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잎새 Oct 01. 2024

21장. 취기가 가져다준 꿈같은 시간

 "자자, 다들 잔이 채워졌으니 어서들 잔을 들게. 오늘처럼 기쁜 날, 어찌 술잔을 주고받지 않을 수 있겠나? 지평직에 오른 윤을 위해 다 같이 건배하세!"

 휘의 말에 다들 도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술잔을 들었다. 휘와 혜인이 제일 먼저 잔을 비웠고, 도윤은 산삼주의 향을 음미한 뒤 천천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승원은 그런 도윤을 한 번 바라보곤 곧 잔을 깨끗이 비워냈다. 서연은 난생처음 맛보는 술맛이 생각보다 너무 향기롭고 달게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한 잔을 다 마셔 버렸다. 이런 맛이라면 한 병도 다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더욱 흥이 난 휘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송강의 장진주사를 읊으며 팔을 상하로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절제된 동작으로 흥을 표현하는 휘의 몸짓은 무언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어딘가 모르게 그럴듯해 보였다. 나름 학춤을 추려는 것 같기는 한데, 요란한 수탉 같은 몸짓이 왜 한 번씩 곁들여지는 것인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도윤은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았고, 서연은 휘의 춤사위가 익숙한 듯 갈채를 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혜인은 신기한 눈으로 휘를 바라보면서 저도 따라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러야만 했다. 승원은 이런 떠들썩한 자리가 낯설긴 했지만, 어쩐지 이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산삼주가 가져온 취기 탓일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마음이 즐거운 것이 사실이었다.

 승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휘의 춤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서연에게로 향했다. 잠시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원은 휘를 보며 웃느라 서연이 아직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본시 주변 사람을 잘 챙기는 다정한 성정인지라, 별 뜻 없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육전을 한 점 집어 서연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도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도윤은 가슴에 화르륵 불길이 이는 것을 애써 참으며, 자신도 얼른 노릇하게 익은 산적 하나를 서연의 그릇에 올려 주었다. 도윤의 젓가락이 서연의 그릇에 왔다 가는 것을 보고 있던 승원은 다시 배추 전 하나를 집어 들어 서연의 그릇에 놓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도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승원이 거듭 서연의 그릇에 음식을 올려 주자, 도윤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도윤은 승원에게 질세라, 얼른 닭고기 두 점을 서연의 그릇에 턱 하니 놓아두었다.

 "아니, 저더러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휘의 춤사위에 넋을 놓고 있던 서연이 문득 제 그릇에 높게 쌓여 가는 음식을 발견하고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평소 점잖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내 둘이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둘이서 아주 그냥 서연이 네 배가 터지게 하기로 작정했나 보구나. 이리 주렴, 내가 대신 먹어주마."

 접시를 가득 채운 음식들을 내려다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서연을 대신해, 휘가 접시에 놓인 음식들을 제 입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앞다투어 서연의 접시에 음식을 담기 바빴던 도윤과 승원은 휘의 입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음식을 본 뒤에야 슬며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뒤늦게 자신들의 유치한 행동에 후회가 밀려오는 두 사람이었다.

 잔이 여러 번 돌고 차린 음식도 거의 비워져 갈 때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영주댁이 막 만들어낸 송화다식을 들고 정자로 올라왔다. 다들 배가 꽉 차서 별다른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휘와 혜인만은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송화다식을 반겼다.

 "휘 도련님이 오늘 꼭 송화다식을 준비해 달라 하셔서 이리 내오긴 했습니다만, 배가 차서 과자 맛이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영주댁, 본디 과자 배와 밥 배는 따로 있는 법이라네. 밥 배가 부르다고 어찌 영주댁의 과자맛을 모르겠는가? 내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네."

 송화다식에 대한 기대감인지 산삼주로 인한 취기 탓인지, 혜인의 두 볼이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 있었다.

휘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혜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낭창한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혜인의 말에 동조했다.

 "지당한 말이오. 과자를 대하는 낭자의 태도가 참으로 훌륭하오."

 과자를 앞에 두고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던 휘와 혜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식 하나를 집어 들어 입 안으로 가져갔다.

 "세상에, 나리는 이 맛난 걸 늘 드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살면서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부러워 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럼 영주댁이 과자를 만들 때마다, 그대도 와서 함께 맛을 보면 어떻겠소?"

 휘는 과자를 핑계 삼아 넌지시 다음에 또 혜인을 볼 구실을 만들고 있었다. 이 여인을 보면 생겨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면, 어쨌거나 다시 이 여인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과자에 마음이 빼앗긴 혜인은 별생각 없이 그리하겠다 답하며, 다음엔 영주댁이 어떤 과자를 만들지 벌써부터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밤새 이어질 것만 같던 흥겨운 분위기는 혜인을 데리러 온 진운이 나타난 뒤에야 끝날 기미가 보였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휘도 덩달아 일어나며 옆에 있던 승원에게도 그만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지평 나리는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아, 영주댁이 윤이에게 할 말이 있다지 뭔가? 윤은 잠시 뒤에 일어날 터이니, 우리 먼저 돌아가도록 하세."

 도윤이 서연과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휘는 도윤에게 눈짓을 보낸 뒤, 서둘러 승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눈치 빠른 영주댁마저 자리를 비켜주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공간이 고요한 적막에 잠겼다. 도윤은 아까부터 말이 없는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연에게로 다가갔다.

 "낭자, 괜찮으시오?"

 "……."

 "서연 낭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서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도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깜짝 놀란 도윤이 서연을 살펴보니  다행히 취기가 오르는 것 말고는 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오히려 새하얀 피부에 발그레한 홍조가 더해지니 평소보다 더 어여뻐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도윤은 손을 뻗어 그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 오라버니가 싫습니다."

 서연의 말에 도윤의 눈빛흔들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서연이 자신을 나리가 아닌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서연의 입에서 오라버니라는 소리가 나온 게 도대체 몇 년 만의 일인지……. 취기 어린 얼굴로 자신이 싫다고 하는 서연의 말은 이상하게도 진심이 아닌 게 느껴져 지난번처럼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내 어디가 그리도 싫은 게요?"

 도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라버니의 그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 싫습니다."

 "이 얼굴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나도 어찌할 수가 없소만……. 다른 이들은 보기 좋다 말하여 던데, 그대 눈에는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게요?"

 "… 수재 소리를 듣는 오라버니의 그 총명함도 싫습니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는 총명한 것이, 총명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

 도윤은 어쩐지 서연이 어린 시절처럼 자신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만 같아 그 투정을 모두 받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도 싫습니다. 무예마저 뛰어난 것도 싫습니다. 오라버니에게서 나는 그 묵향마저도… 싫습니다."

 도윤은 계속되는 서연의 말에 뭐라고 답해 주어야 할지를 몰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가 그저 그런 사내였으면… 이리도 뛰어난 사내가 아니었다면, 저도 두 눈 딱 감고 오라버니에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제가 욕심내기에는 너무 큰 사람입니다…….'

 서연은 마지막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속에 삼긴 채 다시 얼굴을 제 무릎에 묻어 버렸다. 고개 숙인 서연의 모습이, 자신이 글공부로 바빠 놀아주지 못할 때면 토라져 풀이 죽곤 했던 어린 날의 서연과 겹쳐 보였다. 도윤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서연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새 잠이 든 것인지 새근새근 하는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내일이면 서연은 오늘의 일을 다 잊고, 또다시 자신을 거절하기 바쁘겠지……. 그래도 취기가 만들어 준 이 짧은 시간이 더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라 해도 좋았다. 이것만으로도 서연이 아무리 자신을 밀어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얻기에는 충분했으니.

이전 20화 20장. 도윤을 위한 축하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