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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03. 2024

23장. 도윤의 과거

 논할 것이 있으니 일찍 들어오라는 한석의 기별을 받은 터라, 도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즉시 사랑채로 건너갔다. 도윤이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한석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예판 대감이 혼사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자는 말을 하더구나."

 "……."

 "네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게냐? 여식이 이미 마음을 준 사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혼담을 진행할 뻔했다고, 예판 대감이 거듭 사죄를 하더구나."

 혼담을 거절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혜인은 도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도윤은 혜인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어찌하려고 예판 대감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인지 혜인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혜인 낭자에게 진짜로 마음에 둔 사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예판 대감에게는 내 탓을 하여도 될 것을…….'

 도윤은 혹여나 혜인이 집안에서 입장이 곤란해진 건 아닌지 알아보고,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나서서 예판 대감에게 해명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예판 대감의 여식과는 인연이 아닌 듯하니, 다른 혼처를 알아봐야겠구나. 너를 사위 삼고 싶어 하는 가문이야 널렸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게다."

 "아버지, 소자는 이미 서연 낭자와 정혼한 몸입니다. 어찌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소자, 서연 낭자가 아닌 다른 여인과는 절대 혼인할 수 없습니다!"

 혜인과의 혼사가 별 탈 없이 무마되었다 생각했는데, 한석이 다시 다른 집안과의 혼사를 거론하자 아무리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도윤일지라도 냉정을 유지하기가 힘이 들었다.

 "쯧쯧, 내 아들이 누구보다 총명하다고 여기고 있었거늘, 이제 보니 세상 어리석은 소리만 하고 있구나. 혼사가 어디 네 사사로운 감정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이더냐? 다 너를 위한 것이니 그리 알고, 새로이 혼처가 정해질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고 있거라."

 "아버지!"

 도윤은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한석이 답답했다.

 "더는 할 말이 없으니 그만 물러가 보거라."

 "소자가 어린 시절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잊으셨습니까?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던 소자를 웃게 하고, 아무것도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던 소자를 다시 학문에 정진하도록 해준 이가 누구였는지, 정녕 잊으셨단 말씀입니까!"

 한석은 도윤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들의 어린 시절…….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



 **



 도윤은 날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그 영특함이 남달랐다. 네 살에 이미 천자문과 소학을 뗀 것은 물론이고 서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대학, 논어 등의 사서삼경까지 읽기 시작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서당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엔, 예기와 춘추마저 다 읽어내게 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찬했고, 한석은 그런 제 아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당시 승정원의 승지였던 한석은 막중한 임무를 겸하고 있어 하루도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저 뛰어난 아들을 기특하게만 여겼지, 조정 일에 매달리느라 아들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 조차 없었다. 윤화 또한 둘째 아이를 사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닌 상태였다. 병석에 누워 하루하루를 보내는 지라, 아들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던 때였다.

 도윤은 서당을 다녀온 뒤엔 혼자 서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원래도 아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말수도 별로 없던 터라, 아들의 변화를 눈치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훈장이 한석을 찾아와 다른 서당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에야 한석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미 계절이 여러 번 바뀐 뒤에야 겨우 아들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부터 아들은 서책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어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으나, 단순히 말수가 적었던 예전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마치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리 물어봐도 아들이 묵묵부답이자, 한석은 사람을 시켜 서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오도록 했다. 서당의 노비 하나가 한석에게 불려 와 쭈뼛거리며 자초지종을 들려주었을 때, 한석은 진작 아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이 후회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도련님이 어려운 서책도 곧잘 읽으시니, 다른 도련님들이 강샘이 나시는지 툭하면 시비를 걸곤 했습니다요. 한 번은 도련님 자리에 놓인 서탁이 사라져 버린 적도 있고, 도련님의 서책을 찢어버려 글공부를 할 수 없도록 만든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일부러 다리를 걸어 흙바닥에 넘어지게 하는 것도 지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요. 그래도 도련님은 화 한 번 내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노비는 한석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훈장 어르신은 그럴 때마다 어쩐 일인지 다른 도련님들을 혼내지도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셨습니다. 훈장 어르신이 답하기 어려운 것을 도련님이 물어보곤 해서 그렇다고, 다른 도련님들이 숙덕거리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노비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니, 한석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곤 이내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딱히 반응을 보이시지 않으니, 다른 도련님들이 약이 올라 더욱 못살게 구셨던 것 같습니다. 처음 서당에 오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도련님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우의정 댁 도련님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심한 말을 하셨고, 그날 처음으로 도련님이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도련님께 얻어맞기까지 했는데, 얼마나 혼쭐이 났으면 그 도련님이 댁에 돌아가서도 아무 말을 못 한 듯합니다. 그래서 아마 그 일이 영감마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금시초문이었다. 그 점잖은 아이가 다른 이에게 주먹질을 한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우의정 댁 도령이 윤이에게 무어라 하였느냐?"

 "그, 그것이……."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거라."

 "도련님께 네 놈이 그렇게 잘났냐고, 서책 좀 빨리 익힌다고 세상이 우습게 보이냐고 시비를 거셨습니다. 도련님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훈장님도 얼마나 네놈을 꺼림칙하게 여기는지 아느냐며……. 네놈 때문에 서당 분위기가 다 흐려졌다며 재수 없는 놈이라 하였습니다. 네가 그렇게 재수 없으니, 네 동생도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리되었을 거라고……. 너 같이 재수 없는 놈을 오라비로 두느니 차라리 그리된 것이 잘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한석은 노비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영감마님……. 괜찮으십니까?"

 "… 계속해 보거라."  

 "예…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련님의 눈빛이 변하시더니 우의정 댁 도련님에게 주먹질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마님이 사산하신 일을 그리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련님이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요."

 한석은 윤화가 아이를 사산한 뒤 병을 얻어 몸져누웠을 때, 아들이 얼마나 상심했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몸이 약해 아이가 잘 생기지 않던 윤화는 어느 날 동생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아들의 말에 온갖 정성을 들인 끝에 겨우 아이를 가진 터였다. 워낙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아들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원한다는 말을 하였으니, 어미로서 어떻게든 아들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낳자마자 사산되어 버리고, 윤화마저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도윤은 어미가 그리된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큰 충격을 받았었다. 다행히 윤화가 고비를 넘기면서 아들도 겨우 안정을 찾았었는데, 다시금 아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그런 말을 하다니…….

 한석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조정 일에만 바쁘게 매달린 자신의 무심함이 견딜 수 없이 미안했다. 아들은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서당을 다니는 두 해 동안 한 번도 내색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한석은 도윤을 불러 서당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석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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