를 따랐다. 어쩐 일인지 휘는 오늘따라 유난히 들떠 보이는 모습이었다. 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별채가 아닌 사랑채 앞에 위치한 정자였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예조 판서의 여식인 혜인의 모습도 보였다.     

 ”어서 오세요, 지평나리. 저도 나리를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하고 싶어 오긴 했는데, 괜한 불청객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낭자는 이미 저의 벗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리 와주어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혼담을 거절해 달라는 자신의 청을 기꺼이 수락해 준 데다, 휘로부터 서연과 동무가 된 사연도 전해 들은 터라 혜인을 대하는 도윤의 태도는 온화하기가 그지없었다. 평소 도윤이 서연을 제외한 여인들에게 얼마나 무심한지 잘 알고 있는 휘였다. 따라서 혜인을 대하는 도윤의 다정한 모습이 영 낯설기만 했다. 게다가 자신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혜인의 저 태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거리를 두더니, 모든 여인들이 대하기 어려워하는 사내는 저리 편히 대하다니……. 휘는 순간 불뚝한 심사가 일어났지만, 그 연유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혜인과 인사를 나눈 도윤은 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곧 서연의 행방부터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연 낭자는 어디 있는 겐가?"     

 "서연이라면 잠시 별채의 약초밭에 갔는데, 곧 올 걸세. 아, 마침 저기 오는군."     

 휘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서연에게 다가가려던 도윤은 서연의 옆에 있는 승원의 모습을 발견하곤 얼굴이 굳은 채로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제멋대로 승원을 불러놓고 막상 도윤의 반응을 보니 아차 싶었던지, 휘가 어물거리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 그게 말일세……. 모름지기 잔치라면 사람이 많아야 제맛이지 않겠는가? 최의원은 내가 부른 것이니, 그 인상 좀 펴게나. 어쨌거나 자네를 축하해 주려고 여기까지 온 사람 아닌가, 하, 하, 하……."     

 도윤도 승원의 사람됨이 싫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벗으로 가까이해도 좋을 만큼 호의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린 것처럼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솟아오르는 투기를 억제하기가 힘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늘 차가운 얼굴만 보여주는 서연이 아니던가? 지금 승원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서연의 모습은 도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윤은 잔뜩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지평 나리, 감축드립니다. 나리의 연치에 벌써 지평직에 오르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 고맙네."     

 승원의 인사에 짧게 답한 도윤은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서 있는 서연에게 시선을 주었다. 승원은 잠시 서연을 바라보다, 이내 두 사람이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번에도 잘 다녀왔냐는 인사는 해주지 않는 게요?"     

 "……."     

 도윤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하지만 서연은 그런 도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여졌다. 막상 도윤이 눈앞에 서 있으니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 버렸던 것이다. 도윤은 아무런 대답이 없는 서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에 놀라 다급히 물음을 이어갔다.     

 "얼굴이 왜 이렇게 상한 것이오? 혹여 그동안 어디 아프기라도 했던 것이오?"     

 자신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도윤에게서 그윽한 묵향이 느껴졌다. 멀리해야만 하나 늘 서연을 안심시키는 그립고 익숙한 향이었다. 서연은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하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도윤과 시선을 마주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려는 눈빛을 진정시키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말을 꺼냈다.

 "날이 더워 잠을 설친 게 얼굴에 나타났나 봅니다. 아픈 곳은 없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난번 못다 한 이야기는 뒷날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휘 오라버니께서 나리를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편히 즐기십시오. 저도 오늘은 다른 건 생각지 않고, 그저 나리를 축하해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번 이야기라면 그때 내가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 일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그대도 잊으시오. 우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소."     

 "그게 무슨……."     

 서연은 더 말을 하려다, 오늘 이 자리가 다른 무엇도 아닌 도윤을 위한 자리임을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상처를 주었는데, 그를 위한 자리에서 또다시 도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얼른 오지 않고, 거기서 뭣들하고 있는 겐가?"     

 두 사람의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챈 휘가 손을 휘저으며 도윤을 불러들였다. 서연과 둘이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지만, 어서 오라고 재촉하는 휘의 목소리에 하는 수 없이 도윤은 서연과 함께 정자로 향했다.     

 "이 음식들 좀 보게. 영주댁이 자네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는가?"     

 "영주댁, 고맙네. 혼자 이리 음식을 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텐데……. 참으로 고생이 많았네."     

 "아이고, 아닙니다. 휘 도련님이 재료를 다 준비해 주셔서, 저는 그저 만들기만 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혜인 아씨께서 육전이랑 식혜까지 가져오셨지 뭡니까? 수고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은… 아씨가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유모! 내가 언제……."     

 정자에 오르고 있던 서연은 영주댁의 말에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절대로 도윤에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아무래도 영주댁은 도윤의 편인 게 분명했다. 가끔은 함께 살고 있는 자신보다 도윤을 더 따르는 듯 느껴지니, 휘가 농처럼 섭섭하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서연의 옆에 앉으려고 기다리고 있던 도윤은, 귀까지 붉어진 서연이 도망치듯 휘와 혜인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아쉬운 눈으로 지켜봤다. 하는 수 없이 서연의 맞은편에 자리한 뒤,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서연에게 말을 건넸다.     

 "괜히 나 때문에 그대와 영주댁이 고생했구려. 음식을 만드는 데 힘들진 않았소? 그대가 주는 것이라면 냉수 한 그릇이라도 달게 마실 수 있으니, 다음부턴 절대 이리 많은 음식을 차리지 마시오."    

 오늘 처음으로 도윤이 서연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직접 눈으로 본 혜인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냉철하다 못해 냉기가 흐른다고 소문난 사내가 저렇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니……. 그 눈빛이 어찌나 다정한지, 자신이 다 설렐 지경이었다.      

 "자자, 다들 자리에 앉았으니 우선 축배부터 들도록 하세. 최의원이 자네를 위해 특별히 가져온 약주가 이리 준비되어 있다네. 이 빛깔 한 번 보게나. 얼른 마셔 달라고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30년 근 산삼으로 담은 산삼주입니다. 산에서 굴러 넘어진 심마니를 치료해 준 적이 있는데, 회복된 뒤 고맙다고 기어이 선물로 주고 간 것입니다. 한 잔씩 마시면 몸에도 좋은, 그야말로 약주입니다."     

 산삼주라는 말에 혜인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이 났다. 아무리 예판 대감이 여식에게 관대하다고는 하나, 여인의 몸으로 술까지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약주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더없이 반갑기만 했다.     

 "최의원, 내게도 산삼주를 한 잔 주게나."     

 "산삼주는 조금 독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산딸기주도 준비하였으니 그걸로 드셔도 괜찮습니다."     

 "아닐세. 나는 산삼주로 하겠네. 이래 봬도, 술을 좀 할 줄 안다네."     

 혜인은 사내들 앞에서 술을 할 줄 안다고 말하는 게 쑥스러우면서도 호기롭게 잔을 내밀었다.      

 "이리 주게. 내가 낭자에게 한 잔 따르겠네."     

 휘는 승원에게서 술병을 받아 든 뒤 혜인의 잔에 조심스럽게 산삼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딱 마시기에 좋은 양의 액체가 졸졸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잔에 담겼다. 보면 볼수록 눈이 가는 여인이었다. 보통의 양가 댁 규수들처럼 얌전을 빼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음전하지 않은 구석도 없었다. 이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운 것만은 확실했다.     

 "아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술을 드실 수 있으십니까?"

 "아……."     

 술이라곤 한 번도 입에 대보지 않은 서연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망설이던 서연은 도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술이라도 마셔야 눈앞에 있는 도윤을 덜 의식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한 산삼주를 마실 자신은 없었던지라 곧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산딸기주를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서연이 머뭇거리며 내민 잔에 승원이 술을 따르려고 하는 순간, 부드러운 손길이 서연의 앞을 막아섰다.      

 "서연 낭자에게는 산딸기주가 좋을 듯하네. 자네가 주는 술은 내가 대신 받도록 하지."     

 승원은 안심하는 듯한 서연의 표정을 보며 그제야 자신이 서연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내는 말로 하지 않아도 서연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아는 듯했다. 어쩐지 마음이 헛헛해지는 것 같았지만 승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도윤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저도 한 잔 주십시오. 오늘의 주인공이신 나리께 한 잔 받고 싶습니다."     

 도윤은 어딘지 묘하게 호전적인 승원의 눈빛을 바라보며, 승원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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