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말이 다 틀린 것도 아닙니다. 서책을 한 번 읽기만 해도 내용을 다 알아 버리니 소자도 모르는 사이에 학우를 깔보고, 스승마저 우습게 여기며 세상을 쉽게 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윤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제 아비를 향해 씁쓸한 웃음을 보이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미 다 알아 버린 것을 어찌하여 다시 익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자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라면, 이리 주야로 익혀야 할 필요도 없는 듯합니다. 소자, 이제 서책을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소자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늘 조용하던 아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뛰어나다 하여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을……. 아이의 총명함을 칭찬만 하였지, 그 뛰어난 머리 때문에 아이가 겪었을 혼란과 고통은 한 번도 헤아려주지 못했다. 또래의 아이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이 분명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을 터인데, 기대라는 부담감만 잔뜩 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석은 아들에게 무어라 말을 해 주어야 할지를 몰라 답답했다. 본시 다정한 말을 할 줄 모르는 성정인지라, 제 입에서 나온 말이 혹여라도 아들의 마음에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조심스러웠다.
"… 어쩌면 동생이 그리된 것도 모두 제 탓이 맞을수도 있습니다. 이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오라비의 동생따위, 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다, 윤아! 그것은 절대로 네 탓이 아니다. 어찌 그것이 너와 상관있다는 말이냐? 행여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아이를 사산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긴 하나,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석은 아들을 위로하고자 다급히 말을 꺼냈으나, 아들은 그저 공허한 눈빛으로 아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도윤은 서당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서책을 읽지 않았으며, 말을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윤화는 자신이 부족해 아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탓이라며 오열했다. 의원에게도 데려가 보았지만, 그저 마음에 병을 얻었을 뿐 신체는 지극히 건강하니 처방할 만한 마땅한 약재도 없다는 말만 하였을 뿐이었다. 아들은 더욱 마음을 굳게 닫고 혼자 방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두 해라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다.
한석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느꼈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한석은 고심 끝에 비록 당파는 달랐지만, 학식도 뛰어나고 덕망도 높기로 칭송이 자자한 성균관 대사성 민성렬을 찾아가기로 했다. 노론인 한석과 소론인 성렬은 사적으로는 교류조차 없던 사이였으나, 제 아들을 믿고 맡기기에는 성렬만 한 인물이 없었다. 아무리 아들을 위한다고는 하나, 당파가 다른 이를 찾아가 아들을 부탁한다는 것은 한석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성렬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왜 그토록 많은 성균관 유생들이 대사성을 존경하고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성렬은 한석에게서 사정을 듣고 난 뒤, 도윤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제 어미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억지로 걸음 한 아들과 함께 다시 성렬의 집을 찾았을 때, 놀랍게도 아들은 성렬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열두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봄날, 도윤은 그렇게 성렬의 제자가 되었다. 성렬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여 당장 아들이 어떤 변화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서책을 펼치는 일은 없었고, 말문이 다시 열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성렬의 집에 가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한석은 그것 만으로도 되었다 생각하며,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아들이 다시 서책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한석은 감격에 겨워 성렬을 얼싸안고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다.
도윤의 변화는 그뿐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오면 병석에 누워있는 윤화에게 자신이 하루 동안 무엇을 하고 왔는지를 들려주곤 했다. 원래도 말수가 적은 아이인지라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말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성렬의 딸인 서연과 처음으로 사귄 휘라는 벗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윤화는 아들이 그 아이들과 어울리며 다시 아이다운 감정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화가 건강을 거의 회복하게 될 때쯤엔 도윤의 얼굴에도 다시 웃음이 피기 시작했다. 한석은 당파를 뛰어넘어 성렬과 벗이 되었고, 집안끼리 교류를 하며 부인들도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도윤이 열여섯, 서연이 열세 살이 되던 해, 혼사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서연이 열일곱이 되면, 혼례를 치르기로 약조를 하였던 것이다.
그사이 성렬은 높은 학식과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다. 소론인 성렬이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르자 반발하는 노론들도 있었으나, 성렬이 누구보다도 적임자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대제학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실로 명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임금의 곁에서 사사건건 바른말만 해대는 성렬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자들도 생겨났다. 그 무리의 선두에 노론의 거두, 김영환이 있었다.
한석은 벗의 뛰어난 능력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강직한 성품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소론 출신인 데다 처가마저 한미한 가문인지라 그를 지지해 줄 만한 세력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마저 부친상을 당해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을 때는 몇 번이나 조심하라는 당부를 거듭했다. 하지만 한석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영환이 성렬에게 역모죄를 씌워 한순간에 집안을 몰락시켜 버렸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한석은 성렬 부부의 부고 소식마저 듣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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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한석은 가슴이 아팠으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마음을 굳혔다. 한석도 아들이 다시 감정을 찾게 해 주고, 학문에도 매진할 수 있게 해 준 벗과 그의 딸의 은혜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벗이 정쟁에 휩쓸렸을 때, 처가라도 든든했다면 그리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임을 알기에 아들이 같은 길을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네 마음이더냐? 나 또한 내 아들과 내 가문을 지키고자 하느니라. 내 아들이 제 발로 위험한 길로 뛰어드는 것을 아비인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으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야겠다. 나를 원망해도 좋다. 그래도 내 생각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니, 그리 알고 물러가거라."
"아버지!"
"아마 그 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게다……. 그러니, 네가 단념하거라."
한석은 아들의 상처받은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등을 돌려 버렸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악역이 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도윤은 결연한 태도로 등을 돌리고 선 아비의 모습에, 굳은 얼굴로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어 검을 들고 나와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윤이 다시 서책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무예를 함께 익힐 것을 권한 것은 다름 아닌 아비인 한석이었다. 언제든 다시 심적으로 힘든 순간이 올 수 있으니 신체단련을 통해 조금이라도 그것을 덜어 보라는 뜻에서였다.
앉아서 글공부만 하다가 몸으로 무언가를 익히려니 처음에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빨리 익히는 것은 비단 머리를 쓰는 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던지, 도윤은 무예를 익히는 데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난 뒤면 머리마저 맑아지는 것 같아 어느 순간 도윤은 누구보다 검을 드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푸른 달 아래 펼쳐지는 도윤의 검술은 현란하면서도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번뇌로 가득한 마음이 담긴 칼끝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연모하는 여인과 함께하고픈 바람이 왜 이리도 힘든 것인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하나면 되는데……. 그게 그리도 어려운 일인 것일까……? 어지러운 마음이 모두 쏟아져 나와 절정을 이룬 끝에, 바닥에 검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도윤의 몸도 무너져 내렸다. 극한으로 신체를 몰아붙인 도윤은 차가운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그대로 느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아마 그 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게다……. 그러니, 네가 단념하거라.'
한석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며 도윤을 괴롭혔다. 늘 자신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반대도, 세상의 시선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서연의 마음……. 언제 제게 와줄지 모르는 그 마음……. 그 마음에 닿지 못하는 것이 미치도록 애달픈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