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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02. 2024

22장. 목련각에서의 밀담

 한양 최고의 기방, 목련각은 오늘도 본채와 별채 모두 만실일 만큼 많은 객(客)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일 년 내내 찾는 손님들이 끊이질 않아 어지간한 권세로는 이곳에서 술 한 번 먹기도 힘들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목련각이 그토록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곳 기녀들의 미모와 재주가 유달리 빼어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목련각 자체가 갖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풍스러움을 물씬 풍기는 본채와 아름다운 연못 주위로 정갈하게 들어선 별채들은 잘 가꾸어진 수목들과 조화를 이루며 더없이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 행수가 몰락한 사대부 집안 출신인지라 목련각을 마치 고관대작의 저택처럼 고즈넉하게 꾸몄다는 말이 떠돌았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목련각은 허세 떨기 좋아하는 양반들 뿐만 아니라 돈 많은 중인들도 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곳인 것만은 분명했다. 특히 자목련이 만개하는 사월이면 목련각 전체를 뒤덮는 자색 꽃잎들이 바람에 흐드러진 모습이 압권이었다. 그 때문에 사월에 목련각을 드나들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지만 목련각은 비단 사월뿐만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 할 것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그야말로 한양 최고의 기루였다. 그런 목련각 안에서도 단연 으뜸이 되는 곳을 꼽으라면 본채 가장 깊숙이 위치한 밀실, 자목련일 것이었다. 규모도 가장 크고, 방 안에 들인 모든 것들이 최고로만 이루어져 우아함이 극치를 이루는 곳이었다. 게다가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어 세도가들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 자목련을 즐겨 찾곤 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대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꽃처럼 아리따운 기녀의 안내에 따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안으로 들어서던 사내는 그 유명한 목련각의 자목련에 와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영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자리에 앉는 사내는 바로 사헌부의 장령 김태식이었다.

 "어서 오게나, 김장령."

 "영상 대감,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허허, 사헌부 관원들이 얼마나 바쁜지 내 잘 알고 있거늘, 이깟 기다림이 무어 대수겠는가? 괘념치 말게."

 "헌데 저를 이리 부르신 연유가 무엇인지……."

 자목련의 화려한 분위기에 눌려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태식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의아한 눈빛으로 영환을 바라보았다. 기별을 받고 목련각으로 걸음 하긴 하였으나, 영상 대감이 자신을 이리 은밀히 부른 이유가 짐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허, 사람 참 급하기는……. 자네를 기다리느라 아직 젓가락도 들지 못했으니, 우선 음식부터 먼저 들도록 하세. 마침 목련각에 감홍로(甘紅露)가 들어와 있군그래. 자네, 운이 퍽 좋은 듯하네."

 영환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태식의 잔에 감홍로를 따랐다. 탐스러운 붉은 액체가 잔을 가득 채웠다. 태식은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제 잔에 따라진 감홍로를 순식간에 들이켰다. 이름처럼 달고 깊은 맛이 온몸에 퍼지자,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사헌부의 기강은 궐 내에서도 엄격하기로 유명하지… 안 그런가?"

 잔이 몇 번 돌았다 싶을 즈음, 영환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도대체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수라상에서도 잘 보기 힘든 음식들에 차마 손이 가지 않던 태식은 그나마 익숙한 음식들만 몇 점 집어 들어 배를 채우던 중이었다. 난데없이 사헌부의 기강을 들먹이는 영환의 의도가 미심쩍었지만, 태식은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장단을 맞추었다.

 "그렇습지요……. 저희 상대(霜臺)의 엄숙한 기풍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그것도 다 옛말인가 보더군. 요즘 젊은 관원들은 선진(先進)을 알기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 것 같더군."

 태식은 문득 지난번에 이지평이 집의의 부름을 거절하고 제 용무를 보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 일로 한마디 했다가 오히려 상관에게 꾸지람만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 저도 모르게 울분이 차올랐다.

 "어린 나이에 지평직에까지 오르니 아주 기고만장하여, 상관 어려운 줄도 모르는 이가 있긴 합니다"

 태식은 생각만으로도 분하다는 듯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기다렸던 대답을 들어 만족스러워진 영환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지평이 시건방지긴 하지. 그러잖아도, 나 역시 벼르고 있던 참일세. 불혹이 넘은 자네가 장령직에 머물고 있는 게 도대체 몇 년째인데, 그 새파란 애송이를 덜컥 지평직에 앉힌단 말인가? 자네 마음이 어떨지 내 진즉에 헤아리고 있었네."

 자신을 편들어 주는 듯한 영환의 언사가 듣기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 음흉한 노인네가 다만 자신을 위로해 주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분명 아닐 터였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 이리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지평과 관련된 일이란 건 짐작이 되었다.

 "근자에 이지평이 감찰업무로 옥구현에 다녀온 걸로 알고 있네."

 "예, 옥구현에 새로 부임한 현감을 감찰하기 위해 갔습지요. 한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내 듣자 하니, 이지평이 옥구현에서 공무를 빙자해 사사로이 제 볼일을 보고 다녔다는군 그래. 게다가 어린 기녀에게 한눈을 판 정황도 있다는군."

 "예? 이지평이 기녀에게 한눈을 팔았단 말씀입니까?"

 아무리 이지평이 눈에 거슬린다고는 해도 그가 기녀에게 한눈을 팔았다는 영환의 말은 솔직히 믿기 힘든 것이었다. 이지평이 어떤 사내인가? 하도 꼿꼿하게 굴어 시건방지다 느끼긴 해도 그가 여색을 밝힐 인물이 결코 아니란 것쯤은 태식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지평을 흠집 내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한 듯했지만, 굳이 나서서 이지평을 편들어 영환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태식은 입을 꾹 닫은 채 그저 묵묵히 술잔만 비워대며 영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난번 옥구현 규찰 때는 상소를 올려 일정까지 더 연기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전(前) 현감의 비리를 적발했다고는 해도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라기엔 일정이 지나치게 길었단 말일세. 그 기간 동안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게지."

 이지평이 상소를 올려 옥구현에서의 일정을 더 연기해 달라고 청한 것은 사헌부 내에서만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태식은 궐 안에 영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앞으로는 분명 자신에 대한 감시도 심해질 터였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해줄 일이 있네. 자네도 이 버릇없는 수하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지 않은가?"

 "제가 해야 할 일이란 게……?"

 "내 사람을 시켜 옥구현에서의 이지평의 행적을 빠짐없이 알아볼 참이네. 자네는 이지평이 옥구현에 머물렀던 동안의 규찰일지를 내게 가져다주면 되네. 바로 필사한 뒤에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아무도 모를 걸세. 만약 이지평의 행적과 규찰일지에 적힌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필벌(必罰) 감이네."

 '규찰일지를 빼돌리라니!'

 태식은 생각지도 못한 영환의 말에 대경실색(大警失色)하여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비록 이지평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사헌부 관원으로서 규찰일지를 외부로 유출한다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화를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잘되기만 한다면 올해 안에 집의 자리는 자네 것일세. 어디 집의 자리뿐이겠는가? 장차 대사헌의 자리까지도 내 힘써 봄세. 조정에는 자네처럼 유능하고 말이 잘 통하는 인재가 필요한 법이라네, 안 그런가?"

 영환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웃음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태식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잠시도 태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태식은 좀 전까지 올라오던 취기가 한순간에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영환은 대사헌의 자리를 언급하면 태식이 냉큼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태식이 아무런 말없이 머뭇거리기만 하자 혀를 끌끌 차며 언짢은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쯧쯧, 자네 보기보다 소심한 구석이 있나 보군. 나는 기다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네. 나이가 들수록 여유란 걸 가져야 하는 법이거늘, 이 조급증은 어찌 해가 갈수록 더 심해지기만 하는지 모르겠네.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부디 시일을 너무 끌지는 말게. 이참에 자네가 대사헌감이 맞는지 그 역량을 한 번 보여주게나."

 말이 역량을 보여달란 것이지 실은 공공연한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태식은 영환이 규찰일지를 반출하라는 말을 꺼낸 뒤로는 무슨 정신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 시간만 흘러 보내다 목련각을 빠져나왔다. 착잡한 마음으로 좀 전까지 제가 머물던 목련각을 돌아보니, 그 고풍스럽고 아름답던 외관은 어디 가고 위험하고 음산한 기운만 물씬 풍기고 있었다. 태식은 절로 흠칫 몸이 움츠러들었다. 한참을 제자리에 못 박인 듯이 서 있던 태식은 갑자기 무언가 결심이 선 듯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련각에서 멀어져 가는 태식의 뒤로, 둥당 둥당 가야금을 뜯는 소리와 맑고 고운 기녀의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고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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