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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07. 2024

25장. 고마움이 빚어낸 착각일까?

 조참(朝參)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인정전에서 조회(朝會)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휘는 자신을 향한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히 예조 판서 박명훈 대감이 저를 쏘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혼담이 오가다 없던 일이 되어버린 상대는 제 벗이거늘, 어찌하여 제게 저리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오늘 혜인 낭자가 영주댁의 과자를 맛보러 서연이 집으로 오기로 한 것 때문인가……. 내가 대감의 여식을 과자로 꾀어내려 한다고 오해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예판댁에서는 서연이 집에 다녀온다고만 알고 있을 터인데, 혜인 낭자가 부러 거기에 자신도 함께 한다는 것을 아비에게 말할 리가 없었다. 휘는 조회가 열리는 내내, 이유도 모른 채 명훈의 따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



 "송구합니다! 제가 그만 큰 실수를 범해 버렸습니다!"

 휘의 의문은 서연의 집에서 혜인을 마주한 순간, 이내 풀리게 되었다. 서연이 갑작스러운 기별을 받고 승원의 의원에 가고 없는 사이, 서연의 집에 온 혜인이 자신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사죄부터 하는 것이 아닌가? 혜인의 행동이 아무래도 아침에 예판 대감이 자신을 그리 쏘아보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진정하시오, 낭자. 무슨 일이길래 이리 고개 숙여 사죄를 하는 것이오?"

 "그, 그것이 제가 그만 아버지께..."

 혜인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휘에게 이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하긴 했으나, 다시 생각해 봐도 간밤의 일은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



 "뭣이? 이지평과의 혼담을 없던 일로 해달라고?"

 "예, 아버지. 소녀, 아직 혼인에 뜻이 없습니다."

 "네 나이 스물이면 혼례를 치르고도 남을 나이다. 아니, 오히려 늦은 편이지. 그동안은 시집보내기도 아까워 너를 끼고 있었다만, 이지평 같은 사윗감이라면 나도 안심하고 딸을 보낼 수 있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혼담을 물러달라니?"

 혜인은 평소와 달리 강경하게 나오는 아비의 모습에 놀라긴 했으나, 어쨌거나 저라면 껌뻑 죽는 아비가 아니던가? 분명 제 뜻을 존중해 줄 것이었다.

 "지평나리는 조정 일로 너무도 바쁜 분이시라 그분과 혼인을 하게 되면 소녀, 그 적적함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자리면 너를 이리 보내겠느냐? 훌륭한 가문에, 시부모 되실 이판 대감댁 내외의 인품은 말할 것도 없고, 네 낭군이 될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한양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이지평이란 말이다! 이런 복을 걷어찰 생각을 하다니, 어찌 그리 철이 없는 게야?"

 "하지만 소녀는 좀 더 다정한 분을 낭군으로 맞고 싶습니다. 소녀에게 살갑게 말도 많이 건네시고, 늘 환하게 웃음도 지어주시는 그런 분 말입니다."

 도윤이 서연을 대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혜인의 본심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너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구나. 네가 누구보다 현명한 아이라 여겼거늘, 어찌 혼인에 대해서는 생각이 그리 짧은 게야? 곧 이판 대감을 만나 정식으로 혼담을 진행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안됩니다! 소녀, 지평나리와 절대 혼인할 수 없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제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자, 당황한 혜인은 저도 모르게 소리부터 지르고 보았다.

 "어째서냐? 왜 자꾸 이지평과 혼인하지 않겠다는 게야?"

 "그, 그것이……."

 명훈은 매사 제 의견을 똑 부러지게 밝히는 딸아이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의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형조 판서가, 제 여식에게 다른 사내가 생겨 진행 중이던 혼담을 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설마 제 딸아이도……?

 "혹여나 따로 연모하는 사내라도 있는 게냐?"

 "예?"

 혜인은 아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기가 막혔지만, 바로 아니라고 답하지 않는 여식의 모습에 명훈의 오해는 더욱 깊어졌다.

 "참말로 그런 거였더냐? 대관절 어떤 놈이냐? 네가 이지평도 마다할 만큼 그리 대단한 녀석이!"

 있지도 않은 상대를 어떻게 대라는 것인지……. 혜인은 난감한 얼굴로 제 아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서 고하지 못할까!"

 연이은 아비의 불호령에 정신이 없어서였을까? 혜인은 지금 생각해도, 제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도승지 대감 댁의 둘째 도련님이십니다!"

 "도승지 댁의 둘째 도령이라 하면… 사간원의 김정언을 말하는 게냐?"

 "그, 그렇습니다……."

 혜인의 대답을 들은 명훈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딸이 마음을 주었다는 사내가 별 볼일 없는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제 딸이 그런 바람둥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느라 아직 혼인에 뜻도 없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제 딸 혼자만 애를 태우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감히 내 딸을 홀려 혼사도 그르치게 해 놓고 나 몰라라 할 생각인 겐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명훈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며, 조만간 이 놈을 불러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조횟날 아침 고스란히 휘에게로 갔던 것이다.



 **



 혜인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휘는 당황하긴 했으나, 어쩐지 혜인을 돕고 싶었다. 분명 제게 곤란한 일인건 사실이었으나, 만약 혜인이 제 아비에게 다른 사내의 이름을 댔다면 그것이 훨씬 싫을 것만 같았다.

 "조만간 대감께서 우리 집을 찾아오시겠구려. 그전에 내가 먼저 대감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소. 아직 우리 집에선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대감이 찾아와 혼사 이야기를 꺼내시면 분명 좋지 않을 듯싶소. 어쨌거나 가장 가까운 벗과 혼담이 오가던 집안인데, 이리 갑자기 낭자가 나를 연모한다 하면 좋게 보시지 않을 게요. 그리고, 우리 집에서 반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대감은 더욱 화가 나실게요."

 "송구합니다. 제 짧은 식견으로 나리를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늘 무표정한 눈초리로 저를 보던 여인이, 제 옷깃을 잡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니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큼큼,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낭자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원래 집안 어르신들이 혼사 문제에는 예민하신 법이라오. 우리 집에서도 다른 건 다 하고픈 대로 하게 내버려 두시는 데도, 혼사만큼은 양보가 없으시오. 예판 대감께서도 낭자를 위하는 마음에 그리 하시는 것이니 대감께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시오. 귀한 딸을 좋은 데 시집보내고 싶은 것이 아비의 마음 아니겠소?"

 혜인은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위로해 주는 휘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경솔한 언사로 인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도리어 자신을 걱정해 주다니……. 오늘 보니 휘의 준수한 얼굴이 딱 제가 좋아하는 생김새임을 깨닫곤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여인을 좋아하는 사내라는 생각에 늘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 경계를 지우고 보니 지나치게 매혹적인 사내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대감께는 단옷날 낭자가 그네 뛰는 모습을 보고 내가 한눈에 반하였다 말씀드리겠소. 이미 윤이와 혼담이 오간다는 소리를 듣고 고뇌하였으나, 혼담만 오갔을 뿐 아직 혼약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 용기 내어 낭자에게 고백했다 말하리다. 윤이와의 혼담이 세간에서 좀 잊혀지고 나서 허혼해 달라하면 대감께서도 승낙해 주시지 않겠소? 일단은 대감의 마음을 진정시킨 뒤, 훗일을 어떻게 할지 다시 의논해 봅시다. "

 휘의 입에서 서로 연모하는 사이라는 말이 나오자, 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무리 거짓이라고는 하지만 휘와 연인 사이임을 연기하려니 부끄러운 마음이 물 밀듯이 밀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연모니, 고백이니 하는 말들을 하는 것을 보니 이런 일이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혜인은 바보처럼 저만 마음이 들쑥날쑥한 것만 같아 어쩐지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낭자, 우선 이 유밀과부터 좀 들어 보시오. 단 것을 먹고 나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것이오."

 휘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다과상에서 유밀과를 한 점 집어 들어 혜인에게 건넸다. 혜인은 그런 휘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점점 제 심장 소리가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휘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달콤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 제 착각이리라…….  어디 그뿐인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두 눈이 별빛을 머금기라도 한 듯 유독 반짝거리는 것도, 분명 제 착각이리라……. 오늘따라 유독 휘의 얼굴이 솜씨 좋은 화공이 세심하게 그려놓은 것처럼 지나치게 수려해 보이는 것도 분명 고마운 마음이 빚어낸 저의 착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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